사무총회 개회사 주님이 주시는 선물인 샬롬의 평강이 세인 지체들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면, 저와 여러분의 한국사회는 아무리 격변의 세월이라고는 하지만 진영논리, 집단적 님비, 이전투구식의 개인주의가 도를 넘은 사건 사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였습니다. 동시에 이런 우울한 시한폭탄 같은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한 대단히 아쉽고 아픈 형국입니다. 해서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지를 모르는 희망 자체가 보이지 않는 시계 제로의 영적 기상도입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지옥편, 세계문학전집 150, 민음사,2007,p,26.) 사정이 이렇다보니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의 지옥 편 3곡에서 선포했던 위의 명제가 다시금 소름끼치게 수면 위로 부상하고 새겨지는 한 해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교회만이 단테가 말하는 그 희망을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조각해 나아가는 유일한 공동체임을 저는 고집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설교를 통해서 교우들에게 언급한 대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게 무너져 내린 가톨릭교회를 바라보고 안타까워하시던 주님께서 이렇게 당부했다지요. “프란체스코야, 내 집 좀 고쳐다오. 너도 보다시피 다 망가졌단다.” 이 말을 들은 프란체스코가 십자가의 눈물과 한숨 사이사이에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에 입 맞추며 불렀던 노래가 이렇게 전해진다고 합니다. “나의 교회야/ 나의 교회야/ 네가 아무리 못 생겼어도/ 너는 언제나 내 교회지.” (손석춘, 김기석 공저, “기자와 목사, 두 바보의 이야기”, 꽃자리,2012년,p,342) 나는 세인 교회가 지금까지 걸어온 지난 11년의 시간 동안, ‘너는 언제나 내 교회지!’라는 主尊感을 지켜내기 위해 달려왔다고 술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주존감이라는 단어의 테마를 2019년에 표어로 내 걸만큼 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목회철학이자 목회신학적인 바탕이었기도 했습니다. 이 표제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표어임에도 불구하고 이 좁은 길로 보폭을 딛고 한 해를 달려와 준 세인 지체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2020년이 밝았습니다. 기실, 한 해 한 날의 시작은 그냥 여느 날처럼 또 다른 한 날의 시작인데도 사람들이 그 날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겠지요. 날의 의미는 그렇다고 치부해도 저는 개인적으로 그 날을 구성하고 있는 시간의 의미만큼은 결코 가볍게 여기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철학적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간의 선용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시절, 감리교 신학대학교 선한용 교수가 특별강사로 초빙되어 강의한 어거스틴 신학을 수강하다가 평생 살면서 이렇게 적확한 시간에 대한 정의를 접해 보지 못했던 탓에 선생님의 시간에 대한 일갈을 마음에 담았던 기억이 분명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시간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시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객관적인 질서이며, 마음의 팽창이다.”(선한용, “시간과 영원-성 어거스틴에 있어서”, 성광문화사, 1986,p,82.) 이 정의를 너무 신봉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후 목회의 여정 중에 시간을 선용하지 않거나, 무질서하게 사용하는 것을 질 나쁜 죄악으로 보았고, 특히 목사가 시간을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여기는 것을 타락이라고까지 해석했습니다. 주어진 날, 주어진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객관적인 질서이기에 나는 내 마음 속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팽창의 여백으로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고 다지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 살아냄은 지난 2019년도 매일반이었고, 2020년 역시 당연히 동일합니다. 해서 2020년의 시분초(時分秒)를 역시 가장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 또 다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2020년 세인의 키워드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주님의 선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영적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영적 집중력은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 그리고 상식이 통하는 삶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인 교회가 2020년 붙들어야 하는 바른 신학을 기초로 한 교회론은 무엇일까? 동시에 바른 신앙을 견지하여 상식이 통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원칙을 가지려면 어떤 신학적 교회론으로 무장해야 할 것인가? “성령께서 기름 부으신 지성이 있는 교회”입니다. 제 4복음서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들려주셨던 아주 의미 있는 영적 교훈을 담지(擔持)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한복음 16:13) 사도 요한을 통하여 분명히 강조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곧잘 성령이 인도하시는 사역이나, 역사했던 일들을 상기할 때 대단히 감정적이고, 신비적이고, 열정적인 그림들을 그려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기름 부으심은 철저하게 전인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광신적인 분위기와 맹신적인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이유를 사도요한에게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성령이시며, 동시에 너무나도 당연히 그 인격의 영이시기에 우리를 견인하시는 영역이 바로 ‘진리 가운데’라는 곳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진리’(알레데이아스)는 ‘기독교의 본질 혹은 사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이끄시는 방법도 인격적이지만, 동시에 궁극적인 견인의 장소가 ‘진리 가운데’이기에 성도가 집중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2020년 우리 세인 교회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진리에 머물기 위해 영적 집중력을 곧추 세울 것입니다. 