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35번째 강해) 제목: 내가 아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시는 나 본문: 고린도전서 8:1-13 서론) 서울에 보금자리 주택을 마련하여 서민들의 주택난을 나름 해소하겠다고 서울시에서 행정적인 발표를 했을 때, 서울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강남 3구에서는 극단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싼 아파트가 지역에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상위 계층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기 때문에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정책에 대해 강남 3구는 물론 천당 밑에 분당 지역에 있는 소위 말하는 강남 좌파들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해서 여론들이 이렇게 공격했습니다. 강남 보수보다 더 질 나쁜 종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강남 좌파들이라고. ‘엘리트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에서 이 단어를 찾아보았습니다. “사회는 권력을 가진 자와 이를 가지지 못한 일반대중으로 나뉘며, 소수관료나 저명인사 등 사회지배계급(엘리트)에 의하여 정책문제가 일방적으로 채택된다는 이론으로, 정치적으로 무능한 일반대중을 지배하는 엘리트 중심의 계층적·하향적 통치 질서를 중시한다.” 자본주의를 체계로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탄생하게 되어 있는 하나의 사회적 구조이겠지만 오늘 한국사회에서 이 두 사상은 어떤 때는 인과관계로 서로 긴밀한 협조를 하면서 상생하는 소위 말해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아주 견고한 진을 치고 다른 종류의 부류들이나 생각이 다른 자들의 침범을 용납하지 않는 또 다른 괴물처럼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사회적으로 엘리트주의나 혹은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진 기형의 형태로 존재하는 강남 좌파의 모습들은 수구적,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의 행태를 보이고 있는 대화불능의 집단과 별 다르지 않은 공공의 적입니다. 백번을 양보하여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이러한 구조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조 악이라고 한 발 양보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결코 엘리트주의를 용인하거나 양보하면서 물러설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엘리트주의, 정말로 무서운 암세포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함께 공부해야 하는 본문에서 바울은 이 암세포와 맞서 싸웁니다.
본론) 오늘 본문 8장을 강해한 예일 대학교의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엘리트주의라는 단어를 바로 본문에서 사용합니다. “바울 시대에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나중에 영지주의로 싹터 자라날 씨앗들이 발아되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소위 지식의 소유 여부에 따라 교회를 서로 다른 계급군(階級群)으로 분열시킨 엘리트주의였다.” (현대성서주석, 고린도전서, p,242) 헤이스의 이 해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본문 8장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 중에는 대단한 지식을 소유한 엘리트들이 있었습니다. 이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던 신자들은 바울이 가르쳤던 교리적인 내용을 거의 이해하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교리적인 내용들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것으로만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 즉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본문 4-6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지식층의 사람들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세상에 있는 여타 많은 우상들은 아무런 존재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믿었습니다. 이들은 5절에서 언급했듯이 우상들을 이렇게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많은 신들’(many gods), ‘많은 주들’(many lords) 다시 말해 신과 주를 표현할 때 소문자로, 그리고 복수로 기록했다는 것은 하찮은 존재, 별로 의미를 주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평가절하 한 의도가 있는 표현입니다.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는 자들의 신에 대한 의식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확한 이해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특별히 고기를 먹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바울의 시대 고린도에는 많은 우상 숭배들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의료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아스클레피우스 신전 축제나 아크로고린도 신전에서는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드리는 신전 축제도 성행했고, 남성 신의 심벌인 아폴론 신에게 바치는 제사까지 우상 숭배의 천국과도 같은 지역이 고린도였기에 각 축제에서 벌어진 축제의 잔치 뒤에 이루어진 뒤풀이에서 함께 먹었던 고기들이 당시 지식층에 있었던 고린도교회 엘리트 신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식탐 재료들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들을 먹는 것은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일이었습니다. 헌데 이들의 이런 행태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어떤 문제였습니까? 본문 7-1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바울이 이들의 행태에 소위 말하는 태클을 건 것입니다. 주목할 단어는 9절에 기록된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우상은 아무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신전 축제에 사용된 뒤에 뒤풀이로 함께 먹는 고기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자기들의 지식(그노시스)를 굽히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바울이 반론을 제기한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이 너희들이 행위를 보고 그 행위들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일이라면 그 행위들을 멈추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리처드 헤이스는 이렇게 주석하였습니다. “약한 자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이교도였다가 회심한 이방인들이었기에 그들은 이전에 ‘우상에 관한 습관’을 가진 자들이었다.”(p,247) 무슨 말입니까?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지만 그들의 심리 속에는 항상 그들이 섬겼던 우상들에 대한 흔적과 쓴 뿌리가 있었기에 지식층의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을 봄으로 인해서 다시 그들도 우상제물들을 먹는 그래서 더 믿음이 약해지게 부추기는 너희들의 행태를 중단하라는 바울의 강성 발언이 본문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엘리트의식에 빠져 생각 없이 행하는 우상편의주의를 방관함으로 인해 믿음이 약한 자, 이제 막 고린도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자들이 실족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그노시스)을 아주 교만하게 우리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슬로건으로 내 걸 정도의 자유함이라는 변칙적인 단어로 포장하며 빗질한 고린도교회의 특권 계층의 문제아(問題兒)들을 향한 바울의 비수가 선포된 것입니다. 로마서 8:1-2절을 봅니다. 기막힌 말씀이요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이 이렇게 선포한 정금 같은 말씀의 배경이 무엇입니까? 그 답을 로마서 7:22-25절이 줍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은 항상 싸웠습니다. 두 마음이 법이 마음에서 대적하는 싸움을. 그래서 항상 이 일로 인해 곤고했습니다. 죄의 법이 이길 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음을 토로합니다. 어떻게 하든 죄의 법이 이기지 못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을 우회적으로 토설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곤고함과 실족함으로 더 힘들어짐을 느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괴로움과의 투쟁을 연속하는 과정에 대단히 중요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의 법으로 싸울 때는 도무지 느끼지 못했던 감동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그 정죄함이 사라지는 은혜였습니다. 