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4일 성령강림주일 설교 제목: 진리 안에 거하자. 본문: 요한복음 14:16-17 서론) 20세기의 예언자로고 불리는 아이든 토저가 쓴 ‘이것이 성령님이다.’ 를 보면 토저가 통찰한 기막힌 성령에 관한 고찰이 등장합니다. “오순절에 임하셨던 사랑의 불이 우리의 지성 안에 거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안전하다.”(p,133) 제가 이 말을 가슴에 담아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조심스럽게 정의한 토저의 갈파가 탁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지성적인 사람들이 모인 그룹의 교회에서는 성령을 받으라는 권고가 매우 부적절한 메시지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오순절 계통의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단체에서 강조하는 정도의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사역이 지성적인 그룹의 측면에서 볼 때 지적이지 않은 광신적인 행위들로 매도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이런 미국의 지성적 교회 그룹에 대하여 토저는 그것에 대한 반향으로 성령 받음의 메시지를 ‘사랑의 불’이라는 단어로 정의한 것에 대하여 저는 아주 의미 있는 통찰이라고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토저의 이 말에 지지를 표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것과정반대되는 경우도 담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 안에 거할 때 안전하다.’는 표현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극단적 보수주의 즉 근본주의에 가까운 교회들 안에서 성령의 사역, 성령의 은사 이해, 성령의 임재 등등의 아주 신비로운 신앙적 체험들로 너무 주관화하여 맘대로 그리고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무지함을 드러내는 경우들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게 방언의 은사 같은 성령의 전적인 열매와 선물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아주 질 나쁜 행위들이 공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교정하는 것은 성령님의 은혜들이 신학적 지성의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갈파로 ‘우리의 지성 안에 거할 때 사랑의 불 즉 성령님의 역사들이 안전하다.’는 갈파의 지적은 아주 시의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은 우리들의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절대적인 것임을 저는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성령 해석이 아니라 균형 잡힌 성령 하나님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오늘 성령 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교우들과 이 관점을 나누어 보려고 본문을 택했습니다. 본론)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지키시기 위해 목요일 저녁 다락방에서 성찬을 나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새 계명을 제정하시는 소위 말하는 ‘다락방 강화’를 진행하신 뒤에 주님이 말씀하신 그 유명한 성령 하나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기사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내가 때가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회귀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갑자기 주군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적지 않게 혼돈스러웠습니다. 아마도 세속적인 계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혼돈스러워 하시는 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는 주님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가 주(主)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단히 중요한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본문이 아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세밀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곁으로’ 의 은혜를 주십니다. 본문 16절을 읽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여기에 기록된 보혜사가 성령 하나님을 의미하는 단어임을 우리 교우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보혜사’라고 번역한 성령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 영어성경의 여러 단어들을 집약해 보면 또 다른 은혜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helper(도우미), advocator(옹호자), comforter(위로해 주는 사람), counselor(상담자) 등등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옆에 있어주는 자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저와 여러분의 도우미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저와 여러분의 옹호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저와 여러분의 위로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저와 여러분의 상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여러분과 제 곁에 있어 주시는 제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크로스웨이 7기에서 공부하고 있는 정성철 형제에게 제가 개인적으로 독서하라고 숙제를 내 준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계에서 기독교 변증학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지성적 도움을 주고 있는 21세기의 C.S 루이스라고 불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가 쓴 ‘기독교 변증’입니다.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특정한 것을 믿으며, 이런 점에서 믿음에는 분명한 내용이 있다.”(p,200) 맥그래스 박사의 통찰 중에 의미가 담겨 있는 지성적 고찰이 보입니다. ‘관계적 믿음’입니다. 이 단어를 주석하다보면 대체적으로 이런 가능성들을 타진하곤 합니다. 일단의 종교에게서 보이는 공통적인 분모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모든 종교에서 신자들은 믿는 대상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싶어 한다는 기본적인 틀이 있다고 말입니다. 저 역시 이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는 달리 우리들이 선택한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색다른 특성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긴밀한 관계를 내가 맺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주군이신 하나님이 맺고 싶어 하신다는 독특함입니다. 맥그래스의 말로 다시 적용해 본다면 관계적 믿음을 갖기 원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기막힌 독특함이 기독교 교리의 정수입니다. 하나님이 맺고 싶어 하시는 관계성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helper(도우미), advocator(옹호자), comforter(위로자), counselor(상담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창세기 28:15절을 보시면 야곱이 형인 에서를 피해 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아주 먼 길을 택한 것입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야곱이 가는 길은 외롭고 힘들고 지칠 수 있는 노정이었습니다. 이렇게 길을 가던 야곱이 하란의 한 지역에서 피곤하여 노숙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야곱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형의 축복권을 치사하게 빼앗아 도망가는 야곱이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그가 가는 길을 따라가시면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을까? 라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분석할 수 있겠지만 그 야곱이 바로 나라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이 나라면 그 때 나를 찾아오셔서 관계성을 회복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곁에 계셔주시는 은혜라고.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은혜를 주시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그냥 은혜가 아니고 아주 값비싼 은혜입니다. ‘곁으로’의 은혜를 그래서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회퍼는 고통 곁에서 떠나지 않는, 고통 곁으로 다가가는 삶을 ‘값비싼 은혜’(the expensive grace)라고 불렀다.”(김응교, ‘곁으로’,p,44.)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 를 보면 마지막 부분에 코바르스키라는 가톨릭 수사가 독일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가스실로 이동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목전에 둔 코바르스키는 평생 하나님께 헌신한 수사였지만 두려움에 떨며 가스실로 이동하는 동안 바지에 오줌을 쌉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죽음의 장소에 있었던 한 증인이 본 증언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또 한 사람의 그림자였습니다. 