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일 맥추감사주일 설교 제목: 또 하나의 감사 본문: 시편 122:1-9 지난 화요일 저녁에 진행하는 소그룹 모임에서 함께 나눈 주제의 틀이 ‘주님의 현존 앞에 설 때’ 라는 제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13-14절에 기록되어 있는 빛과 소금의 결정체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한 담론이었습니다. 要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빛이다, 너희는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선언하심은 진행형이 아니라 완료형이라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빛이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아직은 빛이 아닌 것에 대하여 위안을 삼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였고, 소금이 되어가는 과정이니까 아직 소금이 아닌 것 가지고 자기변명을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엄격한 잣대였습니다. 소그룹 반 지체들은 바로 이 대목을 읽으며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렇게 빛과 소금의 결정체로 살아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소개한 ‘삶의 메시지다’ 에서 청파 교회 김기석 목사는 옷매무새를 다시 고쳐 매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결정타를 한 방 독자들에게 날립니다. “세상에는 소금처럼 보이지만 소금이 아닌 이도 있고, 빛처럼 보이지만 빛이 아닌 사람도 있다. 모양은 닮았지만 실질은 다른 사람, 그리스도인의 외양은 갖췄지만 그리스도의 진정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 말이다. 웨슬리는 그들을 가리켜 ‘절반의 기독교인’이라 했다. 절반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p,111) 이 글을 치열하게 나눈 뒤에 지체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세인교회는 잘 가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다니고 있는 세인교회의 방향성은 옳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잘 가고 있습니까? 그러자 무거운 침묵을 끊고 소그룹 지체들이 마음을 합하여 동의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세인교회의 지금의 자화상이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지금 잘 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교회라는 공동체의 방향의 키를 잘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고맙습니다.” 저는 오늘 교회의 방향성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상반기를 마감하고 하반기를 시작하는 맥추감사주일에 상응하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일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시편 120편에서 134편에 이르는 15개의 시편 분류에 해당하는 시인의 노래입니다. 이 15편의 노래는 일종의 모음집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15개의 시들은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보면 안 되고 함께 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책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이 15개의 시편들의 부제가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라는 부제입니다. 이 부제(副題)를 이해하려면 몇 가지의 주석이 필요합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 볼 이해는 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15개인가의 이해입니다. 감리교신학대학의 구약학 교수인 왕대일 교수는 ‘시편 사색’에서 이런 설명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문헌 탈무드는 그 이유를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문인 ‘니카르노 문(Nicanro gate)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문에 들어서려면 15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데 성전을 방문한 순례자들은 그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시편 120-134편의 시를 한 개씩 암송해야 했기 때문이다.” (p,232) 생각하기에 따라 설득력이 있는 해석입니다. 또 하나의 이해는 ‘올라간다.’의 해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항상 그들의 정신 속에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토대가 시온 산 신앙이었습니다. 해서 시온 산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다시 말해 시온산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거룩한 곳 즉 성전의 의미였고 반면 이스라엘은 산 밑에 거하였습니다. 산 밑은 세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거룩한 성전을 찾아 올라가는 순례자들은 땅 밑에서 땅 위로 올라가는 행위를 포함하였기에 시편 기자는 120-134편의 15개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붙인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전이해하고 본문 1-5절을 읽으면 한결 이해하는 폭이 넓어집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지금 교우들에게 읽어드린 본문 1-5절에 나타난 핵심적인 키워드가 혹시 보이십니까? 성전에 올라가며 노래하는 시의 첫 편인 시편 120:5절을 보면 성전 순례를 오른 순례자가 머물고 있는 곳이 그려져 있습니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메섹’이라는 지명과 ‘게달’이라는 지명이 오늘날 어디를 정확하게 의미하는지는 말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럼에도 런던 대학교의 구약학 교수인 레슬리 알렌은 이렇게 추측했습니다. “앗시리아 참고문헌들에 의하면 메섹은 길리기아 북동쪽, 갑바도기아 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게달은 시리아 아라비아 사막과 관련이 있었던 아랍 유목 민족을 의미하는 것 같다.”(WBC 주석, 시편 하, P,252) 그렇다면 이 지역들은 예루살렘에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원거리인 터키 지역과 아라비아 지역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지금 이렇게 먼 거리에 머물고 있는 순례자는 자기가 머물고 있는 그 장소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왜? 그의 소망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행하여 올라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이 순례자는 지금 자기가 이 먼 거리를 이동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행하여 가고 있는 분명한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성전 순례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성전 순례자는 여호와의 지파들이 이전에 행했던 것을 자기도 행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감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전에 오르는 이유, 그렇습니다. 감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전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자로 평가받던 존 스토트 목사는 ‘내가 사랑한 시편’에서 분명히 이렇게 시편 122편을 적용했습니다. “이 시편에 나오는 ‘여호와의 집’ 또는 ‘예루살렘’은 오늘날의 교회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교회를 위하여 우리가 가장 긴급하게 구할 것은 무엇일까?”