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세상에게 살려달라는 교회2024-02-26 14:55
작성자 Level 10

4월 9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8번째 강해)

 

제목세상에게 살려달라는 교회

본문고린도전서 6:1-8

 

서론)

김기석 목사의 최신작인 끙끙 앓는 하나님에 담긴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뇌 과학의 빠른 발전은 미구에 우리 마음에서 벌어지는 뇌 영상을 통해 읽을 수 있게 할지 모른다예를 들어 부부가 이혼 법정에서 말다툼을 한다판사는 아내의 뇌 영상을 살피고는 이내 판결한다뇌기능 자기공명영상(MRI)을 보니 앞쪽 대상피질미상핵피각 등의 활동이 증가하지 않아 아내의 사랑이 식었음이 입증되었음으로 이혼을 허락합니다.” (끙끙 앓는 하나님, p,72)

듣고 나니까 기분이 어떠십니까?

얼마나 과학적입니까?

얼마나 합리적이고 완벽한 판결입니까?

이의를 제기하기가 어려운 증거를 제시한 명 판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진짜로 이런 판결이 앞으로 이루어지는 시기가 온다면 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결이기는 하지만 왠지 너무 슬프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혼의 확정 판결을 기계에 의존한다는 것이.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무 쉬운 답인가요?

기계가 넘볼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도서출판 말글터의 대표인 작가 이기주가 쓴 언어의 온도’ 라는 참 따뜻한 글을 읽다가 감동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언젠가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맞은 편 좌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손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꼬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할머니 손에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병원에 다녀오는 듯했다할머니가 손자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직 열이 있네저녁 먹고 약 먹자.”

손자는 커다란 눈을 끔뻑 거리며 대꾸했다.

그럴게요그런데 할머니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순간난 할머니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의 유형을 몇 가지 예상해 보았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단다.’ 혹은 할머니는 다 알지’ 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생각했다아니었다내 어설픈 예상은 빗나갔다할머니는 손자의 헝클어진 머리를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그게 말이지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더 아픈 사람이란다.

이 글을 소개한 작가는 이렇게 부연하며 글을 맺었습니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과학주의의 절정을 우리는 작금에 보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니 앞으로 과학주의의 발전이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선다고 하더라도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이유는 더 아픈 경험을 경험한 경험이라는 이 감성을 알파고는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으로 가져야 하는 자존감만큼은 기계나과학이나 여타 다른 세속적 가치와 사상에 눌리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와 똑같은 맥락으로 교회를 정의합니다.

교회는 교회입니다.

말장난이라고 성화를 내지 마십시오,

교회는 교회입니다.

?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18절은 교회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성경 내증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은 교회 말고는 없습니다.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우리들이 흔히 이미 고정화시킨 내용이 있습니다.

세인 교회를 음부의 권세 즉 사탄의 공격이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8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선언의 진의는 실은 하나님 사람들의 공동체인 비가시적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것은 분명히 주님께서 이렇게 선포하셨건만 교회 공동체가 음부의 권세에게 우리들의 치부가 여기 있으니 우리들을 무너뜨려달라고 애원하는 기가 막힌 아이러니들이 자행된다는 점입니다.

그 실례가 벌써 주후 1세기 고린도교회에 나타났습니다.

 

본론)

 

본문은 우리들이 지난 설교들을 통해 살펴보았던 고린도교회의 음행 사건들에서 조금은 숨고르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음행의 사건이 아닌 고소 사건으로 주제가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추론하건대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송의 이유는 딱히 이것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라는 당시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공부를 하겠지만 7장에 언급되어 있는 결혼에 관한 윤리적인 제문제(諸問題)들 즉 독신재혼에 관한 논쟁 등등을 비롯해서, 8장에서 보게 될 우상 제물에 관한 음식 규례에 대한 문제, 11-12장에서 공부하게 될 공적 예배에서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 그리고 우리들이 이미 5장에서 본 음행에 대한 확실한 정의 등등 고린도교회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논쟁의 거리를 만들 수 있는 것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주석가 바클레이는 고린도를 포함하고 있었던 헬라 지역의 정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천성적으로 그리고 특징적으로 소송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법정은 사실상 그들의 주요 오락거리였고여흥거리였다헬라의 도시들에서는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변호사들이었고법률의 소송 판결을 내리거나 그것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헬라인들은 사실상 고소하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당연히 헬라인 중에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교회 안에 소송하는 경향을 유입시켰다.” (데이빗 프라이어고린도전서 주석, pp, 142-143)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이 소송의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세상 밖에 있는 법정으로 소송하는 것에 대하여  죄책을 느끼거나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즐기는 분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기막힌 영적 상태인 고린도교회를 보면서 바울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충격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오늘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바울의 표현들이 다른 곳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거친 말들로 수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참 좋아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 구절에서 제 목회 30년을 이끌고 왔던 목회자로서의 자존감을 언제든지 찾게 해준 영적 촌철살인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고린도교회 지체들 중에 세상 법정에 고소한 자들을 향하여 격하게 비난하며 공격합니까?

