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부르신 그대로
본문: 고린도전서 7:17-24
서론)
지난 목요일 경향신문에 ‘역사상 가장 기묘한 조합’이라는 제하로 프란체스코 교황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만남을 스케치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왜 기묘한 조합이라고 진단했을까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본 사람과 사람을 물건으로 본 사람 같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하여 거대한 담을 세우겠다고 한 본인의 공약을 주저 없이 실천하는 명령서에 서명하였습니다.
이 일을 아주 질 나쁜 일이라고 판단한 교황은 “다리를 놓지 않고 벽을 새울 생각만 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라고 비난한 적이 있으니 여론이 이렇게 특필할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저는 말할 것도 없이 프란체스코 교황의 발언에 100% 동의하며 지지하는 목사입니다.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똑같은 하늘 아래에서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같이 삼시 세 끼를 먹는 인간인데 어찌 이렇게 생각이 다를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이런 차이를 갖게 된 것일까?
자문을 하다가 또 의미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자답해보았습니다.
시각의 질적 차이다.
무슨 말인지 아마도 설명이 필요하실 것입니다.
교황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반면 트럼프는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난민 성격의 이민자들을 미국 경제를 좀 먹는 벌레라고 규정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분명 시각의 질적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각의 차이는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질문의 답을 어쩔 수 없이 가장 종교적인 언어로 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앎과 삶의 합일과 합일하지 않음”입니다.
교황은 성서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앎을 삶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태도를 지닌 것이고, 트럼프는 그 반대의 경우에서 오는 차이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저는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약삭빠른 내 삶이 아둔해지기로 결단하는 삶이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또 다른 촌철살인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글의 출처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기석 목사의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들음과 행함, 아는 것과 살아 내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어야 한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앎은, 특히 종교적 앎은 교만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p,101)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세인지체들도 육비에 밑줄을 그어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의 척도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처음 마음으로 귀착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초심의 관점으로 다시 내 시각을 곧추 세우는 작업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여러 차례 반복하여 언급한 문구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17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절)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22절 전반절)
“부르심을 받은 자는”(22절 후반절)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24절)
이 구절들을 왜 바울이 반복하고 있을까요?
지금부터 본문 주석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1-16절까지 지난 주일 설교 본문의 테제는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과 이혼관이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갑자기 결혼과 이혼에 대한 연계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완전히 다른 기사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본문 구조를 클럽 샌드위치 구조라고 해석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1-16절의 기사는 오늘 본문 텍스트인 17-24절을 건너뛰어 25-40절까지의 텍스트로 연결되는 구조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25-40절까지의 기사에서 바울은 아직은 미혼 여성들을 위한 권면과 이미 결혼한 여성과 과부들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연관이 되면 이해가 쉬운데 오늘 본문은 전혀 생뚱맞은 내용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두 가지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⓵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구조 (18-19절)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② 종과 자유인의 구조(21-22절)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먼저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구조를 분석해 보십시다.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수신자는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자들인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방의 땅입니다.
이 말은 이 지역에는 당연히 할례를 받은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더 많이 존재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다 보니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이 헤게모니를 갖고 고린도교회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고린도에 산재해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었을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고린도는 공중 목욕 문화가 발달한 곳이었기에 목욕탕 안에 들어가면 한 눈으로 이 사람이 유대인인지 아니면 비 유대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누군가가 유대인으로 공증되면 고린도교회 안에서 상대적인 박탈을 당하는 불이익 때문에 할례를 숨기려고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과는 정 반대의 현상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라디아 교회는 도리어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할례주의자들 즉 유대적인 성향이 아주 농후한 자들로 인하여 적지 않은 내분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구원의 완성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거짓 복음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를 흔들어 놓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거짓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은밀하게 할례 유용론에 빠져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반대입니다.
유대인들이 어려서 받은 할례를 숨기려는 분위기가 고린도교회 안에 팽배했다는 점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고린도 교회의 주류들에게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는 뭐 그런 몸부림 정도일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종과 자유자에 대한 의미 해석입니다.
종으로 번역된 ‘둘로스’는 노예입니다.
노예라는 신분은 고대나 지금이나 기분 나쁜 단어입니다.
가끔 신문 방송을 통해 현대판 노예로 지낸 사람들이 고발 프로그램들을 통해 속속히 파헤쳐지면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은 분노하지 않습니까?
인권 말살이라는 차원에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는 노예제도가 인정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법적인 차원에서 볼 때 노예를 부리던 자들은 아무런 죄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예 된 자 입장에서는 고대이든 현대이든 노예의 신분은 벗어나고 싶은 그 자체일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바울의 지침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21절을 학자들 간의 첨예한 논쟁 구절입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이 구절이 왜 첨예한 논쟁의 구절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원문 해석의 차이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개역 개정판에 앞에 전술한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사실은 두 가지의 번역이 원문으로 가능합니다.
첫 번째의 경우입니다.
“당신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하더라도 당신의 현재 상태를 더 잘 활용하십시오. (NRSV 번역)
두 번째의 경우입니다.