(P,201) 존 스토트가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 교회에 너도 나도 감사하라는 이유에서 일 것입니다. 교회에 감사하라는 말이 여러분은 어떻게 들리십니까? 아멘 할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참 다행이지만 근래 21세기에 교회에 감사하라고 설교하는 목사는 참 이상한 목사로 낙인찍힐 수 있는 것이 현실인 게 오늘 21세기입니다. 왜? 교회에 감사하라는 말이 불온하게 들립니까? 간단합니다.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교회의 일탈로 인한 신자들의 거부감 때문입니다. 교회만은 위한 교회, 세상을 전혀 돌보지 않는 폐쇄적인 교회, 목회자 숭배 진원지처럼 여겨지는 봉건적 교회 정치 구조, 대형교회들의 상식도 못하는 도덕적, 윤리적 구태인 목회자 세습, 제왕적 무소불후의 권력을 휘두르는 당회의 악습, 세상 사람들의 가치보다도 훨씬 더 못한 믿는 자들의 비정상적 삶 등등으로 인해 교회가 이제는 세상을 위해 기도를 해 주는 선한 영향력이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게 기도거리가 된 것에 대한 불신 등등이 교회에게 감사하라는 설교를 하면 시큰둥한 반응을 하게 하는 이유임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래서 사실, 오늘 목회를 하는 목사는 보통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목적이어야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한 교우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가 목적이어야 하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사님의 설교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교회가 목적이어야 한다면 교회는 또 다른 우상과도 같은 존재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을 받고 이렇게 그 교우에게 말했던 것이 기억에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제가 교회가 목적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설교의 텍스트가 성전 정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전에 대한 카운터파트의 의미로 교회를 말하려고 했기 때문에 표현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정정합시다. 예수가 목적이어야 하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렇게 표현하자 그 질문한 성도가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성도가 그렇게 질문한 것을 충분히 그리고 진정성을 갖고 십분 이해하였습니다. 그의 질문은 맞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우리 세인 교회라는 가시적, 비가시적 교회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왜? 억지 춘향처럼 이렇게 교우들에게 권면합니까? 이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소수의 교회에서 잔존하는 제왕적 권력을 가진 카리스마 충만한 목사가 휘두르는 횡포가 아닙니다. 이것은 결코 강제력이 있는 압박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이렇게 권하고 있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인정하고 있는 그리고 공감하고 있는 세인교회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성 때문입니다. 세인교회가 가고 있는 교회로서 세상을 향해 있는 방향성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이타적 교회로서의 방향성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가 몸부림치고 있는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괴물과 맞서 싸우고 있는 정상의 정상화에 대하여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가 집중하고 있는 상식이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집하는 그 고집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인 교회에 등록하여 예배하는 새로운 지체들이 다른 것 때문에 등록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하심이라는 이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강단이 사람을 높이거나, 길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 외의 것들과 타협하지 않음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근래 설교하기가 두려워 부교역자들에게 설교를 위임했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 예배 시간에 강지숙 전도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갑자가 울컥했습니다. 민수기 6:22-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공부했듯이 이 구절은 구약에 기록된 축도입니다. 강전도사님이 이렇게 이 텍스트를 가지고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하여 복을 받으려는 태도에 급급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우들은 하나님 자신이 복임을 인정하고 복 자체이신 하나님께 집중하는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복에 집중하자.” 기막힌 영적 성찰이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고승우전도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에베소서 강해를 시작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통해 일갈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대 명제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도되었다는 정체성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식이 아닌 하나님의 식을 살아내는 정체성에서 흔들리지 않을 때 교회가 건강해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강단에서 폼 잡고, 사람의 귀에 사탕발림하는 설교가 아니라 도리어 성도들의 심령을 휘젓고 설교자들 스스로도 그런 사역을 다짐하는 교회가 바로 우리 세인교회임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표절 공화국인 대한민국을 본받듯이 상당수의 교회 강단에서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비극을 봅니다. 더 기막힌 것은 그 토씨하나 틀리지 않는 설교를 활자화하여 내 것으로 둔갑시키는 망령됨이 아무런 죄책감이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강단에 올라가기에 앞서 피 흘림이 있는 기도의 영성과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귀 기울이는 최선의 공부를 통해 집약된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교역자들을 통해 선포되고 있는 세인교회에 감사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사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감사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식을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교회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맥추절을 맞이하여 추슬러야 할 첫 번째 감사 이유입니다. 1) 방향성이 하나님의 식인 교회만이 주는 하나님의 평화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평안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얻어야 하는 것, 그리고 교회가 해야 하는 것, 바로 에이레네이며 샬롬인 평화입니다. 오늘도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시고 선포하신 평강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정체성은 아주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에 의해서 증언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알아보십시다. 