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주일 낮 예배 설교 (창립 8주년 기념주일 설교) 제목: 보란 듯이 역전하는 교회 본문: 예레미야 7:1-7 서론) 세인교회를 오늘까지 8년이라는 세월을 달려오게 하신 것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 하나의 교회가 탄생할 때는 주님의 핏 값으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교회로 서 있는 세인교회가 어찌 우연의 일치로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의도와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지난 8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립 8주년 기념주일 아침에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마음은 천근만근입니다. 지난 주간,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후보가 4차 텔레비전 대선 주자 토론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발언이었습니다. 이 일로 문재인 후보가 후폭풍을 맞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모임으로부터 사과하라는 압력과 입장 철회를 요구하는 후폭풍입니다. 저는 대선 유력 후보자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에 대하여 코멘트를 별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대통령에 입후보한 공인이기는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찬반의 입장은 우리나라가 민주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본인의 성향과 입장에 따라 표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재인 후보가 동성애를 반대한 이유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몰고 가는 신문들의 언론 브리핑과 여론몰이는 그 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유감스러움이 저에게 있습니다. 유감스러움의 내용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여론 1등 주자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는 보수적인 성향이 농후한 기독교의 표를 의식한 비겁한 처사라고 비판하는 몰아붙임입니다, 일련의 일들을 만나면서 현장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현직 목사로서 아주 안타깝고 극히 유감스럽습니다. 어떤 면입니까? 이미 보편적 세상의 판이 교회를 공히 싸잡아 문제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든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교회가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으려는 기막힌 참담함 등입니다. 저 또한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동성혼은 더 더욱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소수자들을 짓누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동성애자들이 만에 하나 우리 세인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수용합니다. 더불어 그들이 선천적인 성향임을 주장하면서 동성애를 포기하지 않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뭐 어쩔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들이 교회에서 동성애를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한다든지 혹은 그것이 죄가 아니라 보편적인 성향이라고 우기며 회개하기를 거절한다면 그것과는 싸울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자기들의 인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목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게 교회이고, 그게 목사이고, 그게 성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지켜야 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마저도 탈 근대화의 화두인 획일주의의 탕아로 취급하여 도리어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범죄 집단화시켜 무슨 일을 해도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려는 세상의 힘이 핍박을 받는 소수의 무리가 아니라 도리어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합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가 아프더라도 반전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우리 성도들은 결코 안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하여 단호함을 비치려 한 이유가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맹목적인 교회 우월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재론하지만 교회가 전술한 것처럼 무슨 일을 해도 믿지 않고 세상의 맹폭격을 당하게 된 것은 오히려 자업자득이라는 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목사로서의 정직한 양심고백입니다. 비상식을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시켜 잘못된 삶을 가르친 죄가 교회에 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만이 하는 목회자 세습을 버젓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교회 안에 맘몬이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아 있는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성적인 타락과 표절 문제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송사까지 목회자들의 일탈은 교회 추락의 원인을 제공한 원흉과도 같은 요소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이 땅에 존재하는 최후의 보루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한국교회는 사람이 주인이 된 신 바벨탑을 쌓은 하나님의 염려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아연실색의 처지에 놓여 있는 한국교회의 작금의 상태는 통곡하고 또 통곡해야 할 아픔입니다. 