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가정주일 설교 제목: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본문: 사무엘상 2:27-30 서론)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회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왜 부모의 신앙과 상관이 없이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부모들의 신앙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녀들이 신앙과는 상관이 없이 살까? 하는 의구심을 들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입니다. 히스기야의 가계도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남 왕국 유다의 13대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정치를 행했고, 백성들에게도 나름 인정받는 통치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등극한 므낫세와 그의 손자였던 아몬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신앙적인 유업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무시하던 최악의 왕들이었음을 역사가들은 보고합니다. 헌데 히스기야의 가계도에서 또 하나 기막힌 아이러니는 히스기야의 증손자였던 요시야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 증조할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아름다운 신앙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말로 내가 신앙의 흔적을 어떻게 남기는가에 따라 자녀들의 신앙도 결정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히스기야의 가계도를 면밀히 살피면 그런 것만 같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신앙 여정이 자녀들에게 영향력을 미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까? 이렇게 답변하겠습니다. 부모들의 신앙의 여정은 자녀들에게 분명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다만 예외가 있다고 답하는 것이 성경적일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은 철저히 개인적이기 때문입니다. 로고스서원을 이끄는 김기현 목사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이렇게 자기의 저서에서 고백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춘기 시절, 교회를 열심히 나갔습니다. 불교를 믿는 어머님께서 극렬히 반대했습니다. 어머니는 한 가정 안에 두 종교가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심하게 반대하는 어머니 때문에 어느 날, 나는 나의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부엌칼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칼을 들고 죽어도 교회를 나가겠다고 악다구니를 썼습니다.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어머니는 아들이 목사가 되었는데도 평생 교회를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칼을 든 아들이 믿는 기독교를 끝내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칼로 나의 이기주의와 가족주의를 자르지 않고 가족에 대한 의미와 사랑을 도려냈다는 것을.” 이 글을 후회와 만 가지 마음을 쓴 김 목사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편안 사람만 사랑하겠다는 나를 베라” (말씀 앞에 울다, pp,220-221, 담임목사 의역 포함) 글을 읽으면서 특히 신앙의 연계는 부모가 자식에게만 내리 꽂는 하향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에게 올려 꽂는 상향식의 연계도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이 영역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많은 경우, 자식들은 부모의 신앙적 태도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신앙의 태도를 보던 자식이 어느 날 전인격적으로 주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면 부모보다 훨씬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는가 하면, 반대로 부모의 이율배반적인 신앙의 행태를 보며 신앙의 자리와는 멀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영역인 것은 물론이지만, 내 자녀들의 시각과 인격 안에 나의 신앙의 온도가 스며든다는 것을 명심할 때 오늘 나의 신앙적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재삼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본론) 엘리는 사사 시대에 지방 성소를 책임지던 제사장이었습니다. 사사 시대라는 함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실로에 있는 성소를 책임지고 있었던 점을 전제할 때 그는 분명히 인지도가 있는 제사장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에브라임 지역에 있었던 라마다임소빔에 살고 있었던 엘가나의 가족들이 매년 실로로 올라가 제사를 드리는 형극이지 않았겠습니까? 참 괜찮은 평판을 지닌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서 기자에 따르면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그런 근거가 있습니까?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구절은 3:1절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기에 번역된 단어 ‘이상’은 영어성경에는 ‘비전’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하존’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이지만 저는 사무엘상 기록에 따라 해석할 때는 항상 ‘신탁’ (oracle) 이라고 해석합니다. 제일 어울리는 의미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사역하던 사사 말기 시대의 최고의 비극은 하나님의 신탁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로 인해 사무엘상 3:1절의 앞선 전반절에서도 묘사되고 있지만 하나님의 메시지가 희귀한 무감각의 시대였다는 점이 시대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 시대에 신탁과 말씀이 희귀했을까요? 