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0번째 강해) 제목: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0:1-12 서론) 살아생전에 불교계의 영성을 주도했던 이판 승려인 법정이 쓴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이라는 그의 법문 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자기 언어가 없다는 것은 자기 나름의 사유, 깊은 생각이 없다는 반증이다. 자신의 언어를 지니려면, 즉 자기의 세계를 갖추려면 침묵에 귀 기울이는 영적인 탐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p,304) 그의 글을 접하다가 타종교의 성직자이지만 그가 불교 신자뿐만이 아니라 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았는지를 가늠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이 말이 아니라 폭력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제 이발을 하기 위해 제가 다니는 미용실을 다녀왔습니다. 그 미용실은 대형 마트에 위치해 있기에 이발을 마치고 컴퓨터 부품을 하나 구입하기 위해 매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가전제품 매장에서 물건을 찾기 위해 서성이는데 갑자기 큰소리가 들려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큰소리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스탠드 형 선풍기를 구입한 고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물건을 가지고 와서 소리가 크니 반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장 직원이 이미 개봉된 전자제품은 물건에 하자가 없는 한 소리가 크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환이 불가능함을 설명하자 고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매장 직원을 쥐 잡듯이 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던진 언어들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언사들이었습니다. 반말은 기본이고, 거의 인격적인 면까지 건드리는 그런 말들을 난무하며 직원을 몰아 세웠습니다. 결국은 을의 입장에 있었던 매장 직원은 교환이 아닌 환불 쪽으로 가닥을 잡고 일단락되었습니다. 사람이 말을 건넬 때 그 말은 이미 던지는 사람의 인격이 담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날, 공격하는 자는 말로서 이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제 삼자인 저의 판단으로 볼 때 그 사람은 갑의 위치에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내뱉은 폭력적인 언사들로 인해 이미 인간 같지 않은 천박성을 드러낸 것으로 볼 때 참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주 오래 전, 고인이 되신 하용조 목사께서 쓰신 칼럼 중에 ‘힘은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삼가 사역의 자세를 가다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참 된 힘을 네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① 절제와 통제가 있는 힘 ②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정신적인 힘 ③ 소유된 힘이 아니라 위탁된 힘 ④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힘 이 힘들이 없기에 인위적인 힘을 의지하려고 자들은 승려 법정의 말대로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사유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성찰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생각이 없는 그 천박함 때문에 갖고 있는 인위적인 물리력으로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그 힘이 이긴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착각 중의 착각입니다. 진짜 힘은 하용조 목사님이 하셨던 말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힘입니다. 이 힘을 본문에서 바울은 힘껏 발휘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영적인 힘을 기초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지성적으로, 또 얼마나 성서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글들이 담겨 있습니다. 본론) 바울은 오늘 본문 10장을 기록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지적인 내공들을 총동원한 느낌이 들 정도로 구약 성경의 한 흐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는 지난 번 강해를 통해 말씀드린 헬라적인 문화에 익숙한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분이었고 압도적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린도교회의 주류는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렇게 수신자가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대다수인 그들에게 본문 1절이 주는 바울의 호칭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호칭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형제들아’라고 호칭한 헬라어 단어는 ‘아델포스’입니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한 어머니의 자궁(델퓌스)에서 태어난 형제를 의미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그 정도의 친밀함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붙이는 호칭이라는 말입니다. 헌데 각종 바울 서신에서 바울이 사용한 이 단어의 용법은 아주 특별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엮어진 공동체의 형제와 자매로 외연을 확장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 해석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그 이유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언급했듯이 고린도교회는 이방의 땅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 안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적인 크리스천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헬라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에게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하다고 간직하고 있는 구약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는 관심 밖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언급해야하는 가르침 중에는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상당수 많은 부분이 삽입되어 있었기에 이 구약의 의미를 통한 교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헬라적인 문화와 배경을 갖고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주류들에게 영적인 연대감을 주어야 하는 필수적인 단계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유 때문에 아주 의도적으로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을 호칭하는 단어로 ‘아델포스’ (형제들) 라는 단어로 사용함으로 구약 성경의 이해를 도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피로 인하여 구원 받은 교회 공동체의 멤버들은 구약의 전통이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또한 고린도 사람들로 대변되는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나의 이야기도 된다는 사실을 고지하기 위한 바울의 포석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바울은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을 끄집어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모세라는 지도자를 들어 구원하신 사건 말입니다. 