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4번째 강해) 제목: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4) 본문: 고린도전서 12:8-11 서론) 제자 중에 한 명이 페이스북에 이런 제목의 글을 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예수 없는 예배를 드렸다.” 궁금해서 자초지종을 후에 들어보았습니다.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가 주일 예배 시간에 작정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의 부당성과 석방에 대한 타당성을 설교 내내 주장하는 바람에 너무 힘이 들었다는 후담이었습니다. 제자의 이야기로 전달한다면 그 날 예배의 대상은 박근혜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아픈 이야기였습니다. 오래 전 우리나라 교회 중에 대표적인 진보적 성향을 띠고 있는 서울 향린 교회에서 드려진 주일 낮 예배를 인터넷을 통해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설교자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김용옥 교수였는데 그는 그날 한국교회가 역사의식이 없는 수구적인 집단이라고 비난하며 맹폭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그날 설교를 통해 본인의 스승이었던 진보적 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고 안병무 박사에 대하여 열띤 찬가를 부르며 그를 높였습니다. 그 날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고도로 포장된 지성인들의 예배에서 예수 없는 예배를 드렸다.” 너무 극단의 예라고 저에게 반문하실지 모르겠지만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두 교회가 우리들이 땅을 딛고 있는 대한민국에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앞의 예에서 언급했듯이 그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예수가 없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우리들 중 누가 예수가 없는 교회의 예배를 드렸다면 참 유감스럽게도 그는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가 이렇게 예수가 없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지 아닌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무지몽매함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는 그 답을 오늘 우리 교우들과 살필 7번째의 은사로 답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론) 1) 영 분별함의 능력 즉 그 은사에 대하여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서두에 언급한 예로 인해 눈치가 빠르신 교우들은 이미 캐치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살필 영 분별함의 은사에 대한 담임목사의 접근은 많은 교우들이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의 영 분별함의 은사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셨을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영 분별함의 이해는 요한일서 4:1절을 토대로 한 해석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고린도 교회는 물론 주후 1세기에 소아시아 교회와 심지어는 예루살렘 교회까지도 궁지로 몰아넣으며 괴롭혔던 위험한 이단인 영지주의의 세력은 교회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세력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견고한 율법의 진은 또 다른 골칫거리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을 복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왜곡시키며 거부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주후 1세기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거짓 예언자와 신실한 하나님의 예언자를 그리고 거짓 예언의 정체와 복음을 구별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치열함의 한 복판에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오늘 본문에서 7번째의 은사로 영 분별함의 은사를 소개했던 것입니다. 영 분별함이 은사라고 말입니다. 본문 10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들 분별함을’이라는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선(先) 지식이 있습니다. ‘프뉴마톤’ 즉 ‘영’ 을 ‘영들’이라고 복수로 피력했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까? 주후 1세기 성도들을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하는 영적 대적이나 혹은 그것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시사입니다. 더불어 이 영들에 대한 파악과 분별이 당시 녹록하지 않은 성도들의 싸움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분별함의 은사는 대단히 중요한 시대의 영적 능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0절 중반절에 기록되어 있는 영들 분별함의 은사란 과연 무엇일까? 이 은사의 파악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입니다. 도움을 드리기 위해 공동번역 성경의 번역을 소개하겠는데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그렇습니다. 영들 분별함은 성령의 활동을 가려내는 능력입니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 초대 교회 이단인 영지주의에 대한 반론적인 변증을 가장 잘 그리고 있는 성경을 뽑으라면 바로 요한일서입니다.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을 아주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언어로 성토하였는데 바로 거짓 선지자라고 정의한 점입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이 다른 거짓 영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들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왜 그들이 다른 거짓의 영에 좌우되는 존재들이라고 서슴없이 공격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요한은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라고 정의한 영지주의자들을 향하여 던졌던 비수를 들어보십시다. 요한일서 4:2-4절입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가진 자들에게 임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그들과 싸워 이기게 하시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점입니다. 이 복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복의 능력이 주후 1세기 고린도지역에 있는 참 된 성도들에게 주어진 복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여전히 진행되는 복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주후 1세기에 영들 분별함의 은사라는 능력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영지주의자와 같은 이단적 사설과 적 그리스도적인 일체의 것들에 대하여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거짓 예언이나 예언자를 구별해 낼 수 있는 주후 1세기의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인정하면서도 오늘 21세기에 신앙의 여정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영들 분별함의 은사라는 복된 능력은 조금 더 외연을 확장하여 교훈을 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영들 분별함의 은사라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나에게 현재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거짓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도 현재화될 때만 가능합니다. 내 안에 예수께서 나를 인격적으로 구원해 주시기 위해 행해주셨던 십자가의 그 은혜가 현재 접목되고 있는가는 내가 거짓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인가를 구분해 주는 시금석입니다. 이 명제 앞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하고 엄숙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현재적으로 육화되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내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기에 말입니다. 내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 그 분만이 내 안에 예수께서 살아서 역사하시는가를 분별해 주는 능력을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10절에서 말하는 영들 분별함의 은사에 대한 현대적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우들은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천박하게 정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부로 정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나의 영적 상태를 알게 해 주시는 성령의 인격적인 도우심이지 남의 영적 상태를 파악하게 하는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김기석 목사의 ‘오래된 새 길’을 보면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성령이 임한 곳에는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화된다. 그래서 무기력한 생명을 일으켜 세우고 인위적으로 나누어졌던 것을 하나 되게 한다. 영들을 분별하는 시금석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다.”(p,210) 재 강조하지만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화되어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영 분별함의 은사는 이념일 수 없습니다. 영 분별함의 은사는 철학일 수도 없습니다. 영 분별함의 은사는 개인의 소신을 주관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아집도 아닙니다. 