양보하거나 후퇴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이것을 이루어 나아가는 것을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지성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지성이라 함은 세속적 관점에서 볼 때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엄청난 공부를 하고, 그래서 남들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는 지적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갖추고,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지성은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반드시 이루어가야 하는 지성은 전인격적으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가운데 머물게 하는 영성적 지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성령 하나님이 견인하시고자 하는 이끄심에 집중해야 하며, 성령의 조명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재 강조하지만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교회입니다. 목사는 교회 강단에서, 성도는 삶의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삶을 상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는 방법입니다. 세인 교회는 이 표어에 접근하기 위해 2020년 세 가지의 메시지와 관련된 사역에 집중할 것입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선포 2) 사도행전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역동 3) 캐리그마 신학(십자가 신학)의 사수 이 세 가지의 신학적 명제는 따로 분리되어 있는 테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긴밀하게 상관성을 갖고 있는 띠입니다. 그러므로 객체적인 내용으로 접근하면 실패하지만 유기적으로 서로 상관관계를 유지하면 아름다운 바른 교회와 바른 성도를 만들어 내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도구가 될 것입니다. 신학자 루돌프 오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완전한 타자(Das ganz Andere)다. 그러나 동시에 완전한 자기(Das ganz Selbe)이다. 확실히 그는 나타나고 압도하는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나’와 ‘나’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있는 지명한 것의 비밀이기도 하다.” (마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 2017,p,115.) 저는 부버가 재인용한 오토의 이 말에 전율하는 감동을 받곤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이 이해했을 때 하나님일 수 없다는 혹자의 말대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엄연한 명제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은혜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모본이시고, 그림자이십니다. 동시에 그 분에게 우리가 가는 통로가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성경은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과의 동행은 기름 부으심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일하심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이 인격의 영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 안에서의 삶, 그 분이 역사하시는 사도행전 29장의 역동에서, 그리고 그 분이 마음껏 일하시는 캐리그마의 시공간적인 내용 안에서 가능한 것임을 믿기에 완전한 타자이시지만, 완전한 자기이자 두려운 신비이신 하나님께 집중하는 세인의 2020년을 꿈꿀 것입니다. 작년 지난 학기, 대학원 마지막 종강 수업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하며 수업을 마감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많이 아픕니다. 그 아픔을 치료하는 도구로 여러분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 도구로 잘 사용되는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사역자 이전에 예수를 잘 믿는 신앙인들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우리세인 교회 지체들에게 같은 맥락으로 전합니다. “한국교회가 많이 아픕니다. 그 아픔을 치료하는 도구로 우리 세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도구로 잘 사용되는 신실한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교회의 장로, 권사, 안수집사, 집사 이전에 예수를 잘 믿는 신앙인들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정회원 여러분! 주존심을 갖고 지난 2019년의 달려옴은 은혜였습니다. 이제 2020년이 시작되어 또 한 해를 출발하는 신년감사주일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재독학자 한병철은 방향을 잘 못 잡고 있는 현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비수를 날렸습니다. “조급성의 시대는 산만의 시대다.”(한병철, “시간의 향기”,문학과 지성사,2013,p,106.) 우리 세인교회는 2020년 조급함을 갖고 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주어진 시분초를 ‘엑사고라조’(아끼며)하며 걸을 것입니다. 이렇게 걷는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기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 기름부음을 받은 우리는 바른 신학과 신앙 그리고 상식이 통하는 지성적인 거보들을 내딛을 것입니다. 이 희망을 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제 한국독립교회 연합회 제천 세인교회 제 12회 사무총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2020년 1월 5일 제천세인교회 담임목사 이강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