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아버지와 같은 스승2024-02-26 15:23
작성자 Level 10

2017년 5월 14일 교사주일 설교

 

제목: 아버지 같은 스승
본문: 고린도전서 4:14-15

 

서론)

 

경로관광 여행 중에 제 차에 동승한 권사님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권사님 한 분이 저에게 아주 진지하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가 있죠? 근데 그 가이사랴가 어떤 뜻이지요?”
진지하게 질문을 하시기에 제가 알고 있는 선에서 잘 설명을 드렸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는 이스라엘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도시에요. 지금은 가보면 옛 도시의 흔적 터만 남아 있는데 특별히 이 도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게 유일하게 만년설 상태를 유지하는 헐몬 산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헐몬에서 눈이 녹아 흐르는 물 때문에 아주 비옥한 땅입니다. 원래 이 땅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이었던 헤롯 빌립이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이어 받은 지역이기에 그곳에서 분봉왕으로 통치를 했던 장소입니다. 헌데 야욕이 있었던 헤롯 빌립이 그 땅의 특성을 이용하여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뜻으로 계획도시를 건설해서 헌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가이사랴’(로마황제의 칭호였던 가이사의 파생어)라는 단어를 도시 앞에 붙이려면 당시 세 가지의 조건이 구비되어야 했습니다. ① 로마의 황제의 위용에 걸 맞는 도시의 크기가 확보되어야 했습니다. ② 그 도시의 광장에 반드시 로마황제를 위한 신전이 만들어졌어야 합니다. ③ 도시의 해발이 높아야 했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빌립보는 최적이었던 도시였습니다. 해발 345미터였으니까요. 이런 조건을 헤롯 빌립이 완성하여 로마의 황제에게 드린 도시였기에 자기 이름인 빌립이라는 이름 앞에 가이사를 붙여 그 때부터 이 도시를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습니다.”
나름 자세히 설명을 한 뒤에 권사님께 재차 물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 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가 궁금하셨지요?”
그러자 질문을 한 권사님이 황당한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기독교 방송국을 보는데 어떤 목사님이 나와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를 설명해 주었는데 조금 이상해서요. 그 목사님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아지를 사러 갔다가 발견한 도시라서 가이사랴라고 붙였다는 겁니다. 답이 아닌 것 같아서요.”
이야기를 듣고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권사님, 그건 아마도 그 목사님이 농담으로 하신 말이겠지요!”
제 말을 받은 권사님이 그래도 진지하게 다시 말했습니다.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셔서 헷갈렸습니다.”
저와 권사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권사님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차 안에 있는 우리 모두를 박장대소하게 하는 말을 이렇게 던졌습니다.
“아니, 권사님. 강아지를 사러 나갔다고 발견한 도시가 가이사랴 빌립보면, 말 사러 나갔다가 발견하면 마이사랴 빌립보겠네!”
한 바탕 웃고 이야기를 마감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설교의 소재로 삼아 교우들에게 설교를 시작하기에 앞서 드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웃자고 한 이야기 정도일까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질문하신 권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난 소회는 이렇습니다.
잘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기석 목사는 ‘끙끙 앓는 하나님’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죄는 무지함과 연결되어 있다. 배우지 못한 무지함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배우려 하지 않는 무지함이다.” (PP,185-186)
김 목사의 지적에 동의하지만 저는 이 상태에서 한 발 더 나아가려고 합니다.
“죄는 무지함과 연결되어 있다. 배우지 못한 무지함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배우려 하지 않는 무지함이다. 허나 이렇게 배우려하지 않는 무지함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잘못 배운 것을 고집하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지키는 교사주일입니다.
교회학교를 바라보는 각 개 교회 담임목사의 마음은 약간의 정도라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학교의 위기론입니다.
몇 달 전 발표된 한국 종교 분포도에 대한 국가 센서스 결과, 기독교가 대한민국 종교 점유율 1위라는 성적 보도에 고무되어 있는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단들까지 포함한 종교 분포도 조사라는 것을 간과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착시현상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벌어지는 우려스러운 현상은 주일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난 달, 아들에게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에 주일학교 교육전도사의 부탁을 받고 전화한 것입니다.
금년 여름에, 아웃리치를 섬 교회나, 농촌 교회나, 도시 미 자립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돕는 사역으로 하고 싶은데 갈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해서 저에게 갈 만한 교회를 알아봐 달라고 청탁(?)이 들어온 것입니다. 
섬 교회, 농촌 교회, 도시 미 자립 교회의 주일학교 이제는 상당수 교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굳이 위안을 삼자면 유년 인구의 급격한 감소라는 사회적 현상 때문에 교회학교도 그 피해를 당하는 것이라는 위안입니다.
그러나 바른 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으로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교의 기독교 교육학과 교수인 박상진 교수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지난 10년간의 조사 결과, 학령인구의 감소율이 32.4%인데 비해 교회학교 학생 수의 감소율이 34.2%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적 인구 감소율보다 교회학교 인구 감소율이 1,8%가 높다는 말입니다.(바른 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 세미나 제 19회 자료집, P,25)
말 그대로 최대의 위기이지 않습니까?
연세대학교 교목실에서 근무하는 교목과 국민일보 기자가 인터뷰를 했습니다.그 내용 중에 이런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주간, 채플 시간에 강사가 출애굽기를 본문 삼아 설교를 했습니다. 채플이 끝나자 채플이 졸업 조건이기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는 불신자 학생 한 명이 와서 교목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한 목사님이 뭘 굽는다고 한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움과 가르침이 사라진 영적 캄캄함이 엄몰한 자화상입니다.
문제는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시대는 이보다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본론)

