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동기 중에 목사직을 스스로 반납하고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친구가 있다. 나하고는 읽은 책들을 함께 나누고 삶을 성찰하는 삶으로 사제의 길을 가는 친구다.
목사직을 그가 내 놓았을 때 아팠다. 말리고 싶었지만 그의 삶이니까 난 친구를 존중한다.
어제 친구가 올린 페북 글이 이렇다.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 허버트 스펜서
세상살이가 그러하다.
글을 읽다가 나의 생각의 단편 조각을 친구에게 이렇게 남겼다.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지론에 대해 부분 인정한다. 그런데 도그마의 해석이 아닌 '지금 여기서'라는 존재성에 대한 확인이 주군을 볼 때 전율로 연결되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닌 주 예수께 함몰되어 있다. 난 아직도 이 부분에 있어서 여전히 배고프다. 친구야.”
내가 단 글에 기분이 나빴는지, 그의 페친 몇 몇이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다만 비정상적인 구도로 기독교를 먹칠하는 일련의 일들을 놓고 싸잡아 매도하는 일련의 글들을 보다가 참담했고, 또 한편으로는 분노스러웠다. 나는 친구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의 삶을 응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갖고 있는 생각과는 다르다. 수차례 말하지만 다른 건 다른 거지 나쁜 게 아니지 않은가! 친구의 글에 달린 많은 댓글들을 보다가 이 글을 썼다. 또 다른 욕먹을 각오로.
작년에 읽었던 월터 브루그만 책에서 다음 글을 만났다.
“‘복음주의적’이라는 기치 아래 모이는 보수주의적인 학문의 신들을 추구하는 그것들은 확신할 수 있는 공식, 명제, 그리고 논리로 무장하고 있지만, 스스로 어떤 구원도 이루어낼 수 없다. 반면 이성 중심주의의 계몽주의에 순응하면서 그 누구와도 불편하게 지내기를 기피하는 진보주의적인 신들도 자신들의 아집에 특화되어 있다. 신(新)무신론자들, 학문적 환원주의자들, 그리고 진보주의자들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다. 그들은 우리와 관계하지 않거나, 또는 우리와 근거리에서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우상들을 지니고 있다.” (월터 브루그만, “시편적 인간”, 한국장로교출판사,pp,68-69.
진보주의적인 구약학자가 갈파한 이 글을 읽다가 메모했다. 이유는 편 가르지 않음의 지성적 예의를 갖추고 있는 그의 글에 감동되었기 때문이라고 할까 그렇다.
나는 친구를 잘 알기에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달린 댓글들을 보니까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다. 너도 알겠지만 목사로서 살아오면서 적어도 나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 쪽팔리는(?) 인생을 살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진정성이 있는 말을 해도 목사가 하는 말은 듣지 않으려는 세태이다 보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적어도 주군에 대한 올바른 믿음으로 달려가는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종교 삼아 부를 축적하는 쪽팔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나는 플레즈 파스칼의 말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 쪽에 내 삶을 걸었다. 만에 하나 극단적인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선택한 삶이 쓸데없는 짓이고. 헛짓이었다고 판명난다 하더라도 내 삶의 현장 안에서 분명한 신앙적 목표를 갖고 달려간 족적은 자랑스럽지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존재하심과 나와의 전인격적인 관계 맺고 계심을 한 올의 여지없이 동의하는 목사다.
친구의 글에 댓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무례함은 최고의 교만이지 않겠나 싶다.
일상의 현장에서 삶의 사제로 살아가는 친구가 건강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