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주일 낮 설교 (고린도전서 31번째 강해) 제목: 박물관에서나 볼 것 같은 본문: 고린도전서 7:1-16 서론) 교회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 중에 가장 두드러진 내용은 배타적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하지 않는다는 독선이 바로 공격의 제일 원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잘 아는 일 중에 여리고성 정복을 위해 행했던 6일 동안의 여리고성 돌기가 있습니다. 더불어 제 7일이 되는 날에는 7번을 돌았던 그래서 마침내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점령한 여호수아 6장의 기사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슴 벅찬 감정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이 승리의 벅참으로 교회 공동체에서 종종 행해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소위 말하는 ‘땅 밟기’ 사역입니다. 해서 아주 근본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선교단체는 공격적으로 불교 사찰에 들어가서 탑돌이를 하면서 찬송을 부른다든지, 사찰 공터에서 통성기도를 한다든지 등등의 일들을 자행하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이런 일들이 너무나도 당연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강령으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보다 조금 더 과격한 행동주의자들은 불교의 가장 숭고한 대상인 불상들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범법 행위까지도 신앙의 이름으로 불사한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런 방식의 과격한 행동들은 수구적 형태의 근본주의 교회에서 영웅시되었고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군사들처럼 추앙되어 타종교에게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공공연히 이용되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세상에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점입니다.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막스 밀러가 행했던 갈파는 기독교회가 배타적인 길로 갈 때마다 비기독교인들 중에 지성 그룹에 속한 자들이 맹공 하는 황금율과 같은 메시지로 사용됩니다.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것이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권에서 교회를 섬긴 목사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교회가 추구하고 지향해야 하는 복음의 마지노선에 대한 분명한 설정을 하고 달려온 목회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입니다. 그러므로 저 역시 타종교 사람들의 입장에서 비판하자면 배타주의와 독선주의 오만에 사로잡힌 구제불능의 목사라고 공격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들의 반응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뭐, 어쩔 수 없죠.”입니다. 그러나 차제에 우리 세인교회 지체들에게 한 가지는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가 물리적으로 승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조금 어렵습니까? 난 교회가 세속적인 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권력의 상층부에 있어서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며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난 교회가 엄청나게 쌓아놓은 물질의 힘으로 영혼을 사고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난 교회가 세속적으로 성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난 교회가 십자군 전쟁으로 이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역설이지만 교회가 약했으면 좋겠습니다. ‘침묵’으로 유명한 엔도 슈사쿠의 소설 중에 ‘사해 부근에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 엔도가 천재인 줄 알았습니다. 이유는 성경을 뒤집어 보는 혜안을 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회출신의 성서학자인 ‘도다’와 그의 친구인 ‘나’는 오랜만에 만나 사해 부근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을 추적합니다. 이 플롯 형식의 소설로 전개되는 이 책에서 가장 의미 있게 제가 받았던 충격은 엔도가 표현한 예수님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가 소설을 통해 피력하고자 했던 예수님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자, 하나님의 신성을 가진 기적을 일으키는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존재로 나타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과 능력을 요구할 때 아무런 신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들에게 비아냥을 당하고, 비토를 당하고, 심지어는 우리 땅에서 꺼지라는 수모도 당합니다. 그러나 사해부근에서의 예수는 그들을 떠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들 곁에서 가장 친근한 자로 남아 있습니다. 이사야 53:2절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마치 예언자의 이 묘사와 너무나도 흡사한 예수를 사해부근에서 엔도 슈사쿠는 그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접할 때 받았던 충격이자 감동은 이렇게 묘사된 예수를 보면서 엔도 슈사쿠의 묘사가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더 따뜻한 예수님으로 다가왔다는 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혹시 너무 많은 힘을 가진 것은 아닐까, 오늘 우리 교회는 세속적 가치들보다 더 무소불위의 막강 파워를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유감스러움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지난 주간 출신교회 목회자 모임이 있었습니다. 대화중에 한 후배가 이런 이야기를 던졌습니다. 본인이 시무하는 교회가 지방 대형교회로 유명한 교회인데 그 교회는 위치해 있는 도시를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저에게는 몹시 거슬렸습니다. 단적인 예로 후배가 섬기고 있는 도시는 전형적인 야도(野都)이기에 지금의 자유 한국당 후보자는 당선을 꿈도 못 꾸는 그런 지역인데 지난 국회의원 선거 때 유일하게 그 정당의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가 몰아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복이 아니라 끔찍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정당하지 않은 일이라도 교회가 마음만 먹으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교회가 할 일입니까? 