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29번째 강해) 제목: 인격적으로 반응합시다. 본문: 고린도전서 6:9-11 서론) 몇 년 전에 뉴욕의 지성들을 깨운 리디머 교회의 담임목사인 팀 켈러가 쓴 ‘예수를 만나다’라는 도전적인 책을 보다가 벼락같이 내리치는 말씀으로 받은 대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진짜 믿음이란 언제나 개인적이다. 만약에 당신이 예수께서 인류 전체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죽은 건 믿으면서 당신을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예수를 붙드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예수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없는 것이다.” (p,144에서)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성경의 기사인 사사기에 등장하는 기드온 이야기를 다시 상기할 때 우리들이 상투적으로 받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싸움을 독려할 때 모인 인원이 32,000명이었는데 하나님이 많다고 해서 돌려보낸 20,000명이었고 그것도 하나님이 많다고 하셔서 2차로 돌려보낸 자가 9,700명이었기에 하나님은 남은 300명으로 미디안과의 싸움을 승리하게 하시는 기적을 베푸셨다는 면에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주 생뚱맞은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32,000명에서 300명으로 용사의 수를 줄이셨을까? 혹시 하나님께서 이름을 부르시기에 힘들지 않은 인원이 300명은 아니었을까? 담임목사를 비성서적인 성경 해석을 한다고 이단으로 몰지 마십시오. 제가 전제했습니다. 한 번 생뚱맞은 상상을 해 본 것이라고. 그러나 이 상상을 하면서도 담임목사가 교우들에게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던 의도가 있다는 것만큼은 농으로 받지 말고 여러분들의 가슴에 새기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신다는 점입니다. 어제 토요일 새벽에 읽은 성경 텍스트 중에 역대상 21장이 있었습니다. 읽다가 오늘 주일 낮 말씀 선포시간에 인용하리라 다짐한 말씀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인구조사를 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에 전염병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70,000명의 인원이 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내리셨지만 이제는 그 심판을 거두기로 마음을 먹고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갓을 통해 다윗에게 명령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여부스로 올라가서 오르난에게 너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아야 하는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그러자 오르난이 기쁨으로 여호와를 위한 제단으로 사용될 타작마당을 왕에게 헌물하겠다고 말합니다. 오르난의 이 말을 들은 다윗의 반응을 역대상 기자는 이렇게 21:24절에 기록했습니다. “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반드시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빼앗지 아니하겠고 값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렇게 정당한 삯을 지불하겠다고 말한 다윗은 오르난에 금 육백 세겔을 지불하고 그 타작마당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전염병을 거두어 달라는 간절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그 결과 전염병 심판으로 벗어날 수 있었음을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이 성경의 내증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가지고 있는 물리력과 공권력을 사용하여 힘없는 백성의 땅을 갈취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땅을 구입하여 번제를 드린 다윗의 행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인격적인 신실함으로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무엇을 제가 우리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일까요? 하나님은 철저히 당신의 사람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고 싶음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끼리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계심을 첨언하고 싶음입니다. 일전에 ‘ICH UND DU’ (나와 너)라는 걸작을 남긴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인간의 길’이라는 유대인들의 철저한 율법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하씨딤’의 가르침을 삶으로 활용하는 책을 썼는데 그 안에 이런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대 랍비인 코쓰크가 그를 찾아온 유대교 학자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러자 유대인 학자들은 그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질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이 온통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데.” 비웃고 있는 유대인 학자들에게 랍비 코쓰크가 이렇게 자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받아들이는 어느 곳에나 머무십니다.” 저는 이 글을 읽다가 아주 묘한 감정에 휩싸인 적이 있습니다. 코쓰크의 말에 더 점수를 주고 손들어주고 싶은 그런 감정 말입니다. 무슨 의미인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코쓰크에 말에 동의한 부분은 이곳입니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어느 곳’ 그렇습니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곳에 하나님이 머무십니다. 그래서 그곳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에게 나아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를 물으며 도전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곤란하게 하기 위한 아주 소위가 악한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아신 주님은 그들에게 항복하게 하시는 말씀을 천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0-21절을 소개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주님 말씀의 압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보이며 느낍니까? 인격적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입니다. 오늘 왜 제가 이토록 인격적이라는 단어에 천착하고 있는지를 지금부터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의 설교집에서 읽은 동화 같은 글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에녹과 항상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하루 종일 에녹과 교제하는 것이 좋았던 하나님은 매일 그렇게 에녹과 함께 노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붙잡고 노시다가 에녹을 집으로 돌려보내시는 것을 깜빡 잊으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에녹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에녹아,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이제는 우리 집으로 이사 가자.” 그리고 데리고 가셨는데 그 날이 400년이 되는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면 이걸 가지고 신학적으로 해석이 틀렸다는 등의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을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시비를 걸지 말고 요즈음 유행하는 말 그대로 팩트만 체크해 보십시다. 무엇을 당시 하 목사께서 말하고 싶었을까요? 하나님이 에녹과 함께 하셨던 인격적 교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런 차원으로 볼 때 본문의 배경이 된 고린도교회를 섬기는 자들 중에는 아주 철저하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는 부류가 있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철저하게 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던 부류들이 있었음을 바울이 토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론) 본문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본문 9-10절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우리는 지난 고린도전서 강해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용인한 고린도 교회 공동체, 그리고 성도간의 송사 사건으로 고소, 고발하는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안타까운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또 경종하는 바울의 메시지를 살폈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바울이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불의한 자라고 정의한 부류들의 분류는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바울이 불의한 자들이라고 정의한 부류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본문에만 10개의 행위를 하는 자들임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입니다. 