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在野)의 고수, 숨은 고수’와 나누는 목양 담론 진한 감동이 느껴지는 영화일수록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이 다 올라갈 때까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한다. <시골목사의 목양심서>가 내겐 그랬다. 단번에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쉽게 책을 덮지는 못했다. 정글 같은 목회현장에서 치열하게 사역했던 저자의 감정들, 희로애락의 편린들이 하나씩 날아와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누군가에게 보탬은 되지 못할지언정 폐는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 때문이었을까? 책에서 눈을 뗀 후 한참이나 애먼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며칠 전 ‘추천사’를 써 달라며 원고를 보내온 친구의 청을 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내가 목회자로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고(故) 은보(恩步) 옥한흠 목사다. 은보는 설교를 ‘십자가’로 규정했다. 설교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은보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관점이다. 여기서 은보가 말하는 십자가란 ‘힘들고, 무겁고, 벗어버리고 싶은 것, 설교자에게 고통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은보는 설교자로써 합당한 인격과 지성, 영성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매주 설교 준비를 위해 30시간 이상씩 진액을 쏟으며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야말로 목회여정 내내 치열하고도 지난한 시간들을 보냈던 것이다. 은보 이후 나는 또 한 사람의 치열한 목회자, 설교자를 만났다. 바로 이 책의 저자다. 저자는 매주 세 편의 설교를 위해 A4용지 20매의 원고를 작성하고, 신문사에 기고를 하며, 두 권 이상의 책을 읽은 후 서평까지 쓴다. 심지어 사우나에 가서 반신욕을 하면서도 무려 150 페이지 이상의 책을 읽는 목회자다. 이쯤 되면 반신욕을 하면서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책을 읽기 위해 반신욕을 하는 것은 아닐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는 한 해에 78권의 책을 읽고도 목표했던 100권을 채우지 못해 부끄럽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치열함은 그로 하여금 스펙트럼이 넓은 목회자가 되게 했다. 진보와 보수는 물론이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까지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목회자인 것이다. 그 치열함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열매는 단연코 그의 설교다. 천박한 설교, 당장 쓰레기통에 집어던져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설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강단을 오염시키는 현실 속에서 그가 매주 깊이 있는 설교, 결이 다른 설교를 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그 치열함 때문이리라. 나는 테니스를 좋아한다. 또한 테니스 선수 가운데 ‘클레이코트의 황제, 흙신’ 등의 별명을 가진 ‘라파엘 나달’(라파)의 광팬이다. 라파가 로저 페더러, 노박 조코비치 등과 함께 테니스계의 빅3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의 성실함과 겸손함 때문이다. 지난 6월 9일, 프랑스오픈 테니스대회에서 12번째 우승을 차지한 후 라파에게 기자가 물었다. “지난 1월에 노박 조코비치가 호주오픈을 우승함으로써 15번의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들어 올렸는데, 페더러의 20번 우승 기록을 넘어서고 싶다고 말했다. 당신은 이번 프랑스오픈 우승으로 그랜드슬램에서 18번 우승했다. 그랜드슬램 우승측면에서 당신은 놀랍게도 페더러와 단 2개 차이로 좁혀졌다. 앞으로 어떤 목표가 있는가?” 라파가 대답했다. “우리 셋은 서로에 대해 큰 격려와 자극이 된다. 그렇다고 페더러의 그랜드슬램 기록에 내가 도전을 하고 넘어서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웃집에 더 좋은 TV가 있고, 더 넓고 화려한 정원이 있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욕심을 내거나 하는 것은 내 삶의 방식이 아니다.” 기자의 예상을 빗나간 라파의 대답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30세가 훌쩍 넘은 나이, 부상으로 인한 숱한 위기를 극복하고 여전히 라파가 빅3로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경쟁 상대를 존중하고 높여주며,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자기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니스만 잘 친다고 고수가 되는 게 아니듯이 목회만 잘 한다고(?)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저자를 일컬어 ‘재야(在野)의 고수, 숨은 고수’라 부른다. 그 말은 진심이다. 그가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쓰고, 목회를 잘하고, 설교를 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삶과 목회에 겸손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섬기는 하늘평안교회에 저자를 설교자로 초청한 적이 있다. 그 때 저자가 아들과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서울신학대학교 신대원에서 ‘설교의 이론과 실제’라는 과목을 통해 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저자의 아들이, “아버지, 오생락 목사님이 동기시죠? 친구니까 좀 배우세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조금은 시기심이 생겼지만 오히려 너무 감사했다는 저자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겸손함과 당당함을 겸비한 진정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에도, 섬기는 세인교회가 혹시라도 세속화의 물결에 함몰될까봐 염려할 정도로, 건강한 고민을 안고 사는 목회자다. 시대와 역사를 보는 안목 또한 탁월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도들과 함께 울고 웃는 가슴 따뜻한 목회자다. 故 서정수 집사의 글이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에게 따뜻한 가슴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또한 저자는 음악과 문학, 커피를 아는 감성이 풍부한 목회자이며,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목회자이기도 하다. 나는 목사 같은(?) 목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싫어한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왠지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냄새나는 저자가 나는 좋다. 신학교 동기인 저자는 나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지음’(知音)이다. 지음이 곁에 있어서 기쁘다. 그 지음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지음의 세 번째 책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수 있어서 영광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견지망월(見指望月)의 우를 범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이 책을 먼저,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갖추기 원하는 목회자와 설교자들에게 권한다. 아직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목회의 여정을 준비하는 신학생들에게도 권한다. 특히 신학과 목회,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원하는 신학생이라면 지체하거나 미루지 말기를 바란다. 또한 목회자의 삶을 이해하고, 목회자와 더불어 섬기는 교회를 보다 더 건강하게 세우기를 원하는 평신도들, 책 읽기와 글쓰기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권한다. 마지막으로 가족이나 친구, 동역자 가운데 환우가 있는 분들이라면 故 서정수 집사의 글을 꼭 읽기를 추천한다. “당시의 나는 그 분들의 아픔을 백분의 일도 공감하지 못했었고, 지금의 나는 그 아픔을 온몸과 마음으로 감당하고 있다. 어떤 위로의 행위도 공감이 전제되지 않으면, 참된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이렇게 알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들을 접하노라면, 우리가 그동안 주변의 환우들에게 얼마나 값싼 동정을 했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 절대로 나 같은 목회자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인 내가 본받을 수 있는 성령이 기름 부은 지성적 목회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애끊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저자의 기도를 읽는 순간 겟세마네의 주님이 떠오른 이유를 모르겠다. “친구여, 자네는 아들이 가장 많이 닮고 본받아야 할 참된 목회자의 표상이라네. 그리고 자네 아들은 벌써 자네를 아주 많이 닮아 있다네. 물론, 언젠가 자네를 뛰어넘고야 말겠지만….” 동병상련(?) 때문이었을까?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을 결국 쏟아내고야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