제일 먼저 각인 할 점이 이것입니다.

바울은 세상 법정에 있는 판사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판사들을 불의한 자라고 정의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본문 4절에 주목해 주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이 구절을 현대인의 성경은 대단한 반전 포인트를 갖고 번역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고린도전서 6:4절을 읽어봅시다.

여러분에게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교회에서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워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은 세상 법정에 있는 판사들을 교회에서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사람들이라고 평가절하 하여 정의합니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 없는 아류들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돌직구를 날립니다.

저는 목사로서 바울이 이 선포가 요즈음 표현으로 마치 사이다 같은 감동의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다시 1-2절을 돌아갑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어떤 표현이 감동입니까?

성도(고린도교회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세상도 너희(고린도교회 성도)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어떻습니까?

전율하는 감동의 메시지 아닙니까?

이 두 구절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어 보십시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담임목사의 인사말 그대로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못났으면 우리들이 살려주어야 하는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친단 말인가우리는 세상이 살려 달라고 손 내밀게 하고 그 때 그들에게 살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교회란 말이다.”

바울은 이 기막힌 참담함을 보고 받고 이어지는 편지에서 이렇게 공격적인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5-8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세상 법정에 송사를 한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의 형제들을 향하여 맹폭을 가합니다.

내가 지금 편지에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너희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라고 고언합니다.

또한 얼마나 지혜가 없고 무식하면 형제의 일을 세상에게 고하여 고소하는 작태를 범하느냐고 직설합니다.

그러면서 결정타를 날립니다.

만에 하나 세상 법정에다가 교회의 일을 고해바치려거든 차라리 너희들 스스로가 아프더라도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것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빗대며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일련의 고린도교회 지체들의 작태를 고발하면서 쐐기를 박습니다.

세상에 교회의 일을 맡기는 것은 불의 그 자체이며형제를 속이는 행위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상에서 살펴본 고린도교회의 송사자들읗 향하여 바울이 직설적으로 행한 이 비난에 전적인 지지와 동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특별히 그의 언변 중에 이 대목에 통쾌한 대리만족과도 같은 은혜를 받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2절 전반절)

이제 우리는 고난주일 아침에 가슴에 쓸어 담아야 할 주님의 음성을 듣겠습니다.

 

● 교회는 세상에 구걸할 수밖에 없는 일체의 비참함을 중단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테제는 이해를 잘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가 오늘 주제로 삼은 교회가 세상에 구걸하는 비참함이라는 정의는 세상의 법정으로 교회의 분쟁 문제를 들이대는 행위로 국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제시한 내용들은 분명히 고린도교회의 분쟁거리들을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린도 법정의 세속적 판사들에게 넘긴 것을 비난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지적을 저는 그대로 적용하기에 앞서 한 가지를 대전제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송사의 상태를 만들지 말아야 함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고린도교회 밖으로 가지고 나간 것을 힐난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힐난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런 아쉬움을 담겨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송사거리를 왜 만들었느냐입니다.

왜 교회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느냐입니다.

교회 밖의 무리들에게 왜 살려달라고 손 내밀게 만들었느냐입니다.

근래 한국교회에서 세상의 생각과 충돌되기에 때만 되면 끄집어내는 뜨거운 감자가 동성애 문제입니다.