이것을 저는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아무리 그래도 동성애자들이 대선후보의 동성애 반대의 이유를 기독교인들의 눈치를 보는 작태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그들이 교회를 얼마나 무시하면, 교회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면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옳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자가 감히 교회의 뺨을 때린단 말인가에 한편으로는 경악하며 한편으로는 너무나 수치스럽습니다. 이번에 대선후보의 동성애 관련 기사에 따른 교회를 폄훼하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마치 아모스가 북쪽으로 건너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선포할 때 북쪽의 궁정예언자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네 고향인 남쪽으로 가서 말하라고 비아냥거리던 그 그림이 생각납니다. 마치 아합이 통하고 있었던 북쪽 이스라엘의 극악의 상태를 보고 올곧게 하나님의 말씀을 권력과 야합하지 않고 선포한 미가야의 뺨을 때리던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저만의 개인적 심정인가를 심각히 자탄하게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오기 섞인 심정으로 교회가 싸잡아 세속적 힘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는 것에 분노함을 피력했습니다. 교회가 살려야 할 대상에게 도리어 너희들이 살리는 것에 대하여 거부한다고 맹공하고 있는 세속의 가치에 무방비로 린치를 당하고 있는 상태에 대해 너무 쓴 아픔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격을 당하고 있음에 대하여 목회자의 자존감을 갖고 변호를 했지만 정적 중요한 것은 그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교회이기에 창립 8주년을 맞이한 오늘 주일에 아주 진실 된 마음으로 교회의 문제를 점검하고 조그마한 대안이라도 제시해 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 대안으로 오늘 본문은 참 시의적절한 본문인 듯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 7장은 목회자들에게는 대단히 예민하고 또 조심스럽게 언급해야 하는 소위 말하는 ‘성전 설교’라는 이름의 유명한 단락입니다. 왜 본문이 예민한 본문이라고 진단합니까? 오늘 한국교회에서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선택하기를 기피하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본문은 우리 교우들이 들어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반적인 수준의 본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심스럽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하려고 한 진정성이 있는 의도와 교훈을 바르게 캐치한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창립주일 설교 메시지는 또 없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중요한 본문입니다. 예레미야 7장의 본문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읍의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당시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유지들(부유한 자, 권력 상층부의 기득권 세력들)에세 선포한 벼락 치는 천둥소리 같은 설교였습니다. 성전 설교는 본문 7장뿐만이 아니라 예레미야 26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26장은 예레미야의 설교에 대한 유다 백성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이해를 위해 배경적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예레미야 1:1-3절을 읽어보십시다.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 일 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이 구절을 참고한다면 이런 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전 627년인 요시야 재위 13년부터 예언활동을 시작해서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 왕 때 유다가 멸망을 당한 이후인 585년경까지 이른바 오랜 시간동안 활동을 한 선지자입니다. 주목할 것은 오늘 본문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야김 왕의 즉위 초기인 주전 608년에 행한 설교라는 점입니다.(렘 26:1) 주전 608년이라 함은 하나님 신앙의 전성기였던 요시야 시대 저물고 그의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팔레스타인의 강자였던 애굽의 바로에 의해 폐위가 되고 다시 첫째인 여호야김이 친 애굽 정부의 꼭두각시로 등극하게 된 시대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정황은 영적으로 아주 극을 달리는 흑암의 시대였습니다. 제가 왜 흑암이라고 진단했습니까? 예레미야 36장은 아마도 여호야김 시대가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성경의 예라고 할 수 있어 소개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여호야김 제 4년에 두루마리 책에 불러주신 신탁을 서기 바룩을 불러 적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신탁을 받아 적은 내용들을 바룩은 공식적인 집회 때마다 읽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이 하나님의 신탁을 읽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두려워하는 갱신이 일어납니다. 이 이야기가 궁정에 들어가자 여호야김이 그 신탁의 책을 빼앗아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 궁에서 여호야김은 자기의 책사인 여후디로 하여금 읽게 합니다. 여후디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 여호야김이 보인 반응을 예레미야 36:23절은 보고합니다. “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참지 못하던 시대, 그래서 그 말씀을 칼로 베어버리는 시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화로불로 태워버리는 시대, 어떤 시대입니까? 여호야김이 통치하던 주전 608-598년의 유다 시대였습니다. 이 기막힌 세대에 수많은 가난한 자들은 억압의 대상이었고, 있는 자들은 사치의 극을 달렸고, 법정은 뇌물로 매수되었고, 관료들은 이 시대를 즐겼습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유다의 종교입니다. 요시야는 아몬과 므낫세로 이어지는 조부와 선친의 패역을 과감하게 개혁하고 예루살렘이외에 우후죽순 난무했던 일체의 우상 숭배 본거지인 산당들을 제거하는 종교 개혁을 이루는데 성공합니다. 