지금 담임목사가 역설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교회다움입니다. 교회의 본질의 사수화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해석을 통해 교회가 잘못하면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을 추적하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정체성을 밝혀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주후 1세기 고린도교회라는 시대적 배경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미리 전제합니다. 깊이 성찰하지 않고 주마간산식의 스쳐지나가는 글로 본문을 읽으면 결혼한 부부들의 결혼 생활관에 대한 이야기 정도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생각보다 조금 복잡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내용 중에 우리들이 이미 습관적으로 알고 있는 이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입니다. ① 부부는 기도하기 위한 시간 외에는 분방하지 말라. (5절) ② 정욕을 참지 못하거든 결혼하는 것이 독신으로 있는 것보다 낫다. (9절) ③ 이혼은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곤 하지 말라. (10절) ④ 그 한 가지 경우란 불신자와 결혼을 한 경우인데 결혼 후에도 믿지 않거든 갈라서라 (15절) 문자적으로 본문을 이해하면 이 정도로 간주하고 지나칠 수 있는 텍스트가 본문입니다. 위에 열거한 내용들을 전제할 때 알게 되는 지식은 대충 얼버무려 주후 1세기 이방 그리스도 공동체의 결혼에 대한 지침들 중에는 적어도 이 정도의 선은 지켜야 하는 룰이 존재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해는 조금 더 심오한 해석을 요합니다. 접근해 보겠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우리들이 이미 살핀 대로 음행이 만연했던 공동체였습니다. 오늘의 시각을 이해한다면 음행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주후 53-55년이라는 이 편지가 작성될 즈음의 고린도는 음행이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높은 윤리적 가치를 동반해야 하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도리어 전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살폈지만 정욕에 불타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일이 과부를 돌보는 일로 인정받을 정도로 인식되는 상태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 남편들이 이미 결혼한 아내와 분방을 하거나 심지어는 이혼을 밥 먹는 듯이 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고 심지어는 이혼이 남성들의 전유물로 악용되는 기막힌 현실이 고린도 지방의 상례였습니다. 이런 질 나쁜 일들이 고린도교회 안에도 팽배했습니다. 이런 사회적 상태를 알고 있었던 바울은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성윤리 혹은 결혼 윤리에 대한 지침을 내리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일부일처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 제시 구절입니다. 그런 뒤에 바울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본문 3-4절을 봅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적어도 결혼을 한 기혼 남성과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부부 의무에 대하여 바울은 아주 선명한 어조로 못 박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부부 의무를 천명한 바울은 이것을 전제로 분방 금지를 선포한 것이 그 유명한 본문 5절입니다. 이렇게 결혼관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제시한 바울은 그만의 독특한 신학적 어조로 독신의 은사를 지지합니다. ‘정욕을 억제할 수만 있다면’ 이라는 전제로 제시한 것입니다.(8-9절) 그런데 여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결혼관에 대한 입장을 제시한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결혼에 관한 본인의 신학적인 주장을 내놓습니다. 11-16절 마지막 절까지의 담론입니다. 바울의 대 전제는 결혼한 남녀는 이혼을 금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은 예수께서 이미 천명하셨던 이혼 금지 대 명령(마가복음 10:1-7)을 받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혼 금지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은 남녀 공히 동일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세밀하게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혼을 금지한 전제는 같은 믿음으로 묶어진 부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는 편(偏)믿음의 부부에게도 적용되는 권고였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남편은 믿고, 아내는 믿지 않은 상태, 혹은 아내는 믿고 남편은 믿지 않은 상태에서의 불협화음이 있어도 이혼은 불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로 제시한 본문이 오늘 본문 마지막 16절입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요즈음의 언어로 말하면 이렇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참고 살면서 불신자 아내, 불신자 남편을 구원하려고 노력해 보거라. 누가 아는가? 당신을 통해 믿지 않던 상대방이 믿게 될는지.” 사람이 악합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하거나 악용하는 경우에서 그렇습니다. 이 구절이 불신자 남편과 아내와 결혼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구절로 오용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성경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왜 목사님은 내 자녀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느냐고 대듭니다. 반드시 믿지 않는 내 반려자를 구원시키겠다고 항변합니다. 이럴 때는 대화불가입니다. 본문의 경우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라는 이미 성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공동체를 향한 추스름에 목적을 둔 메시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다시 본문을 추적합니다. 부득불 이런 고린도교회의 비정상적인 일들이 다반사로 발생하는 비상 상황에 직면한 바울이 이혼 불가 방침을 선포하였지만 눈에 띠는 한 대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15절을 주목하십시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구절입니다. 