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수, “욥이 말하다-고난과 신비와 신학 이야기”, 분도출판사, 2011년.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에 믿는다.”(p,32) “하느님이 사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역사는 지속되는 것이다.” (p,33) “고난은 새로운 진리를 요구한다. 쿠티에레즈의 말대로 저항은 기도의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고난은 새로운 진리의 여명을 뜨게 한다.” (p,37) “삶의 뜻은 말씀의 해석에서 나온다.” (p,120)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어떤 틀이 필요하지만, 그 틀이 굳어서 그 안에 갇히면 하느님의 뜻을 왜곡한다.” (p,121) “산다는 것 자체가 거룩함이다.”(p,152)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신뢰와 사랑의 문제이지 설명과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p,199) “하느님의 뜻은 다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을 그대로 안고 계속하는 믿음의 순례라는 과정을 걷을 때 다가온다.”(p,200) “하느님은 인간의 상대이면서 여전히 절대이시다.” (p,201) “하느님께 맞섰다는 것은 하느님께 등 돌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p,201) “관계의 언어로서 하느님의 말씀은 내용이 꽉 찬 언어다.” (p,205)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위해 계시다. 하느님은 사람의 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을 위해 계시다. 사람을 위해 계시기로 했다.(p,218) “하느님과의 대면은 무엇인가? 그것은 찬양과 경배다. 머리 숙임이다.” (p,231) “믿음은 지성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지성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믿음의 지성은 지성 이상이다. 믿음 이전의 지성은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 세계, 곧 이성의 세계에 갇혀 있는 셈이다. 그러나 믿음의 지성은 삶의 진리와 부딪쳐 논리를 넘어 고백의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다.”(p,246) “그러므로 지성은 중요하지만, 결국 믿음의 지성으로 가야 한다.”(p,247) “하느님도 사람이 하느님의 수단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p,270) 2018년 4월 11일 수요 예배부터 2020년 9월 2일, 어제 수요일까지 참 지난(至難)한 과정이었지만 91주 동안, 욥기 강해를 교우들과 함께 나누며 섬겼다. 가뜩이나 어려운 그래서 별로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 욥기 강해 설교를 더 어렵게 강해하는 목사의 설교를 들어준 세인 교우들은 성자다. 구약 성경 이해에 대하여 거의 문외한인 나이기에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서고에 꽂혀 있는 18권의 참고 도서는 저자들의 성향이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나에게는 적어도 큰 선생님들의 역할을 감당해 주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위기의 순간에 나를 버티게 해 준 글벗들이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책들이지만, 앞서 추출한 촌철살인을 준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양명수 교수의 “욥이 말하다-고난과 신비와 신학 이야기”,는 욥기 공부 중에 얻은 최대의 수확이었다. 이제 다음 주 92번째 강해를 끝으로 욥기 사역을 마친다. 모든 목회자들이 목회 기간 동안 정복하고 싶은 로망이 신약은 로마서, 구약은 욥기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제 현장에 나와 담임목회자로 사역한지가 꼭 30년째다. 혹자가 말한 로망 중에 하나인 욥기 강해를 마치고 나니 숙제 하나를 마친 감회가 스며든다. 내가 정신의 스승으로 따라가는 유대인 철학자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 이렇게 말했다. “사유는 곧 삶이다. 그 어떤 사상도 두뇌의 동떨어진 세포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그 어떤 사상도 섬(島)이 아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연구소, 이현주역, 2008년,p,105) 명쾌한 통찰이다. 욥기 여행을 하면서 사유하게 된 것도 기쁨 중 하나다. 양명수 교수에게 사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너무 행복한 여행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욥이 말하다’는 제게 참 멋진 선생님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