영 분별함의 은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나에게 현재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사를 받은 진짜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의 영이 내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부여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있어야 합니다. 언어도 예수를 닮아 있습니다. 삶의 내용도 예수를 닮아 있습니다. 인격도 예수를 닮아 있습니다. 이것이 영 분별함의 은사를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이제 8, 9번째의 은사를 동시에 차례입니다. 본문은 8, 9번째의 은사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 통역함을 주시나니” 그렇습니다. 2) 8, 9번째 은사는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도 공동 번역본을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 공동번역에서 방언을 이상한 언어라고 번역한 것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임을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께서는 이렇게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이라는 은사를 성도들에게 허락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교우들에게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 공부를 마치고 나면 이어서 은사론의 압권이자 가장 성서적으로 바울의 은사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올곧게 설명한 14장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이 되면 방언과 방언 해석에 대한 신학적인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해서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을 왜 성령의 은사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가에 대한 공부로 국한하려고 합니다. ⓵ 성령 하나님의 친밀성을 나타내 주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마지막절인 11절을 읽겠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하는 대목이 있다면 ‘그의 뜻대로’입니다. 은사의 부여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성령님의 일하심을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제를 우리는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님이 허락하시는 방언은 참 좋은 것이라는 대전제를 말입니다. 주의 뜻으로 주어지는 은사 중에 옳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천되는 것은 성경에 의하면 대체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함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방언 역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한 분명히 좋은 의지의 실천이라는 마중물로 성도들에게 주신 선물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재철 목사는 ‘성숙자반’ 에서 방언의 유익을 말하면서 제일 두드러진 것으로 성령께서 나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의 말을 수긍하게 되는 것은 방언의 대 전제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이기에 그렇습니다. 방언기도는 내 의지를 전제로 내 감성을 두들겨서 내 입술로 기도하는 일반기도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내 지정의를 지배하여 내 입술을 열어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의 기도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전적인 성령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지 않겠습니까? 민수기 23장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이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을 제어하십니다. 저주가 아닌 축복의 기도를 하도록 말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민수기 기자는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민수기 23: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사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하나님이 발람의 입술을 주장하셔서 선포한 민수기 23:18-24절은 축복의 메시지였습니다. 발람은 비록 하나님이 보시기에 형편없는 예언자였지만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때 그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은혜의 순간을 경험하였습니다. 방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하나님의 사람과 동행하며 그에게 기도하게 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⓶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을 비롯한 일체의 은사는 성령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임을 11절이 증언합니다. 특별히 방언은 그 공급함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는 외적 은사입니다. 사도행전 2:6-8절을 보겠습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또 한 구절을 마저 보겠습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2:11절 후반절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의 역사에 따른 방언의 말함을 보았던 모여 있던 자들의 평가입니다. 이 장엄한 메시지에서 제가 받는 감동은 방언을 하는 당사자들에게서 느끼는 감동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주변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큰일 하심을 느끼게 하였다는 감동입니다. 바로 이 점에 우리 교우들도 주목하며 은혜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방언의 공급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선명한 증거입니다. ⓷ 방언 통역의 은사는 이런 하나님의 친밀하심, 그리고 일하심을 공동체에 알게 하는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통역’ 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르메네이아’는 원래의 의미가 해석하다입니다. 9번째 은사는 하나님이 하게 하신 기도가 알아듣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기에 그것을 교회 공동체가 알 수 있도록 해석해 주는 은사입니다. 다시 말해 방언이라는 은사의 절정은 하나님이 이 기도를 하게 하신 궁극적인 뜻을 공동체에 알려주게 하는 해석(통역)의 은사입니다. 나만의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기도로의 저변 확대 은사가 통역의 은사입니다. 그렇다면 통역의 은사는 공동체의 질서와 유익을 위함으로 주어지는 선물이지 않겠습니까?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라고 해도 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영적인 친밀감과 일하심과 공급하심과 알게 하심이라는 은사를 발휘하게 할 때 그 공동체에 임하는 영적 감동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를 저는 성지순례를 통해 피부로 느꼈던 경험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 교회를 개척하고 교우들의 배려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그리고 요르단까지 출애굽 여정의 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순례의 길 중에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개인적으로 경험한 최고의 성지 순례의 절정은 시내산 순례였습니다. 새벽 3시에 올라가는 시내산 등정은 너무나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내산 정상에 올라 동터오는 일출의 광경은 주변의 온통 붉은 산과 어우러져 그 감동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고 장엄했습니다. 일출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그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모세 기념 교회당을 중심으로 그것에 오른 전 세계의 순례객들이 같이 합창을 하였습니다. 동기 목사가 선창함으로 시작한 찬양은 한국어로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러자 미국에서 온 순례자들과 피부가 검은 나이지리아 순례자들이 따라서 합창했습니다. Oh Lord my God/When I in awesome wonder/Consider all the works/Thy hands have made/I see the stars/I hear the rolling thunder/Thy power throughout/The universe displayed/Then sings my soul/My Saviour, God, to Thee/How great thou art/How great thou art/Then sings my soul(2). 그러자 한 쪽 구석에서는 네덜란드에서 온 화란 개혁교회 신자들이 네덜란드 언어로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대만에서 온 크리스천들이 중국어로 찬양을 드렸습니다. 저는 그 때의 잊지 못할 감동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왜요? 사도행전 2:11절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이제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살핀 은사의 내용들을 마감할 때가 왔습니다.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들 각자에게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내 신앙의 인격 안에서 가장 가깝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 교회에서 불일 듯 일어나기를 담임목사는 기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정중하게 권합니다. 9가지 은사의 기초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을.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이 좋은 은사가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