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내가 그토록 싸워 이기려고 했으나 백전백패하게 했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켜준다는 것을 알았다는 고백이자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부인하는 자는 이단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웬만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은혜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인하지는 않지만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점은 심히 유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니까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적인 굴레에서 해방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나아가 방종 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그노시스적인 신자들처럼.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 했으니까, 그리고 우상들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니까 그것들에게 바쳐진 우상의 고깃덩어리들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야!” “오히려 내가 그 고깃덩어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먹어야 우상들이 별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거야!” 기승전결에 있어서 완벽해 보이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완벽해 보이는 고린도교회의 지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을 같은 지식층에 있었던 바울이 옹호하거나 두둔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질타합니다. 바울은 도대체 어떤 자신감 때문에 이렇게 단호했을까요? 설교를 준비하다가 본문 두 구절에서 벅차오르는 영적 감동이 있었습니다. 먼저 11절입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엘리트주의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이렇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11절을 담임목사의 해석으로 풀겠습니다. “너는 네 지식을 자랑한다. 네 지식이 너무 자랑스러워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너무 대견하게 생각한다. 그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너희들의 말대로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헛것들이다. 그런데 그 헛것들에게 바쳐진 그 음식들을 조금은 뭔가 안다는 너희들이 먹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여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연약한 자들, 그들은 믿음의 기초들이 흔들리고 넘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궁극적으로 믿음을 버리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이기까지 한다. 너희들에게 분명히 전한다. 너희들이 그 알량한 지식, 믿음의 연륜, 교회에서의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는 그 기막힌 일들로 인해 죽어가는 그들은 바로 너희들이 진짜 주로 믿는 예수께서 몸 버려 죽으심으로 건져낸 가장 소중한 영혼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저는 11절의 해석을 글로 정리하다가 목이 메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지금 한국교회의 절망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절망이 드리워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각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절망조차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치부한 암묵적 동의가 한국교회를 휘감고 있다는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13절 마지막 절 본문에서 바울은 선긋기를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이 감동도 엄청난 데 저는 오늘 설교를 총 정리하면서 더 중요하게 다가온 감동의 메시지를 전하고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본문 3절을 봅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이 해석은 헬라어 원문을 아주 충실하게 번역한 빼어난 번역입니다. 원래 이 구절을 오늘의 언어로 편하게 읽으려면 이렇게 의역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원문에서 바울은 아주 의도적으로 주어와 목적어를 바꾸었습니다. 어렵지요? 다시 풀어드리겠습니다. 원문에서 바울이 주어로 번역한 것이 ‘하나님이 아시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목적어로 배치했습니다. 이 내용이 왜 중요한지 아십니까?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일부 지식을 강조하던 자들이 범하고 있는 치명적인 교만을 바울이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저들의 함정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문에서 주어의 역할로 뒤바꾸어 선포한 내용은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 교만함을 질타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많이 하면 할수록 치유 불가의 교만함이 자리 잡게 됩니다. 다 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교만입니다. 아하면 어하고, 어하면 아 한다는 구제불능의 교만입니다. 올곧은 신앙이 무엇입니까? 선포합니다. 설교 제목입니다, ※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교만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에 대한 감동의 겸손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존재하던 일부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던 자들에 비해 지식이 부족했습니까? 바울의 13개의 서신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보수와 진보에 구분 없이 대동소이하게 인정하는 결어가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는 실천신학적인 말씀이라는 결론입니다. 저는 이 말에 대해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바울이 전한 서신들은 신학 작품들입니다. 지성을 무시하지 않은 학문적, 지성적 걸작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이 갖고 있는 또 다른 힘은 그의 신학적 작품들이 단순히 지성적 성찰로 끝나지 않는 실천신학이라는 점입니다. 그 실천신학의 정점 즉 클라이맥스는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은 안다는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에 대한 감동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5:6-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필리핀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책이 있습니다. 강지숙 전도사가 지난 학기 중에 읽은 책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책이라고 선물한 책이었습니다. 기독교윤리학의 대가인 듀크 대학의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가 쓴 ‘한나의 아이’에 보면 하우어워스 교수의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의 이력이 자전적인 수필 형식으로 나지막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가 들었던 이야기 중에 그의 인생을 정하게 해준 오거스테나 대학 호머 교수의 일침을 기억했다고 술회합니다. “사상가가 되려면 반드시 자신의 ‘입장’이 있어야 한다.”(p,124) 지난 한 주간, 필리핀에서, 기도원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지난 30년 동안 ‘입장’이 있었는가? 만에 하나 있었다면 그 입장은 내 입장이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입장이었는가? 그렇게 사유하다가 나름 다시 한 번 새긴 것이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목사로 살아왔는데 목사로 살면서 내 입장 지키겠다고 젊은이들이 곧잘 사용하는 단어를 빌려 언급한다면 하나님께 쪽팔린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제천 세인교회에서 은퇴를 하게 될지 아니면 중도에 사역을 중단하게 될지 나도 모르겠지만 목사로서의 입장은 지키면서 남은 사역을 감당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말입니다. 목사로서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교만이 아닌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에 대한 감동에 만족하는 삶. 이것 하나면 될 것 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