사사 말년 시대라면 분명히 이런 시대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 말 그대로 랜덤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지도력이 없었기에 막 살던 시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의 눈으로 매섭게 분석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말 그대로 랜덤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엘리는 실로의 지방 성소를 맡고 있었던 인지도가 있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욕심인지 모르겠지만 도리어 역사의 기록자들이 이렇게 기록했어야 하는 것이 도리어 정상이었지 않았겠습니까?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충만하고 이상이 또렷이 보였더라.” 이게 정상이지 않겠습니까? 이게 제사장이 가지고 있어야 할 자존감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메시지는 드물었고, 신탁은 보이지 않는 것 말입니다. 아마도 사정이 이 지경이 된 이유는 사사시대라는 랜덤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엘리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다는 판단의 근거는 저의 개인적인 추측이나 감정적인 주관적 소회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성경이 저에게 그 판단의 객관적,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와서 하나님의 신탁(하존)을 내리는 장면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행하실 엘리 제사장 가계에 대한 심판의 신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이렇게 고변합니다. 나는 네 가문을 제사장으로 삼아 내 일을 위탁했는데 그 위탁의 일을 무시했다고 야단을 칩니다. 그리고는 결정적인 선언을 내립니다. 본문 29절을 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무슨 경고였습니까? 이 경고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려면 전술된 사무엘상의 기록을 만나 보아야 합니다. 엘리 아들들의 소위입니다. 사무엘상 2:12-17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엘리의 두 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들을 어떻게 착복하고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엘리 아들들의 못된 행실을 고발하는 결정적인 또 하나의 성경적 내증을 보십시다. 사무엘상 2:22-25절입니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오늘 설교를 조금 더 구체화하기 위하여 상세히 본문을 읽었는데 12-17절과 22-25절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엘리의 말을 듣지 않은 것,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착복한 것, 성소를 섬기는 여인들을 능욕한 것입니까? 물론 세부적으로 접근한다면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부적인 일의 가장 큰 핵은 엘리의 두 아들들이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의 말도 듣지 않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명을 30절 본문에서 이렇게 가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보이십니까? 하나님을 멸시한 죄가. 왜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멸시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들의 개인적 성향 때문이었습니까? 조금 전에 언급한 24-25절에 언급한 것처럼 엘리는 나름 아들들에 죄를 짓지 말하고 권면했는데도 두 아들이 듣지 않았기에 전적으로 아들들의 죄로 원인을 돌려야 합니까? 쉽게 지나치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가문에 들이닥친 심판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습니다. 엘리는 아들들이 전사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 의자 앉아 있다고 낙상하여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둘째 며느리는 아들 이가봇을 낳다가 산고 끝에 죽습니다. 졸지에 엘리의 가문은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가족으로 폐족하기에 이릅니다. 왜 이런 비극이 그 가족을 덮쳤습니까? 저는 이 질문의 답을 본문 29절에서 다시 팁으로 받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소중히 여겨’ 이 구절이 의미하는 진의가 무엇일까요? 아들들 때문에 하나님이 무시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 가정의 비극은 하나님을 멸시함(무시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교훈과 구절은 저에게 참으로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지난 주간에 아내가 친정을 다녀왔습니다. 월별로 혼자 사는 아들의 살림을 뒷바라지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침 장모님께서 아들네로 출타하신 차였기에 아내는 아들하고 둘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고즈넉한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헌데 아내가 아들을 만나고 와서 저에게 고민을 하나 털어 놓았습니다. 내용을 듣고 보니 아내가 염려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직전 교단 선배가 아들에게 세습을 완료했습니다. 세습을 완료한 선배는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고, 지금도 직전 교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제시하는 교단의 어른이고, 동시에 큰 교회의 목회자였기에 신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혈기왕성한 정력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일이기에 아마도 뜻이 있는 학생들이 피켓 시위를 시도하면서 세습을 한 선배는 사과를 하고 세습을 없던 일로 하라고 단체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교단 신학교 총장은 이런 단체 행동을 하면 학교에 장학금을 재단에서 축소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당장 학생들이 피해를 보니 시위를 접으라고 종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들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비정상이 잘못된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 나또한 연대하겠노라고. 