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사기 12:8-15 제목: 하나님께 해석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사사 입다의 끔찍했던 시대를 지나 그가 죽고 난 뒤에 이어지는 세 명의 소 사사에 대한 내레이션이 기록된 텍스트입니다. 8-9절에 소개되고 있는 입산 사사의 이력은 아들 삼십 명, 딸 삼십 명을 두었는데 딸들은 밖으로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해서 밖에 있는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고 그렇게 사사로 7년이라고 세월을 보냈다고 신명기 사가는 보고합니다. 11-12절에는 엘론의 이력은 스블론 출신이었고, 그는 10년 동안 사사의 직을 감당하다가 죽어 아얄론에서 장사되어 묻혔다고 보고합니다. 세 번째 등장하는 압돈은 본문 13-5절의 보고에 의하면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탈 정도로 부유한 삶을 살았고, 압돈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8년 동안 있다가 비라돈에 장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명의 사사들의 이력을 이렇게 현대적인 언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산은 입다가 죽은 후, 혼란스러웠던 이스라엘을 위해 아들딸을 정략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혼인을 시켜 정국을 안정을 도모했다.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엘론이 사사의 직을 이어받았는데 1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다가 죽었다. 그가 죽자 압돈이 직을 이었는데 그는 아들, 손자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다가 역시 죽었다.” 독자들이여! 듣고 나니 어떠셨습니까? 소 사사들의 일기를 듣고 나니 감동이 느껴졌습니까? 아니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느낌이 드셨습니까? 정상적인 신앙의 노정에 계신 독자들이라면 마땅히 후자이어야 합니다. 입다의 뒤를 이어 사사의 직을 감당한 세 명의 보고를 접한 뒤에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왜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까? ‘입산’이라는 이름의 뜻은 ‘날렵한 자’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입산은 이름대로 정치적인 날렵함을 발휘해 정략적인 정치를 펴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엘론’ 은 ‘참나무, 상수리나무’라는 뜻입니다. 그의 치세에 전쟁이 없었으니 그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을 단단한 참나무 같은 치세로 만들었다고 자평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압돈’은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의 자녀, 손들을 섬기는 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주 가정적인 아버지, 할아버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는? 왜 지면을 통해서 이렇게 세 명 사사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의 행위를 이렇게나마 소개했을까요?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이것 말고는 세 명에 대하여 할 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한 설명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교훈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지금 당신의 삶은 하나님에게 해석되고 있는 삶입니까? 사도행전 11:26절을 읽겠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저는 항상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하나는 ‘Person in Jesus Christ.’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Person who has a relationship with Jesus Christ.’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본문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라면 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든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소개한 세 명의 소 사사들을 추적한 결과, 도대체 이들이 하나님과 어떤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단 1%도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필자는 31년이라는 세월을 목회 현장에서 살아왔습니다. 영적 정글 말입니다. 이 정글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보내면서 날마다 나에게 되물으며 또 곱씹었던 것이 있습니다. “오늘 나는 목사로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해석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20세기 중국이 낳은 걸출한 법리학자이면서 신실한 가톨릭 학자인 우징숑 박사는 자신이 하나님을 찾은 뒤에 이렇게 본인의 삶을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와 숨바꼭질을 하신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찾지 못하신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잘못 때문이었다.”(우징숑,“동서의 피안”,가톨릭출판사,2012,p,21.) 엄청난 자기 해석이자 성찰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만난 자의 겸손한 자기해석이 필자를 전율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본! 창세기 5:27절의 므두셀라처럼 “969년 동안 무지하게 오래 살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닌 사도행전 13:36 전반절에 기록된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라고 기록된 다윗처럼 의미 있게 해석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