작가 엔도 슈사쿠는 이렇게 그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도 오줌을 싸며 비틀거리며 코바르스키 곁에서 함께 따라갔다.” 작가의 상상력은 그 다음의 글로 이 사람이 누군지를 밝힙니다. 예수와 함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 한 명의 이야기를. 그 죄수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천국에 가면 잊지 말아 주시오.” 예수는 곧바로 응대했다. “언제나…그대 옆에…내가 있겠다.”(p,382) “You will be in paradise with me.” 저는 이 구절을 접할 때 ‘with me’ 라는 이 단어가 얼마나 은혜로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성령님은 내가 곤고할 때, 내가 죽게 되었을 때,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내 옆에서, 나와 함께, 내 곁에서 helper(도우미), advocator(옹호자), comforter(위로해 주는 사람), counselor(상담자)가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 강림주일 아침, 이 은혜가 내 은혜가 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두 번째의 은혜에 접근하려고 합니다. 이 ‘곁으로’ 은혜를 체휼하고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이 꼭 해야 하는 신앙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 진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을 읽겠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대변합니다. 예수께서 대신 보내실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영이라고. 여기에 기록된 ‘진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알리데이아’는 아주 가끔 ‘본질’이라고도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대입한다면 성령님은 본질의 영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저는 이 번역을 좋아합니다. 진리가 곧 본질이라는 것을 수용한다면 이렇게 정의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 인에 거하는 것은 곧 본질 안에 거하는 것이다.’ 어제 새벽에 시편 73편을 읽었습니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노래이자 시입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에 궁정 성가대의 대장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절정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즈음이야 성가대원들 중에 엉터리 신앙인들이 허다하지만 다윗 시대의 궁정 성가대원들은 정말로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역사서를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삽이 그 성가대원들의 수장이었으니 그의 신앙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정도로 그는 절정의 신앙을 갖고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아삽이 아무리 그런 신앙의 절정에 있었다 하더라도 나약한 인간이었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던 것으로 시편 73편은 보고합니다. 악인들의 형통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삽은 갈등 정도가 아니라 넘어질 뻔 했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73:2-9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무슨 말입니까? 악인들이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데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라는 말이냐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삽이 이렇게 뿔나서 대들던 노를 사그라트리고 다시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는 고백이 시편 73:17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새벽에 이 말씀이 큰 말씀으로 저에게 스쳤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왜 저에게 이 말씀이 벼락처럼 다가왔을까요? 오늘 설교의 프레임 때문이었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은 비진리(非眞理)의 테두리에 있는 것입니다. 반면 진리의 테두리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온 아삽은 악인들의 형통함이 부러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악인들의 형통함 때문에 넘어지고 미끄러질 일이 아님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반면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악인들에게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인데 그 깨달음이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갈 때 가능했다는 아삽의 이 고백이 오늘 설교를 전하고 듣는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하게 다가와야 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가는 것이 곧 진리 안에 들어서는 것이며, 본질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코 태생의 저명한 작가인 밀란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보면 제 4의 주인공인 프란츠의 이런 독백이 있습니다.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담벼락을 제거하는 것이다.” (p,187) 저는 프란츠의 이 독백을 오늘 설교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은 사적인 것투성이의 비 본질로 막혀 있는 내 자아의 담을 허물고 오늘도 공개적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 본질이신 성령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구절 중에 요한복음 8:32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을 학훈(學訓)으로 삼는 학교가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입니다. 제가 공부할 때 무슨 부적처럼 줄곧 연대생들이 외우고 다닐 정도로 회자시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과 매치하여 다시 선포하면 이런 말씀이 될 것입니다. “성령을 알지니 성령께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말은 본질적인 죄의 자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은혜 안에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는 복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학훈으로 삼는 대학에서 축제 때마다 상업주의가 판을 쳐서 캠퍼스를 세속적인 난장으로 만드는 기막힌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연예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대학이 변질되고, 퀴어 축제의 온상이 되고, 신촌의 사거리는 음란과 술판의 천지가 되고,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가하다는 소설 속의 메시지처럼 바로 그런 무법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돌변하는 것을 수차례 목격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방종으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은혜 안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본질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진리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신촌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젊은이들보다 확연히 느린 속도고 걷고 있었는데 두 분이 한 발 한 발 내 딛는 걸음새가 꽤 묘하게 보였다. 난 유심히 살펴보았다. 키가 큰 할아버지는 키가 작은 할머니가 두 걸음 정도 내딛는 모습을 확인 한 뒤 찬찬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다리를 저는 할머니를 위해 미묘한 타이밍으로 보조를 맞추는 듯 했다. 노부부의 모습에 가슴 한쪽이 아릿해졌다. 별안간 나는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상대보다 앞서 한 걸으면서 손목을 끌어당기는 사랑도 가치가 있지만, 한 발 한 발 보조를 맞춰가며 뒤에서 따라가는 사랑이야말로 애틋하기 그지없다고, 아름답다고.”(pp,229-230)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에 나오는 따뜻한 글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 글을 끄집어낸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진리이시고 본질이신 성령 하나님은 나를 어떤 때는 앞에서, 또 어떤 때는 뒤에서 발 맞추시며 내 곁에서 나를 돕고, 응원하시고, 위로하시며, 상담해 주시는 인격의 하나님이심을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주일 아침, 진리이신 성령님 안에 거하는 결단이 있기 바랍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내 여호와라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