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뛰는 교우들. 우리 제천의 한 겨울 내 평균 온도가 영하 20도를 내려는 것은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하 20도 미만의 날씨가 되면 도리어 포근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저만의 느낌이 아니라 제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동의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봄의 한 복판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천의 새벽은 아직 겨울입니다. 전도사님의 육체적인 나약함 때문에 새벽예배 운행을 직접 다시 시작한 지 벌써 2개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추웠던 겨울 한 복판의 새벽을 직접 뛰면서 마음에 다잡이를 한 것이 있습니다. 새벽에 나오는 교우들보다 5분만 먼저 약속된 장소에 도착해 있자고. 칼을 엔다는 표현만으로 부족한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새벽을 깨우는 교우들이 적어도 노상에서 추위에 기다리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이 앞서 항상 5분 전에는 교우들보다 먼저 약속된 장소에서 기다리게 되다보니 교우들에게 또 다른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담임목사가 먼저 차를 대기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부담이 되어 평상시 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생긴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어쩌다 조금 늦게 일어나게 되면 뛰는 것이 습관이 된 것입니다.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다보면 교우들이 뛰어오는 것을 다반사로 봅니다. 뛰는 성도들이 차를 타자마자 한 마디씩 던집니다. “목사님, 오늘은 더 일찍 오셨어요. 전도사님은 언제 다시 운행을 재개해요? 부담되어 죽겠어요.” 등등 그런데도 그들의 얼굴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종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교우 중 한 명 이런 독백을 한 것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목사님과 동역하며 예수 잘 믿으려면 뛰어 다녀야 돼요. 걸어 다녀서는 어림도 없어요.” 이해가 되는 고백입니다. 부정적인 차원에서의 분주함이 아니라 적어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삶 자체가 역동적이어야 하기에 뛰어야 한다는 것은 저 또한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나태함에서 허덕이지 않기 위해서는 나름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양아들에게 주는 목회 서신에서 유언을 남기면서 이렇게 말 한 것이 아닐까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선한 싸움을 위해 새벽을 달리고 있는 우리 새벽지기들을 보면서 바울의 이 고백이 오버랩 되는 것은 너무 비약일까요? 아주 종종 동기부여를 위해 새벽을 뛰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새벽예배는 살아 있는 순교이다.” 우리 교회는 재적 신자 비율 새벽예배 출석 비율이 높은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새벽에 뛰는 교우들을 보면 자랑스럽습니다. 오전 4시부터 불을 밝히고 있는 서부동 1003번지가 제천 열방을 향한 부흥의 진원지가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뛰면 건강에도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