바로 이때의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사건임을 발췌하면서 더불어 홍해를 가른 사건과 광야에서의 삶까지 함께 소개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 1-3절을 묶어서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바울이 무엇을 역설했습니까?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우리’ 조상들이 그곳을 나오면서 구름 아래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라는 표현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표현법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또한 바다 가운데를 지났다고 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렇게 구름과 바다 아래에 있었던 우리 조상들은 모세에게 속하였다고 바울은 진술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신령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음을 분명히 술회하고 있습니다. 1-3절 기록을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톰 라이트는 고린도주석에서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구름과 바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성령과 물세례를 말한다.” (p,165) 홍해를 가르고 그 길을 지나가게 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바울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경험하게 하신 성령 세례와 물세례로 대입시켰다고 주석한 것입니다. 톰 라이트 교수가 이렇게 역설한 자신감은 아마도 이어진 4절 때문일 것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백성들(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은 그러므로 그 분이 주시는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물을 먹었던 것과 동일하다는 유비의 표현으로 본문을 바울은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와 인도함을 받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바울은 직설합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였습니다. 7-10절은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상의 본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뒤에 살았던 40년 광야 생활동안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범죄 했던 대표적인 네 가지의 사건을 상기시킨 내용입니다. ⓵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고 지적한 7절은 출애굽기 32:6절에 기록된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빗댄 글입니다. ⓶ 8절에 기록된 ‘음행하지 말자’는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바알브올에게 부속된 그모스 축제에서 벌인 이스라엘 족장들의 음행의 범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⓷ 9절에 기록된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다는 표현은 민수기 21:4-9절에 기록된 광야에서의 삶을 질타하고 불평하며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동경한 죄에 대한 지적입니다. ⓸ 10절에 기록한 어떤 사람을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을 당한 사건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민수기 13장에 기록한 가나안 정탐 사건 이후 부정적 보고에 흔들려 모세와 아론을 공격하던 일을 술회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아주 상세하게 이스라엘의 죄를 열거하며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의 아픈 역사를 복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 5-6절을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바울의 의도가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선조들의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임이 분명합니다.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조상들의 아픔을 들추어 낸 것입니다. 악을 즐겨한 우리 조상들의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거울삼기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열조의 우상 숭배와 범죄 함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기에 그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5-6절을 강조하기 위한 점층법적인 표현을 본문 11-12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지금까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신학적, 성서적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주석적 작업들을 감당했습니다. 이상의 주석적 작업을 통해 오늘 바울이 말한 본문이 주는 영적 교훈은 과연 무엇인지를 접근하겠습니다. ★ 선배들이 잘못한 일들을 또 다시 범하지 않도록 긴장하라는 교훈입니다. 반면교사를 삼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조금 학문적으로 문장을 만들어 본다면 이렇게 만들어보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잘못된 길을 갔던 신앙적 선배들을 반면교사 삼고, 올바른 삶을 살아갔던 신앙의 선배들은 진면교사 삼아라.”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십시다.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중에는 자유 함을 무기로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자가 즐비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자유 한 데 그 까짓 아무 것도 아닌 우상에게 드린 음식을 먹는 것 즈음이야 어떠냐는 식으로 본인들의 우상 음식 섭취를 정당화시켰던 자들이 고린도교회를 유린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만에 하나,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 중에 새 신자들을 비롯하여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 먹기를 금기시하던 자들이 자유 함을 외치는 자들로 인하여 실족하게 된다면 마땅히 그 음식 섭취를 중단하는 것이 옳다는 바울의 권고도 우리는 이미 지난 강해를 통해 접했습니다. 8장에서 이미 나누었던 우상 제물에 관한 신학적 담론을 바울이 10장에서 다시 들추어 낸 후에 이것을 재론하는 바울은 무엇 때문에 이런 부담스러운 일을 벌였을까요? 설교자인 저는 이렇게 접근하고 싶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엘리트주의자들이 빠져 있었던 잘못된 신앙인 편리주의적인 신앙의 행태를 부수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앞에서 저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네 가지 죄악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바울의 경고를 해석했습니다. 두 가지만 다시 한 번 석의해 보십시다. 첫째로 금송아지 사건이었습니다. 시내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이제 이집트 바로의 군사적인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을 스스로 인지했을 때 그들은 이제 안전하다고 자평한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 땅이 안전한 데 우리가 계속해서 물도 없고,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광야로 이끌어내려는 하나님이 불편해졌습니다. 그 불편함 때문에 제대로 인생을 엔조이할 수도 없습니다. 이 숨 막히는 불편함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세가 말하는 하나님을 벗어나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는 말 잘 듣는 하나님이 있으면 되겠다고 의견의 일치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정통성이 있는 아론에게 물리적인 압박을 가하여 만들라고 종용했고 결국 거기에 백기투항 한 아론의 야합을 빌미로 만들어진 하나님이라는 명분을 얻은 뒤, 그 말 잘 듣는 하나님의 허상 앞에서 ‘짜하크’ (뛰놀더라)의 난장을 벌인 것을 바울은 본문 7절에서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뛰놀더라’(짜하크) 라는 단어가 주는 시사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추구하고 싶었던 편리주의적인 습관화된 종교적 행위입니다. 