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존재와 부재(不在)의 이분법이 아니라, 올바른 존재(righteous being)와 그릇된 존재(unrighteous being)의 이분법이다. 긴장은 실존과 본질 사이가 아니라 실존과 실천 사이에 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 연구소,p,62.) 몇 번을 곱씹어도 엄청난 통찰이다. 섬기는 교회를 함께 행복한 교회로 만들어 나갔던 지체 한 분이 요양원에 입소하셨다. 뇌경색으로 인한 파킨슨의 시작, 노령화로 인한 시력과 청력의 상실 등등으로 인해 가족들이 더 이상 케어 할 수 없다는 의견 일치로 결정된 일이었다. 알츠하이머로 인한 노인성 질환이 아닌 채, 요양원에 입소한 경우를 별로 보지 못한 나로서는 매우 안타까워 지체 심방을 다녀왔다. 혹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옛날에는 탄광촌에 들어온 인생을 막장 인생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요양원이 막장이다.”라고. 매우 설득력이 있게 들리는 세간의 말이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누가 사람이냐?’라는 그의 걸작에서 이 질문 속에 들어 있는 진짜 질문은 ‘어떻게 사는 사람이냐?’가 담겨 있다고 역설했다.(p,63) 사람답게 사는 것의 척도는 어떻게 사느냐? 에 달려 있다는 지성적 선배의 말이 너무나도 깊게 울린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헤셀의 말대로 올바른 존재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내가 사람으로서 내 실존의 선명한 확인은 올바르게 살아내는 ‘나’ 일 때 발견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금에 설교를 매우 많이 줄였다. 예전에 비하면 너무 많이 의도적으로 줄였다.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설교한 만큼 살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전쟁이라서. 부득이하게 요양원에 입소한 지체를 위로하고 심방하고 돌아오면서 아주 이기적인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소천 할 수 있는 복을 주옵소서!” 마음이 우울한 데 그것을 아는 듯 섬기는 교회에 아름다운 집사님에게서 카톡으로 문자 하나가 들어왔다. “날씨가 많이 추워요, 목사님. 목사님 사모님이 안 아프셨으면 좋겠어요. 목사님, 사모님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기도드릴게요.” 이 지체가 왜 이런 기도를 드리는지를 아는 나는 눈물이 핑 돈다. 따뜻한 지체의 이 한 마디가 매서운 제천 한파를 녹인다. 춥지만 따뜻한 오후다. 움직여야 겠다. 또 다른 심방이 기다려서. 새신자가 힘을 얻는 심방이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