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 끊을 수 없는 것 본문 : 로마서 8:35-39 서론) 오늘은 대중가요이지만 노랫말 자체에서 참 많은 의미를 주는 노래를 한 곡 감상하고 설교를 이어가겠습니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감상) 들으시고 난 뒤의 느낌들이 어떠신지요? 여러분의 이야기처럼 들리셨습니까? 웬만한 감성을 소유하셨다면 아마도 ‘그렇다.’ 는 생각은 거의 동일하실 것입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드셨을까요? 평생을 함께 한 부부의 진솔한 사랑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남녀가 연애를 한 뒤, 결혼을 했습니다. 연애 감정이 담보된 사랑은 그 시절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결혼을 해서 아들딸 낳고 30년 이상을 살고 난 뒤의 노부부의 사랑의 감정이 연애초기의 감정적인 사랑과 동일하다면 그건 아마도 거짓일 것입니다. ‘어느 60대 부부의 이야기’는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느 60 부부의 사랑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60부부의 사랑이야기가 결혼 초기 부부의 사랑이야기보다 더 깊이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사랑 안에 삶이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의 이야기가 담보되어 있는 사랑 이야기, 아마도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사랑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사랑이라는 단어에도 ‘아가페’ 단어를 성경이 붙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사랑 역시 조건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성경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사랑에게만 붙일 수 있는 사랑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발언이 바울을 통해 언급되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추적해 보십시다.
본론) 바울은 로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로마교회 지체들에게 이런 글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주목할 두 구절을 먼저 살피겠습니다. 35절과 39절입니다. 먼저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어 39절도 읽겠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구절의 통상적인 이해는 이런 이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높음, 깊음, 다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다는 해석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도 문맥을 크게 헤치지 않는 선에서 큰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문법상으로 정확하게 해석을 한다면 이 해석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입니까? 사랑의 주체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35,39절을 어법에 따라 해석한다면 위의 해석은 오류가 있습니다. 35,39절의 해석은 이것이 맞습니다. 앞에서 열거한 10가지의 상대들이라고 하더라도 편지를 쓰고 있는 발신자 바울과 이 편지를 받게 될 수신자 로마교회 안에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끊을 수 없다가 적확한 주석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바울과 로마교회 성도들이며 사랑을 받은 객체가 하나님과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제껏 들었던 통상적인 해석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라 조금은 놀랍겠지만 본문 35,39절의 해석은 이것이 맞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심각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해석대로 바울과 로마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오늘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가페의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 말입니다. 이 답을 말하기 위해 성경의 인물 한 명을 끄집어낸다면 베드로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주님을 아가페로 사랑하는 것 실패했습니까? 승리했습니까?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범인(凡人)이 어떻게 주님을 아가페로 사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결론적으로 확답하자면 언감생심입니다. 불가능 그 자체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철저하게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공터에서’라는 소설을 완독했습니다. 작가 김훈은 ‘공터에서’ 소설 속의 주인공인 마차세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주인공이 아내에게 말하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아버지 곁에 묻지 말라고”(P,307) 주인공의 어머니 이도순은 북에서 월남할 때 전남편과 흥남부두에서 생이별을 하였습니다. 졸지에 과부가 된 이도순은 살기 위해 마차세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어려운 비극의 시대를 거친 보통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눈을 감기 전에 네 아버지의 무덤 곁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것인데 이 유언에 담긴 의미가 지긋지긋한 남편과의 인연을 다시는 맺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이도순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통속적인 단어이지만 딱히 다른 표현이 없어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애증(愛憎)이라고. 애증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입니까? 문자적인 의미는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감정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이렇게 부부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사랑을 아가페라는 단어로 사용하지 않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무슨 배짱인지 10가지로 대변되는 무시무시한 세속적 가치들로도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절대로 끊을 수 없다고 했을까요? 저는 그 답을 역시 본문에서 찾습니다. 본문 37절은 감동입니다. 오늘 설교의 절정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구절의 주어는 분명하게 보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눈물겨운 고백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도무지 맞장을 뜨면 무시무시해서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10가지의 괴물 같은 상대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이유와 그 담대함의 원천을 37절에서 밝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가 정답이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아주 간단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라고 기록한 그 분의 정체를 유진 피터슨은 감동의 표현으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제시한 유진 피터슨의 이 번역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어디에 근거가 있습니까? 역시 로마서의 내증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로마 교회 지체들에게 과감히 선포했습니다. 로마서 5:6-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어디 이 뿐입니까? 이어지는 로마서 5:10절은 저와 여러분에게 엄청난 힘이요 위로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유진 피터슨의 담대한 번역을 다음과 같이 일찍이 지지해 주었습니다. 요한일서 2:1절을 읽어드립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제 우리는 사순절 세 번째 주일에 주시는 말씀의 감동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신 사사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함으로 날마다 우리들을 넘어지게 하는 영적 괴물들이 어디 본문에 있는 10가지뿐이겠습니까? 도무지 이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신 사사시대의 현대적 괴물들이 어찌 본문에 있는 10가지의 내용물들이겠습니까? 21세기의 오늘,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들은 무궁무진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괴물들의 대부분이 교회 안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①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어설픈 대듦: 침묵의 공간에서 ‘다바르’ 자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공격 ②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들로 인해 스며드는 영적 자괴감 – 대형교회 목회자 세습을 주저 없이 두려움 없이 실행하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목회자들의 일탈 ③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선 천박한 신자본주의적 괴물들의 스릴러들 – 긍정의 힘, 청부론,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유물적 사고관의 교회 침투 ④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 과학주의라는 신 바벨리즘의 공격 – 만들어진 신으로 매도하고 있는 비윤리적 과학의 공격 ⑤ 기득권적 이권을 차지한 수구적 근본주의 기독교의 만행 – 무조건적인 정부여당지지, 반대하면 좌파로 낙인찍는 무지함과 천박함. 기록하자면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정말로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체의 공격들이 어마 무시하여 그들과 대적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목사가 믿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후 1세기에 존재했던 영적 괴물들이나 21세기에 여전히 존재하는 영적 괴물이든 상관없이 그것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 주군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에 순서가 되어 읽은 사무엘상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은 여러 차례 우리 교우들과 나누었지만 읽을 때 이 말씀이 현재진행이라는 사실에 전율하는 감동이 있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이 이끄는 블레셋과의 치열한 믹마스 전투 중에 이미 그 기세에 눌려 패배의식으로 진영이 거의 초토화되었을 때 사울 왕에게 자기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사울은 말도 안 되는 다윗의 선언에 반신반의하자 다윗이 선포한 내용이 이렇습니다. 사무엘상 17:34-37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주군께서 어제 우리들을 상대하는 영적 괴물들과의 전투에서 넉넉하게 이기게 하셨고, 오늘도 넉넉히 이겼고, 내일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정말로 긴장하고 양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윗이 고백한 대로 건져내셨고, 건지고, 또 건져주실 것을 믿었던 주체가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도 신 사사시대에 살고 있는 기막힌 시대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 싸움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사랑해 주시는 주군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랑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단절됩니다. 끊어질 수 있습니다. 왜? 조건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군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 분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믿는 자는 감히 하나님이신 주군 그리고 그 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겠다고 의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잊지 않고 견지할 때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랑의 자리로 견인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이 목사는 오늘 본문을 묵상할 때마다 감동의 쓰나미 폭격을 받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이 말씀을.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피조의 존재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