요한복음 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이 주는 평강과 교회가 주는 평강이 어찌 같을 수가 있을까요? 만에 하나같다고 느껴진다면 교회에서 주는 평강은 분명 가짜일 것입니다. 시인은 본문에서 연이어 바로 이 평안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는 평강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그 평강을 얻고 감사하기 위해서 순례를 행한 것입니다. 본문 7-9절을 다시 봅니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평화라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고 주인이시기에 그런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우리 세인교회의 머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임이 변하지 않는 것을 전제할 때 하나님의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것에 감사하는 교우들이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평화가 과연 무엇이냐? 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두 번째 교훈이자 또 하나의 감사 이유이기도 합니다. 2) 그 교회가 주는 평화는 산 밑의 사람들을 보듬는 평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평화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교훈을 설교 준비 과정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착안하면서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주지했다시피 시편 120-134편의 순례시(巡禮詩)에 등장하는 시인은 성전이 주는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성전에 오르면 영적인 만족,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감동은 단순히 마음의 평강을 얻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통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을 해결 받는 감동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세 제자들이 본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주님의 모습이 변화되신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변화였습니다. 더불어 엘리야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까지 보게 됩니다. 말 그대로 황홀 그 자체였습니다. 베드로는 즉각적으로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여기가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반응이 떨어지자마자 그 황홀한 광경은 사라지고 예수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임합니다. 그 산 위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분명히 공표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산 아래로 내려와 주님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난 기사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신 사건임을 복음서 저자들은 동일하게 밝힙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산 위에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며 교회만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신(新) 귀신들림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수많은 정신병에 노출되어 영적으로 죽어가는 산 아래의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보듬는 일, 그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난 주에 작가 이기주가 쓴 ‘말의 품격’ 을 구입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작가는 글 중에 철학자 헤겔의 말을 하나 인용했는데 마음에 와 닿아 밑줄 그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 있다.” (이기주,‘말의 품격’, p,25) 읽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의 문을 여는 곳은 교회가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문을 열어야 산 밑의 사람들을 찾아갈 수 있고 또 그들을 보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찾아가 보듬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평화입니다. 지난 주일에 서정수집사와 전화로 교제했습니다. 2주 만에 나는 전화였기에 더 애틋하게 전화로 교제했습니다. 전화교제 중에 서 집사님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옥한흠 목사께서 쓰신 ‘고통에는 뜻이 있다.’를 읽었습니다. 김영봉 목사께서 쓰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도 읽었습니다. CS, LEWIS 의 ‘고통의 문제’도 독파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책들을 읽으면서 저에게 온 소회는 위로가 아니라 고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련의 책들을 통해 받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완벽하시다는 점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완벽하시지 않고 조금은 허물어지시는 하나님이시면 좋겠는데 그래서 참 힘듭니다. 근데 결국은 제 믿음이 약한 것이겠지요?” 목회 성상, 30년을 현장에서 있어 왔습니다. 서정수 집사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너무나 뼈저리게 공감하는 목사입니다. 그의 아픔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영적인 안목으로는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 날, 서 집사님과 함께 했던 것은 이론으로 통한 위로가 아니라 함께 부둥켜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믿음이 흔들릴 때, 내 믿음으로 잘 안 될 때, 이강덕 목사가 붙들고 있는 믿음으로라도 함께 가십시다. 장작 나무 같은 옅은 믿음이지만 이 목사가 붙들고 있는 그 믿음이라도 붙들고 함께 가십시다.” 적은소리로 아멘 하는 서 집사님을 안고 울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갑자기 이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로마서 12: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교회는 산 밑의 사람들을 보듬고 달려가기에도 버겁습니다. 왜?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딴 짓하기가 부끄럽습니다. 왜? 교회가 딴 짓할 때 진정한 보듬음의 평화가 필요한 자들이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난 우리 세인교회가 산 밑의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길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제 승용차의 사이드 미러가 접힐 때 소음이 심해 AS를 받기 위해 현대영업소에 들렸습니다. 자동차를 수리하는 동안에 고객들이 쉬는 휴게실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객 여러분, 조금 늦는다고 속상해 하지마세요. 살아가면서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니까요!” 곱씹을수록 명언입니다. 제천 세인교회 교우 여러분! 세인교회는 방향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산 밑에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선포하는 방향성 말입니다. 맥추감사주일 아침, 이 방향성을 고집하며 달려가는 우리 세인교회가 또 하나의 감사 조건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