두 번째로 9절 본문에서 지적한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 물려 죽은 비극의 전말입니다. 광야에서 생활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녹록한 여정은 아니었지만 마라/엘림에서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신 광야에 도착해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 받는 은혜도 받았습니다. 르비딤에서는 반석에서 물이 솟구치는 기적도 보았습니다. 시내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율법도 부여받았습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건만 에시온게벨에 이르러서 또 다시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과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이릅니다. 이유는 별로 먹을 것이 없는 광야로 우리들을 이끌어내서 굶어죽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애굽에서의 삶이 좋았다는 것임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노예가 다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원망하고 있는 자들에게 불 뱀을 보내셨고 그들을 물게 하여 죽게 하였음을 민수기 21장이 보고합니다. 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까?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습관의 동경 때문이었습니다. 마늘과 부추가 좋았습니다. 만나가 그들의 입에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애굽에서의 입맛, 습관, 관습 등등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열조들의 이런 기막힌 편리주의에 맛 들린 습관적인 행위들에 대하여 맹렬히 질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조의 습관적인 행위가 곧 고린도교회에 존재하던 자유 함을 빙자한 엘리트주의자들의 종교적 행태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역설합니다. 12절을 의미심장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 구절을 중심으로 한 오늘 설교의 교훈을 이미 교우들에게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열조(조상들)들의 신앙적 패착 요인들을 반면교사 삼아 그렇게 실패하는 신앙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진면교사의 다짐을 가지라는 교훈으로 오늘 설교의 맥을 짚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설교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편리주의적인 습관화된 종교 생활을 벗어 던질 수 있겠습니까? ● 긴장하는 신앙의 틀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상용화하라는 것입니다. 영어 단어들 중에 빈도부사라는 형태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빈도부사란 어떤 상황에서 행해지는 횟수를 의미하는 부사를 말하는데 알아 두면 재미있습니다. 100%의 참여 횟수를 의미하는 언제나 항상 늘(ALWAYS)가 있습니다. 90% 정도를 의미하는 ‘대체로’(USUALLY)가 있습니다. 80-70% 정도를 의미하는 ‘종종’(OFTEN)도 있습니다. 반타작을 말하는 50%의 의미인 ‘가끔’(SOMETIMES)도 있습니다. 20% 정도를 나타내는 ‘좀처럼’(SELDOM)과, 10% 정도를 의미하는 ‘드물게’ (RARELY)가 있습니다. 0%를 말하는 ‘절대로’(NEVER)로가 빈도부사의 방점을 찍습니다. 제가 왜 빈도부사라는 영어 단어를 소개합니까? 편리주의라는 신앙생활의 최대의 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영적 긴장의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내가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선택은 하나님의 생각을 내 생각에 ALWAYS 즉 항상 언제 늘 접목시켜야 합니다. 이 접목함의 틀에 ‘대체로’가 끼어들면 안 됩니다. 물론 ‘종종’ ‘가끔’ ‘좀처럼’ ‘드물게’ ‘절대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이런 빈도부사가 내 신앙의 여정 안에 끼어들 때 나도 모르게 영적으로 와해되는 것입니다. 100주년 기념교회를 시무하는 이재철 목사가 쓴 ‘사명자 반’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만일 그대가 누군가를 추종하고 있다면 그 경우에도 그대는 그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를 따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반드시 주님 안에서 자문해야 한다.”(p.128) 내가 지금 주님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매일 주문하는 자가 어찌 경솔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 주님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매일 주문하고 믿는 자가 어찌 방종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 주님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매일 주문하고 믿는 자가 어찌 주님을 ‘종종’ ‘가끔’ ‘좀처럼’ ‘드물게’ ‘절대로’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 주님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매일 주문하는 자가 어찌 섰다고 교만하여 넘어질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자는 영적 긴장을 늦추지 않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할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에서 언급한 대로 지난 주일 예배에 대한 감동의 후담들을 한 주간 많이 들어 감사했습니다. 특히 외부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온 예배자들이 우리 세인공동체의 예배를 경험하고 정말 오랜만에 예배가 주는 영적인 감동을 경험했다는 후담들을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실시간 인터넷 방송으로 예배를 드린 한 분이 저에게 이렇게 비행기를 태워주었습니다. “따라갈 수 있는 예배의 모델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극찬에 가까운 이야기를 듣다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정말로 우리 교회가 그런 모델링을 주는 교회인가?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완벽한 모델링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부족한 것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아주 완벽하고 귀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계시로 우리들에게 주신 성경입니다. 성경 안에는 반면교사를 삼아야 인물, 진면교사를 삼아야 할 인물들이 공히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인물들을 통해 신앙의 견고함을 위한 타산지석을 삼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성경에 기록된 인물과 사건들을 타산지석 삼을 만한 영적인 민감성이 있느냐? 그만큼 영적으로 긴장하고 있느냐? 입니다. 바라기는 날마다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 삼아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선 줄로 생각하지 말고 넘어질까 항상 조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나 다시 일어섭니다.’ 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 내 비웃음 나를 향해 돌아오고 어리석고 미련한 그 백성들 나의 모습과 같네 찢기고 상한 나의 영혼을 끝까지 사랑한 아버지의 그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으리요 내 생명 다해 주 노래하리라 내 생명의 근원되신 나의 삶의 이유 되신 내 모든 것 나의 전부 아버지 나 다시 일어섭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나 믿음 없어 실패한 나 그런 나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나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