이렇게 10개로 정리한 이들 부류들에게 임할 비극이 무엇이라고 바울은 선포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비극입니다. 본문 9-10절에서 두 번에 걸쳐서 강조한 바울의 선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강력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아주 반대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들이 아닌 본문에서는 굳이 그렇게 바울이 문장화시키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상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류들을 대조하여 언급했습니다. 본문 마지막 11절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자들의 부류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 바울의 이상으로 본문에 작성하고 있는 대조적인 두 부류들을 분류한 글 솜씨를 통하여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비인격적 관계의 집단이지만, 후자는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부활절 이후 두 번째 주일에 우리들에게 주시는 영적 테제를 얻게 됩니다.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아픈 비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에덴에서의 추방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뒤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에덴에서 추방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후 찾아온 비극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의 고통과 수고가 비극입니까? 이제는 아이를 해산하는 고통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하와의 고통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노동을 성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땀 흘림은 도리어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는 말이 더 적확합니다. 아이를 갖고 해산하는 것이 고통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를 출산하는 것은 기쁨 중에 기쁨임을 부모들은 압니다. 그러면 무엇이 아담과 하와에게 비극이었습니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단절된 것입니다. 해서 어느 신학자는 에덴동산에서의 추방된 아담과 하와의 비극을 ‘하나님의 부재’ 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기막힌 통찰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아픈 비극은 내 안에 하나님이 부재하신 인격적 관계의 단절입니다. 음행하는 자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리 만무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비인격적 반응의 무리들입니다. 간음하는 자의 장소에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머물러 계실 수 없습니다. 탐색하는 자, 남색 하는 자, 도적,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모욕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매일반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자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된 자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주어진 형벌은 하나님 나라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이해하고 상응하는 반응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깁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만난 학자가 20세기 최고의 변증론자인 CS 루이스였습니다. 더불어 그의 걸작인 ‘고통의 문제’을 만나고 나서 캄캄한 흑암이 물러가는 듯한 영적 시원함을 경험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이런 논제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변증을 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것까지 하시는 분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것’(things)이 아니라 ‘헛것’(nonentities)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상호 모순되는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약한 피조물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은 하나님께도 똑같이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pp,41-42) 루이스의 이 글을 맨 처음 접했을 때 이 논제의 핵심을 저는 신정론에 대한 해석으로 받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이 얼마나 인격적인 존재이신가의 차원에서 받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깊은 곳에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인 인간을 로봇처럼 취급하지 않으시고 전인격의 존재로 대우하신다는 그런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의 이 해석은 역으로 하나님께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께 보이는 전인격적인 반응이실 것이라는 확신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다시 유대인 랍비 코쓰꼬가 자답한 말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받아들이는 곳’ 다시 강조하지만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체의 곳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인격적인 반응이 있는 곳이라는 해석은 옳습니다. 시편 50편은 다윗 시대의 성가대장인 아삽의 고백 시입니다. 그의 시를 읽다가 천둥소리로 다가온 말씀이 있었습니다. 소개합니다. 시편 50:7-8절입니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이 시에서 제가 가장 뜨겁게 감동 받은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대명사가 1인칭, 2인칭 단수라는 점이었습니다. ‘내’ ‘네게’ ‘네’ ‘너’ 의 은혜가 보이십니까? 주님은 인격적으로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저 사람에게 찾아가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말은 너무나도 옳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나 한 사람만 있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결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말씀드리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부활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크로스웨이 지체들과 함께 점심 식사로 라면을 먹었습니다. 마침 식탁에 세인이가 함께 했습니다. 둘러 앉아 라면을 먹는데 아내가 보니 세인이가 신세계가 열린 것처럼 라면을 맛있게 먹는 것이 보여 세인이에게 이렇게 아내가 한 마디 농을 던졌습니다. 세인아, 벌써 라면에 신세계에 빠지면 안 되는데. 너무 빨리 알아버렸어! 아내의 이야기를 세인이가 듣고 다시 뭐라고 반응했는데 이번에는 집사람이 잘못 들어 세인 엄마에게 아내가 세인이가 한 말을 되물었습니다. 통역을 해준 세인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집사람이 뒤로 넘어가며 웃었습니다. 세인이가 아내에게 아주 가소롭게 한 말은 이렇습니다. “뭐래?” 기분나쁘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이 요즈음 유행어라는 말을 저도 그 날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어리다고 깔보지 마십시다.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으면 곧바로 되돌아옵니다. “뭐래?” 저는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가 늘 마음속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십시다.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 임재 하실 때 예배가 회복되고 기적은 일어나네 전능하신 주 영원하신 능력의 통치자 자유가 선포되어 주 백성 돌아오네 하나님 나라 임하소서 영광과 존귀 능력과 위엄 놀라운 사랑의 기적의 하나님 지금 이곳에 오소서 주 높고 위대하심을 크게 외쳐 선포하네 만왕의 왕 주 하나님
지금 오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