신명기서에 기록된 예루살렘 제사 단일화의 율법대로 예루살렘 성전만 남겨 둔 혁명과도 같은 일체 쇄신 운동이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종교 개혁을 일으킨 요시야가 뜻밖에 애굽과의 전투인 므깃도 전투에서 유감스럽게도 전사하자 다시 유다는 하나님과는 멀어지는 격랑에 휩싸이게 됩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등극한 여호아하스는 재위 3개월 만에 애굽의 바로에 의해 축출되고 바지사장 격으로 유다의 왕이 된 여호야김은 자기 주체가 없이 만년 친 애굽적인 모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유다는 하나님 신앙이 아닌 이방의 국력을 의지하는 어처구니없는 불신앙의 나락을 떨어졌고, 그 한 복판에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명목적인 율법 신앙만이 난무했습니다. 대체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던 신앙은 다윗왕조에게 주신 계약신앙과 또 하나 예루살렘 성전이 시온에 있었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시온 즉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오니즘이었습니다. 해서 예루살렘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은 유다의 자존심이자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한 성전 종교의 중심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의들을 행하면서 성전에만 들어오면 모든 것들은 용서받는다는 이상한 궤변적 신앙으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 여호야김 시대의 이스라엘 종교였습니다. 이 두 축 중에 하나인 다윗왕조 신앙은 요시야가 급사하는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해서 이스라엘이 믿고 더 붙들었던 것이 예루살렘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 신앙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불의들을 행하면서 성전에만 들어오면 모든 것들은 용서받는다는 이상한 궤변적 신앙으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 여호야김 시대의 이스라엘 종교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된 종교인들을 향한 최후통첩 같은 예레미야의 비수의 메시지입니다. 본문 4절을 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는 당시의 성전신앙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태로 볼 때는 돌에 맞을 경천벽지의 메시지였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에 걸친 반복 문구로 성전 종교의 헛됨을 강조하고 있으니 이런 무모함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당이 여러분을 구원한다는 말을 믿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교회가 여러분을 구원시켜준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2600년 전에 예레미야가 남 유다에 선포한 메시지가 오늘 우리에게 전혀 딴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고 바로 엊그제 우리 한국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처럼 들리는 이유는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2,600년 전의 남 유다의 성전 종교의 그림이 오늘 한국교회의 자화상으로 다시 그려지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지난주간,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함께 공부했던 선배가 당신이 개척하여 큰 교회를 만든 뒤 아들에게 세습을 완료했습니다. 참 깨끗하고 심플했던 선배였는데 지금 한국교회에서 가장 싫어하는 일을 다시 감행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몇 주 전, 소그룹 모임에서 알았습니다. 모 목사께서 주식을 투자하라는 성경공부를 가르쳤는데 그 일이 사기극으로 끝났다는 이야기를 교우한테 들었습니다. 전인권이라는 가수가 모 대선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자 대척점에 있는 대선 후보 캠프에서 그 가수의 노래 한곡을 선정하여 표절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지명도가 있는 이 가수는 자기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표절시비가 되고 있는 원곡의 작곡가와 표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독일로 넘어간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렇든 아니든 세상도 표절에 대하여 이렇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데 인터넷만 들어가면 똑같은 설교들이 다른 이름으로 링크되어 있는 기막힘이 한국교회에 걸레처럼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탈들이 여론에 노출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했다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여호와 이름으로 포장하면 만사가 오케이 되는 현 한국교회의 상황이 혹 여호야김 시대의 성전종교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8-11절을 읽어 보십시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섬뜩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전에 들어오기만 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의 종교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습니다. 성정 안에 들어와 있는 거짓말하는 자, 살인자. 간음자, 바알 숭배자, 다른 우상 숭배자들을 향하여 선포합니다. 너희들의 그 일체의 가증한 일을 내 눈으로 보고 있다고. 너희들이 내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무엇을 강력하게 하나님이 선언하고 있습니까? 성전이 너희들의 피난처가 아니라는 것을 경고합니다. 예배당으로 나오는 행위가 너희들의 죄를 탕감해 주는 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와 몇 푼의 알량한 물질을 하나님께 가증하게 드리고 나면 세상에서 지은 죄들이 속량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와 모든 예배에 다 참석하는 행위를 통해 지은 죄악들이 속죄 받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더 가증한 일이라고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식적 성전 종교에 함몰되지 말고 진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정신을 차려야할 신앙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알림은 창립 8주년을 기념하는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주시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 답을 본문에서 찾고자 합니다. 