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이성이란 ‘실천’을 통해 발달하고 변형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유 양식은 세계와 타자에 대해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를 나타낸다. 그러나 ‘실천’이 사상으로 살아남기 위서는 사고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한길사,p,375,2016.) 벨기에 출신의 철학자 레비-스트로스의 이 말을 몇 년 전 쓸어 담았다. 이유는 목사로 살면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영적 사고에 길들여지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려고 하는 반면, ‘이성적 사고’에 대해서는 야박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의 이 말이 천둥과 벼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성이 실천을 통해 발달된다는 통찰을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였나! 목양도, 신학도 프락시스의 제 문제에 대하여 소홀하면 요란한 수레와 다를 바 없다고 채찍하며 나를 몰아 세웠던 것이 하 세월이었다. 정확하게 레비-스트로스의 이 천둥소리를 만난 지가 4년 전인데, 그때부터 나름 목사로 살면서 더 민감하게 내 이성으로 살폈던 여백은 ‘사고하기’(TO THINK)였다. 해서 더 치열하게 공부하려 했고, 더 치열하게 책과 씨름했으며, 더 치열한 글쓰기에 천착했던 것 같다. 이렇게 4년이 지난 지금, 우물에서 아주 조금의 물을 건져 올린 듯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래서 감사했다. 헌데 목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버겁고 힘든지, 그렇게 노력하며 산 나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강덕아. 그렇게 사고하며 산 너는 지난 4년 동안 ‘세계와 타자’에게 어떤 관계로 진보했니?” 이성의 진보를 위해 사유하고, 사고하려는 나는 다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왜? 레비-스트로스가 폭탄처럼 던진 말, ‘실천’이 사상으로 살아남기 위해 ‘사고’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갈파를 나는 ‘사고’가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이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로도 동시에 받은 이 시대의 목사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19가 나에게 거침없이 타격한 일격은 바로 이 질문이다. 성도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은 새벽, 기도를 마치고 서재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늦겨울의 사위(四圍))가 고요하다 못해 아프도록 적막하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나에게 질문한 이 질문이 더 버겁게 다가온다. 대답해야 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