 

본문에서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는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십시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5월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절기설교를 전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잠시 중단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주일 낮 설교를 통해 고린도전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도 이미 4장 사역을 통해 나눈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에서 다급한 마음과 답답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가 교회를 와해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 대하여 가슴을 치며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심정 깊은 곳에 담겨 있는 진정성이 있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바울이 대 전제하는 것이 눈에 띠게 보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쓴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자식에게 체벌을 가할 때 두 손 사용하여 때리는 부모는 친부모가 아니라 양부모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상처를 받게 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도리어 자녀들을 양육할 때 권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본문에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헬라어 단어 ‘누쎄테오’ 는 강하게 나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이 알아듣게 타이른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나무라는 이웃처럼 여러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자녀인 여러분에게 아버지의 자격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역할 중에 하나는 그래서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제를 갖고 바울이 권하고 있는 본문 메시지의 압권은 14절이라기 보다는 15절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왜 중요한가를 부연해 주는 내용을 보십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아버지는 스승이라는 개념을 뛰어 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우리들을 낳은 존재입니다.
우리들을 낳았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씨를 뿌린 정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낳았다는 말은 모든 것을 품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를 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위하여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희생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100주년 기념교회를 시무하는 이재철 목사의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를 보면 이런 문장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대들이 오늘날 그 자리에 있기까지 그대들의 부모들은 참으로 많은 시간과 물질을 쏟았다. 그대들의 필요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대 아버지는 몇 번의 양심을 접었을지 모른다.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마련하기 위해 그대의 어머니는 몇 번의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때의 의롭지 못했던 당신들의 행동 때문에 오늘날까지 남모르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할지 모른다.” (p,172)
왜 아버지가 아버지입니까?
당신을 품기 위해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희생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부인하는 자를 우리는 패륜아라고 부릅니다.
헌데 오늘 담임목사의 설교는 이런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권고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늘 교사주일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스승은 참 많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스승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승의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의 마음도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오늘 바울의 메시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스승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의 서두에서 피력한 교회학교 붕괴라는 참담한 시대를 맞이하여 대안적인 교사상을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 한 명의 영혼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 스승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제 21세기 교회의 교사상은 어떻게 하면 많은 어린이들과 학생들과 청년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교회학교를 부흥시킬 것인가에 머리를 쓰는 교사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가 교사로서 사명을 받았다면 나에게 맡겨진 그 단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 단 한 명의 영혼을 품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진정성입니다.
특히 교회학교에서는 그 영혼을 복음으로 품고 그를 복음의 사람으로 낳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5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미국의 존경 받는 교육학자인 파커 파머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가르침의 용기는 자아 세계의 가장 진실한 곳에서 우러나온다. 그 용기는 학생들이 그들의 삶속에 있는 진실을 발견하게 해줌과 동시에 탐구하고 소유하도록 만들어주는 진정한 용기이다.” (p,323)
파머의 이 갈파가 어찌 일반 교육계에서 종사하는 교사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도리어 교회학교에서 사역하는 교사들이야 말로 복음으로 아이들을 품고 생산해 내기 위해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품겠다는 영적 용기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제 2차 전도여행을 하던 바울은 빌립보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녀를 회심시킨 뒤에 그녀의 집을 포스트삼아 빌립보교회는 세웁니다.
이때가 주후 49년경으로 학자들은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고, 후에는 빌립보 감옥의 죄수들은 물론 간수장과 가족들까지 회심하게 하는 등 적지 않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렇게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하기에 이릅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빌립보서는 바울이 훗날 즉 주후 55-62년경에 어떤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쓴 옥중서신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고 있을 때의 시기는 어림잡아 그가 빌립보 교회를 세운 지 짧게는 6년 길게는 1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을 의미합니다.
이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면 바울의 영적 리더십은 이제 가물가물해질만한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은 바울 사도에 대한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상태라는 것도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1:14-18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지론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바울이 투옥 된 이후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바울을 시기하는 부류들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바울 때문에 어깨를 피지 못했던 그들이 바울의 투옥을 기뻐하면서 방법은 옳지 못하지만 예수를 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본 바울은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 자리, 위상 이런 것들은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도리어 감사한 일이기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울이 이 정도의 영적 성숙함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바울은 그의 마음에 아버지와 같은 스승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마음을 품은 바울은 그 유명한 선언을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8절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여기에 기록된 ‘심장’ 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예수께서 목자 없이 유리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토로하신 바로 그 단어 ‘스프랑크노이스’입니다.
내장이 끊어지는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이 아닌 이상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맡겨진 많은 학생의 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오늘도 교사는 보입니다.
혹 그 중에도 가물이 콩 나듯 스승도 보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교사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향후 9년 차 이후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교사를 양육해 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사 양육에 교회는 중단 없는 지원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일을 포기할 때 우리 세인 교회 역시 5년 뒤, 혹은 10년 뒤에 주일학교 없는 교회, 학생회와 청년회가 없는 비극적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경로여행 장소로 다녀온 묵호등대로 올라가는 길목을 동네 사람들이 아주 예쁘게 단장해 놓았음을 보았습니다.
동해안 절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동네라서 그런지 그 그림들과 시어들이 한편의 동화를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 중에 제 눈에 들어온 글귀가 있어서 한 컷했습니다. 

 

등대가,
어둠을 비추는 이유는
사랑을 잃고 길 위에 서성이는
눈 먼 이들의
희망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 교회가 다음 세대를 위한 등대 노릇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사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에서 맡겨준 귀한 아이들을 위한 등대지기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와 교사들이 바로 이 등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위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스승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지점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