본문 2-3절을 먼저 봅니다.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이어지는 5-7절을 여이어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예레미야는 몇 가지의 행동 강령을 선언했습니다.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3절) ‘이웃에게 행위를 바르게 하여 정의를 행하라’(5절)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라’(6절)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6절) 신학자들은 이 일련의 행위를 미슈파트와 체다카의 실현이라는 말로 대치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로 교훈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렇습니다. 동의하지만 저는 신학자가 아니라 목회자이니까 현장에 맞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기막힌 세태를 역전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실현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입니다. ● 이기적인 교회주의가 아니라 이타적 이웃주의 교회로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너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일체의 반향들에 대하여 저는 강력하게 투쟁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공동체는 교회와 가정입니다. 교회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가 소중한 공동체라고 해도 교회가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주의는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주의라고 합니다. 중세 가톨릭교회를 우리들은 가끔 인용합니다. 왜 인용하기를 좋아합니까? 개신교회 탄생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단지 개신교회의 탄생을 하게 만든 일등공신이기 때문에 중세 가톨릭을 단골메뉴판에 올리면 안 됩니다. 더 소중한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 가톨릭은 아주 잘 나가는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조직 면에서도 세속적 국가를 지배하는 물리력을 가졌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거기에다가 돈까지 거머쥐었던 공동체가 중세 가톨릭입니다. 그야말로 성공한 조직이요,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성공한 집단인 가톨릭을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버리셨다면 그 공동체가 과연 물질이 많다고,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성공한 집단이 되는 것입니까?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셨다면 결국은 실패한 것입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버리신 가톨릭인 것을 알았기에 거기에 반향해서 나온 개신교회가 중세 가톨릭의 모양새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교회만을 위한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하면 그것은 중세 가톨릭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실패한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 종교의 환상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경종하였습니다. “이웃에게 행위를 바르게 하여 정의를 행하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고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고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철저한 이타적 교회가 되어 이웃과 함께 나누는 교회, 신자가 되리고 권면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포한 메시지의 압권이 우상숭배 척결이 먼저가 아니라 이방인과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지 않는 것이 먼저라고 한 점입니다. 혁명과도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그만큼 이타적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제천에 소녀가장들에게 생리대를 지원하는 2차 대외 구제를 진행했습니다. 저녁 소그룹반원들의 고난주간 개인 헌신의 감사예물과 구제부가 하나가 되어 진행한 사역의 결과입니다. 희망복지과 직원들과 두 번째의 미팅을 통해 가장 진정성이 있는 생리대 지원 방안을 나누었습니다. 지원금을 전달하고 나오는 데 담당직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 소중한 기부금을 감동 있게 쓰겠습니다.” 듣다가 이런 소회가 저에게 밀려왔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교회의 감동을 기다린다.” ‘아직도’라는 부사가 세상이 교회에 걸고 있는 희망이라면 교회는 그래도 정말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감동의 공동체로 계속 서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독립교회 목사 안수식을 지난 월요일에 섬겼습니다. 109명의 신임 목사 중에 제가 맡은 인원은 11명이었습니다. 11명의 새내기 목사들에게 안수를 마치고 악수례를 하는 시간에 선배로서 이렇게 진정성을 갖고 권했습니다. “목사님, 축하합니다. 성공하는 목사 되지 말고 승리하는 목사가 되십시오.”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교회를 이기적인 교회로 만들지 말고 이타적 교회로 만들라는 당부 말입니다. 이제 8살이 된 세인 지체 여러분! 10년 뒤인 18세가 되었을 때 우리들의 후배들이 이렇게 말하는 교회로 만들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세속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판이 대체적인 정황이었는데 선배님들이 그 판을 세상에게 감동을 주는 판으로 역전시켰습니다.” 라고 행복하게 간증하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다시 제가 좋아하는 경구를 소개하며 설교를 마칩니다. “교회는 이타적일 때만 교회다.” (디트리히 본회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