이혼 불가라는 분명한 방침을 제시한 바울이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선 느낌을 주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라서라는 말이 당황스럽습니다. 이 정도로 멈추지 않고 강력하게 쐐기를 박는 것 같은 마침표와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이혼을 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병 주고 약주는 것 같기도 하고, 앞 절과 전혀 상반된 모순된 말을 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15절의 의미를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바울의 이혼 금지 선언과 매치를 시킬 수 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1세기 초기 교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인 김판임 교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김 교수의 이 대목의 주석과 지론을 받아들인 것은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김판임 교수는 15절의 본문 주석을 고린도전서 6:11절의 말씀과 접목시키는 탁월한 해석을 합니다. 설명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6:11절을 소개합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에 기록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김 교수는 이 구절에 기록된 ‘씻음(아폴루오)’, ‘거룩함(하기아조)’, ‘의롭다하심(디카이오오)’는 유대교의 정결 예식 형태에서 사용하던 단어들임을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단어들은 세례 예식에 참여한 자들에게 부여되던 상용어라는 것입니다. 쉽게 다시 설명합니다. 본문 15절에 기록된 ‘믿지 않는 자’는 고린도전서 6:11절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를 받지 않은 자’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21세기라는 시공간과 주후 1세기라는 시공간의 갭을 줄일 때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공범 중에 한 명이라 할 말 없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해석하겠습니다. 21세기 제천 세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왜요? 이 중에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① 교회 출석 1년이 되어서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라니까 얼떨결에 받은 경우. ② 세례를 받게 해서 교회에 정착하게 한 경우. ③ 물세례를 받게 한 뒤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성령 세례를 받을 것을 기대하고 받은 경우. ④ 세례를 받아야 교회의 정회원이 되고 직분을 받을 수 있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세례를 받은 경우. 그러나 주후 1세기의 세례자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한 가지 사실로 증명됩니다. 누가 세례를 받을 수 있었는가? 순교적인 믿음이 있다고 공동체가 인정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도식이 그려집니다.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 결혼 전에는 세례자들이 아닌 상태에서 결혼을 했는데 이후 세례를 받은 경우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 이후 ‘씻음(아폴루오)’, ‘거룩함(하기아조)’, ‘의롭다하심(디카이오오)’의 경험자가 되어 새로운 영적 삶을 살게 된 부부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 세례대상자일 경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아내가 세례 대상자일 경우에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는 점입니다. 주후 1세기에 이스라엘은 물론 소아시아의 사회적 정황은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구조의 사회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남편의 변화는 곧 가정의 변화였습니다. 사도행전 16:31절을 아시지요?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자살하려던 빌립보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에게 바울이 전한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이 말이 가능합니까? 간수장 한 명이 주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집안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주지했다시피 가부장 사회에서 가장의 변화는 가정의 변화였기에 가능한 말입니다. 헌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아내가 세례를 받은 경우입니다.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마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촌스러움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결혼한 기혼 여자가 세례를 받았는데 남편은 이전 그대로입니다. 이럴 경우, 고린도교회 성도 가정 공동체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 것은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요구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유를 김판임 교수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세례신학에 의해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가진 여자가 거룩하여진 몸 즉 성령을 받은 몸인데, 그렇지 못한 남편과의 성생활을 함으로서 다시 더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혼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바울이 표한 지적이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P,84) 주석을 통하여 얻는 이해는 바울이 여성의 영적인 인권을 수용했다는 점입니다. 아주 특별한 예이기는 하지만 바울은 여성의 관점에서 남편의 거룩해짐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여 여성의 이혼권리를 보장하라는 바울만의 독특한 관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본문에 얽혀 있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성서 주석을 진행했습니다. 