다수의 힘인 교회는 소수의 소외받는 자들에 대하여 더 이상 힘으로 그들을 강제하지 말라는 압박과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힘이 없어 공격을 당하는 보호받아야 할 소수 인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때마다 동성애에 대한 현직 목사로서의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보호하고 보듬어야 할 대상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동성애를 지지하는가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목사도성도도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성향사상철학신앙적 소신이 다르기 때문에 그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조명하시는 방향성을 포기하지 않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동성애의 예를 끄집어 낸 이유는 동성애에 대한 정죄함을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이 점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교회가 동성애에 대한 지지자들이 공격하는 표적의 대상이 되었는가라는 현실입니다.

교회가 동성애자들에게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되었습니까?

교회가 보수화된 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까?

교회가 수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주의적인 집단이기 때문입니까?

저는 생각이 전혀 다릅니다.

성경이 별로 곱게 인정하지 않는 동성애자들이 교회를 향하여 집중적인 포화를 날리는 것은 동성애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일체의 일들에 대한 반향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못한 작태들을 행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동성애자들을 향하여 정죄할 수 있느냐는 역설적 도전입니다.

교회 안에서 음행이 자행되고성적 폭력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데 무슨 자격으로 동성애자들을 정죄하느냐는 것입니다.

서울의 꽤 괜찮은 교회들이 불법으로 아니면 편법으로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이른바 세습 목회가 도마에 올라 맹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사유화할 수 있으며예언자들을 통하여 서슬이 시퍼렇게 예언된 공의와 정의를 떠난 세습을 감행하면서도 북한 김일성 일가에 대한 비난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은퇴한 유명 목사들의 설교 원고를 그것도 출판된 설교 원고를 서울의 모 교회 목사가 10연 년 동안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표절한 것이 발각되어 교회 교인들에 의해서 사임을 종용받자 그것을 취소하는 소송을 내서 구설수에 오른 일이 지금 한국교회의 또 다른 비난의 화살이 되고 있습니다.

표절 문제로 그것이 옳다그르다.’를 세상 법정에서 판결해 주기를 요청하는 참담함으로 교회가 그로기가 되어 있는 데 무슨 수로 더 큰 악으로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무슨 선한 영향력을 제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비참하게 살려달고 구걸하는 작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교회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 언급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심각한 위기 문제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십시다.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당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도들 대부분도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반면헬라적 그리스도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항상 주류와 비주류들의 묘한 긴장감으로 편하지 않은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는 경우에 따라 와해될 수 있는 유리 구조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구제의 사역에서 일이 터졌습니다.

사도행전 6:1절입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손이 안으로 굽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연()으로 묶여 있음은 어쩔 수 없는 인간사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의 소외는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될 수 있었던 위험인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위험인자 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2절을 이어 읽겠습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여기에 번역된 제쳐 놓고라는 구절을 NIV 성경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읽다가 흠칫했습니다.

“to neglect the ministry of the word of God”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을 게을리 했던 것

교회가 무력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세상에 손을 벌려야 하는 기막힌 참담함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이 훨씬 더 질 나쁜 영역이지만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에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교회를 난도질해도 교회는 당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지난주에 재일 학자인 강상중 교수의 신간 악의 시대를 건너가는 힘을 읽었습니다.

그가 책에서 언급한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책임이란 responsibility (response+ability) 즉 타자에게 응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타자가 요청하면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세상과 자기 안에 있는 그 모든 악과 타락을 대면하고서도 세상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p,139.)

담임목사는 이 글을 읽다가 묘한 소회를 느꼈습니다.

나는 교회가 세상에 구걸하는 비참함을 중단해야 한다고 오늘 교훈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에 구걸하는 비참함을 중단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소회 말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구걸하는 비참함을 벗는 일은 세상이 설득당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응답인 가장 교회다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입니다.

덧붙이지지 말고삭제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 여선 인권 운동가이자 진보적 성향의 작가인 레베카 솔빗은 어둠 속의 희망에 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희망이란 어떤 일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이 선한 일이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능력이다.”(p,27.)

전율하는 감동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을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그 십자가의 능력은 선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임을 또한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능력의 믿음으로 무장한 자는 세상에게 비굴하게 손 내밀지 않습니다.

세상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때 고통스러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비참함을 벗어나기 위해 말씀대로 살기에 천착하는 자들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에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치욕적인 삶이 아닌 세상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게 만드는 자존감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한 주간을 넉넉하게 살아내는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