그런데 아들도 고민하는 것은 아들의 아버지가 이강덕 목사라는 것이라고. 아내가 이 말을 듣고 너는 교단에 있는 전도사인데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상당히 민감한 일이고 후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일이니 자제할 것을 한사코 말렸는데 아들이 듣지 않아 할 수없이 네 아빠하고 상의하라고 두 손 들고 왔다고. 오늘 저녁에 아들이 제천에 내려오는 데 당신이 알아서 잘 설득하라고 공을 저에게 넘겼습니다. 아들을 만나면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고민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들의 나이에 불의함에 항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김기석 목사가 쓴 ‘흔들리며 걷는 길’을 보면 목회의 현장에 나와서 사역한 30년을 뒤돌아보면서 가장 아쉽고 유감스러운 일이 ‘불온함의 상실’이라고 지적한 것을 보며 나또한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아들이 그 불온함을 통해 비상식을 상식으로 만들겠다는 데에 조직에 있기에, 앞으로 당항 불이익 때문에 그 불온함을 잠재우고 순치의 길로 가라고 말해야 하는 에비의 모습을 보인다면 혹시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긴 죄는 아닐까? 때문에 오늘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대목에서 목사인 제가 더 깊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본문 29절에서 ‘나보다 네 아들을 더 소중히 여겨’라는 이 하나님의 경고가 단지 아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정도의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겸하여 경고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이렇게 뒤로 물러서지 않고 경고하셨습니다. 나보다 네 아들들을 더 소중히 여긴 것은 이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내 제물과 예물을 밟은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6:66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배경을 잠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 본 벳세다에 몰려왔던 군중들 중에 상당수가 가버나움으로 사역을 옮기신 주님을 따라와 계속해서 오병이어를 통해 보여주셨던 그 기적으로 떡을 공급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합니다. 보는 신앙의 폐해를 아신 주님이 떡을 달라는 그들을 향하여 쐐기를 박는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요한복음 6:3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이제 먹는 떡, 먹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다시 배고픈 떡에 목숨 걸지 말고 영원히 주리지 않는 떡인 나 예수를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육체적인 탐욕의 도구로 예수를 믿으려던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실망하여 그 자리를 다 떠났다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 떠난 무리들 중에는 제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기사를 통해 받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진짜 떡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가짜 떡을 요구하는 저들의 소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멸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주는 떡을 먹는 자는 결코 다시는 주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다시 주리는 떡을 달라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주님을 보란 듯이 멸시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오늘은 가정주일로 드리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주님에게 달라고 하는 떡이 주님이 아니라 가족주의입니까? 혹시 여러분이 더 주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내 가족의 안위입니까? 그렇다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선포합니다. 엘리의 신앙적 행태나 나의 신앙적 행태나 도찐개찐입니다. 포장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행위만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면서도 내 삶의 자유, 내 삶의 편리함, 방해 받고 싶지 않은 이기주의, 조금도 내 가족에게 피해가 오는 것을 참지 못하는 가족주의, 조금도 물질적인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더 사랑하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면전에서 무시하고 멸시하는 불신앙적인 오늘의 엘리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것들에게서 물러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김순자 권사 시모 상 발인예배까지 인도했습니다. 어제 입관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 장례를 인도하는 목사로서 쓴 소리를 했습니다. 많이 망설였지만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물론 들을 귀가 있는지 없는지의 판단은 제 몫은 아니기에 기분 좋게 넘어가면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가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손자, 손녀들까지 포함해서 발인예배에 모두가 참여하도록 명했습니다. 한 번이라도 복음의 메시지로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들과 딸이라는 상주만이 장례절차에 참여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계대는 단절되는 것입니다. 나는 가정주일을 맞이한 오늘 주일에 우리 세인 교회 가정들마다 믿음의 계대가 아름답게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 29절은 다시 묵상해도 가슴에 새길 만한 구절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