이상의 주석을 통해 이제 오늘 가정의 달 세 번째 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교우들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전제할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주석한 내용을 21세기의 현 상황에 맞추어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과유불급이라는 점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사회적 구조도 다른 대한민국에서 주후 1세기 고린도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결혼과 이혼에 대한 성서적 담론을 그대로 주입한다는 것은 무리수 천만입니다. 해서 바울이 주장하는 이혼의 권리 역시 그대로 우리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측면의 신앙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만큼은 욕심을 내려합니다. ●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신앙적 순결성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후 1세기 고린도 지역은 남성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극단적인 예외로 인정했지만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였습니다. 앞에서 저는 고린도가 남성 중심적 구조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모든 권리 구조가 남성 편의적으로 합법화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부부가 이혼을 하면 위자료, 위로금 심지어는 재산 분할에 있어서도 정확한 잣대로 나누는 시대이지만 고린도는 여성이 이혼을 할 경우 곧바로 들이닥치는 것이 생활고였습니다. 아무런 재산상의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혼한 여성은 잘못하면 굶어죽을 수도 있는 사회상이 고린도였습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고린도전서 11장의 성경적 내증 중에는 이 시대 이혼한 여성들의 아사(餓死)를 염려하는 근거로 추론되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0-22절을 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교회는 매일 저녁 만찬을 식탁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이 만찬은 애찬이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마음껏 먹는 만찬이었습니다. 이혼한 여성들이 하루에 한 끼만을 먹더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평상적인 가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고 이곳에 빌붙어 음식을 축내고 배를 불렸습니다. 이론 인하여 굶주리고 있는 여성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비겁하고 야비한 그들을 향하여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맹공하고 있습니다. “가정이 있는 인간들은 교회 공동체의 식사를 축내지 말고 집에 가서 먹으라”고. 듣고 보니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이혼한 여성들의 기구한 삶이 보이십니까? 이혼한 여성들의 질곡의 가련함이 보이십니까? 오로지 신앙의 순결성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그들이 당하는 고난과 아픔이 보이십니까? 아사를 무릅쓰고 신앙 없는 남편과의 결별을 선언한 고린도교회의 일부 여성들을 보면서 어떤 감회가 드십니까? 일종의 이런 연민이 드십니까? “뭘 그렇게까지 하지!” “좋은 게 좋은 건데, 왜 사서 고생하지!” “본인들이 사서 고생하는 건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뭐!” “신앙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 유별나게 믿지!” “지금이야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어, 별난 거야 별난 거.” 세례를 받지 못한 남편과 부부생활을 하게 되면 나는 다시 더러운 자로 오염될 수 있어서 그러느니 아사의 고통이 엄습하는 아픔이 있겠지만 차라리 이혼하여 순결하게 살겠다는 고린도교회의 여성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상황임을 왜 제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참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지금 시대에는 박물관에 가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박물관 신앙인이 오늘따라 담임목사는 눈물겹게 그리워지니 말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벳세다에 모인 20,000명의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200데나리온의 물질이 필요하다고 정확하게 예측한 빌립보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군중 속을 헤집고 다니며 발품을 팔았던 안드레가 더 보고 싶으니 말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라는 레떼르를 변질시켜 방종하며 막 살고 있음에도 자랑스러워하는 현대 종교인들보다 새벽에 나와 눈물로 자아를 성찰하며 바닥을 적시는 무식한 신앙인이 더 그리워지니 말입니다. 기독교윤리신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는 그의 역작인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에서 오늘을 사는 계산적 종교인들을 향한 기막힌 갈파를 던졌습니다. “합리화된 형태의 종교는 보통 사람들보다 의무를 최고의 덕의 표현으로 선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충동에다가 도덕적인 탁월성을 주기보다 모든 충동을 이성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 그들 보기에는 더 덕스럽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p,266) 합리화된 종교의 도그마만을 인정하고 추구하려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은 오늘, 사해 바다 부근에서 등장하는 나약한 예수를 따르는 힘없는 그러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종자라고 놀림을 당하는 그런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보고 싶고 나 또한 그런 박물관 신앙을 가진 목사가 되고 싶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내 자화상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출처를 몰라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읽으며 너무 감동의 되어 마음의 여백에 밑줄 그어놓은 글을 소개하고 설교를 접으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약삭빠른 내 삶이 아둔해지기로 결단하는 삶이다.” 아주 오래 전에 숀 레비 감독의 ‘박물관이 살아있다’를 아주 흥미 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갑자기 설교를 마감하면서 영화의 흥미진진했던 내용들이 오버랩되었습니다. 박물관 신앙, 21세기에 촌스럽기 그지없는 시대착오적인 폐기물 신앙이라고 치부됩니다. 헌데 이상하게도 싸늘한 신 사사시대인 작금의 랜덤 시대에 박물관 신앙인들이 다시 움직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의미로 박물관 신앙이야 말로 우리들이 목적해야 할 순결한 신앙의 목적지일 테니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