“당신이 부르심을 입었을 때 노예의 상태였습니까? 그에 대하여 너무 괘념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만일 자유를 얻을 기회가 온다면 그것을 취하십시오.” (RSV, NIV, NEB 번역)
전자도 해석이 가능하고, 후자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전자로 해석하면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하라는 메시지이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메시지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후자의 경우를 지지한다면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바울이 노예제를 지지하고 노예를 가지고 있는 기득권 계층의 부유한 자들을 옹호한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노예옹호론자였는가? 에 대한 답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권의 온화한 학자들의 해석을 덧붙임으로 이 질문에 답을 해 보려고 합니다.
만에 하나 바울이 후자의 경우처럼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지침으로 21절을 말했다면 바울은 이 관점을 염두 해 두었다는 포석입니다.
급진적 종말의식입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전후서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바울 신학이 무엇이었습니까?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재림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절을 읽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그러기에 바울은 노예 신분의 유지나 벗어남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해석입니다.
바울의 주된 관점은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주 예수의 재림을 통한 임박한 심판이 그에게는 더 큰 그림이었기에 노예라는 신분에서 그렇게 벗어나려고 하지 말라 권고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시면 그 때는 온전한 자유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차원을 해석할 때 앞에서 언급한 할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할례 받은 것을 숨기려는 것이나 아니면 할례를 받은 것에 대한 비본질적인 내용에 대하여 설왕설래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방점을 찍고 싶어 했던 가장 중요한 영적 교훈이 무엇이었겠습니까?
★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의 그 초심의 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읽어 보십시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할례, 무할례를 가지고 정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어지는 본문 22절도 매의 눈으로 해석해 보십시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사람의 종이든, 아니면 종이 아닌 자유자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바울의 선언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의 선언적 의미를 깊이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원론적인 문제 제기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유자와 노예, 그리고 할례자와 무할례자를 논하면서 그것의 헛헛함에 목매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반복적 문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르신 대로”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부르심을 받은 자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24절)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권면합니다.
무슨 교훈입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주님이 부르셨을 때의 처음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첫 소명, 첫 사랑, 첫 마음으로의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5월 둘째 주에 아들이 어버이주일 주간이라고 해서 제천에 내려왔습니다.
마침 경로잔치 답사를 가야 하는 사역이 있어서 같이 동행했습니다.
월요일 답사를 가는 차 안에서 인원이 많을 경우를 생각해서 이번에는 25인승 버스를 한 대 대여하는 것이 예산 절약으로 긍정적일 것 같아서 고승우 전도사에게 전화를 걸어 25인승 콤비 대여에 대하여 알아보고 보고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고 전도사와 전화를 마치자마자 아들의 속사포 같은 비토가 이어졌습니다.
내용인 즉은 교역자 휴무인 날인 월요일에 부교역자한테 일을 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자기가 시무하는 교회의 담임목사한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저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쏟아 댔습니다.
월요일에 부교역자에게 일을 시키는 담임목사는 갑 질을 하는 담임목사라는 등, 부교역자들이 대학원을 다니는 데 새벽예배는 알아서 빼줘야 한다는 등등 날을 잡아 자기 교회 담임목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들에게는 영원한 을(乙)인 지 에비에게 공격한 것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조금은 억울했습니다.
월요일에 일시키는 담임목사는 갑 질 하는 목사고, 월요일에 답사를 하기 위해 일하는 담임목사는 그럼 뭐지?
전담 사역자들에게 M-DIV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공부와 사역을 병행하게 해주는 목사가 세인교회 목사 말고 또 있나?
억울했지만 아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다시 한 번 아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다시 한 번 곧추 세워본 일들이 있었습니다.
1981년 6월 21일에 인천 송림교회 지하 기도실로 벌레만도 못한 이강덕이라는 죄인을 찾아오셔서 히브리서 9:12절을 들려주시며 너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해주었다고 선포하시면서 내가 너를 통해 일하고 싶다고 손 내미신 주님의 그 따뜻한 음성을 들었을 때 흘렸던 그 눈물을 나는 아직 간직하고 있는 지, 1992년 4월 30일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하나님께 다짐했던 세 가지, 사람에게 무릎을 꿇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목사, 절대로 교회 정치에 기웃거리지 않는 목사,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돈(물질)에 굴복하지 않는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그 초심이 25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나를 부르셨던 그 주님은 여전히 그 주님이신데 그 주님께 드렸던 나의 첫 사랑의 눈물과 다짐이 나에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가? 다시 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토라(율법)를 배우고도 토라로 괴롭지 않은 자, 죄를 짓고도 자신을 용서하는 자, 어제 기도하였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 – 가장 나쁜 악당도 그 사람보다 낫다!” (P,208)
지난 주간 읽은 마틴 부버의 ‘열 계단’에서 벼락같이 받은 금언입니다.
왜 이들이 가장 나쁜 악당보다 더 질 나쁜 자들일까를 곰곰이 씹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초심을 잃은 습관적인 신앙의 변질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를 부르신 방법은 각자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르실 때의 첫 감격을 결코 상실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성도 된 자의 겸손함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부르신 곳에서
따스한 성령님 마음으로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만족함을 느끼네
사랑과 진리의 한줄기 빛 보네
내 몸을 감싸며 주어지는 평안함
그 사랑을 느끼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 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 곳에서 예배하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