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3번째 강해) 제목: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3) 본문: 고린도전서 12:8-11 서론) 지난 수요일, 한의원에서 침 치료를 받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데 두 여자가 저에게 접근했습니다. 그 중 젊은 여자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제가 인상을 보니까 앞으로 참 좋을 일이 일어날 인상이신데, 잠시만 저와 함께 그 좋은 일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말을 듣고 제가 시큰둥하게 응대했습니다. “어디에 다니세요?” “아니 어디에 다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아버님의 운명에 대하여 좋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얼버무리는 그녀에게 다시 재차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나오셨어요?” “대순진리회에서요.”라고 마지못해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에 대하여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저에게 말을 걸었던 젊은 여자가 갑자기 돌변하면서 이렇게 토라지며 말했습니다. “아니요, 당신이나 그 진리나 잘 믿으세요.”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미래를 점친다는 것이 진짜로 가당한 일인가? 제한된 유한성을 가지고 있는 자가 어디 감히 같은 유한성의 사람의 운명을 재단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은혜 중에 김선미 자매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자매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이전에 시무하던 교회에서 한 시어머니 권사께서 저에게 이런 부탁을 하면서 돈 봉투를 내놓았습니다. “목사님, 이번에 제 자부가 임신한 것 아시지요? 기도를 부탁할 것은 이번에 꼭 아들이 필요한데 하나님께 기도해서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받은 봉투를 돌려드리며 이렇게 그 분께 말씀드렸습니다. “권사님, 자부의 건강한 출산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무당이 아니라 목사거든요.” 오늘 본문 10절 전반절을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오늘 주일은 5번째, 6번째 은사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바로 능력 행함과 예언함입니다. 이 5,6번째의 은사를 오늘은 거꾸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론) 5) 예언(預言)함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를 살핌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반드시 버려야 올바른 예언이라는 은사에 접근할 수 있음을 미리 교우들에게 고지합니다. ‘예언(預言)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페테리아’ 라는 단어를 깊이 연구해 보십시다. 이 단어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프로’라는 단어는 ‘∼대신하여’ 혹은 ‘∼앞에’ 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전치사입니다. 또 하나의 단어 ‘페테리아’는 ‘말하는 사람’ 즉 스피커 (speaker)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대신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예언자 한자를 기록할 때 저는 미리 豫의 예언자(豫言者)라고 쓰지 않고 ‘맡길’ 혹은 ‘간여할’ 預의 예언자(預言者)라고 반드시 기록합니다. 왜 이렇게 표기하기를 고집합니까? 오늘 본문의 ‘예언’이라는 의미를 원어에 근접하여 번역한다면 ‘미리 보는 것’이 아니라 ‘대언(代言)’ 즉 ‘대신 말하는 것’ 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도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7: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을 전할 만한 구변이 없다는 모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를 대신하여 말을 해 줄 사람인 형 아론을 내가 대신 세우겠다는 위로의 메시지였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대언자’ 라는 단어의 번역 히브리어 ‘나비’는 말 그대로 ‘미리 예견하여 본 것’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말을 대신하여 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언자(預言者)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 사건 이후 출애굽의 여정 중에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의 독창적인 구변으로 말한 것이 성경에서는 단 한 부분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대신 이 도식이 출애굽 여정 중에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7:8절을 먼저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공식이 먼저 나온 뒤에 그 다음의 도식은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7:10절 전반절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 이런 구약적이고, 신학적이고, 어원적인 해석으로 오늘 5번째의 은사도 해석해야 건강한 신학적 해석이 됩니다. ‘예언함’ (預言함)이라는 은사가 의미하는 성서적인 올바른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 두 번째 은사로 살펴보았던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받아 대신 전하는 은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언함이라는 은사는 결코 주관적인 은사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말을 전하는 것이나 내가 주관적으로 본 환상과 계시 등등의 것을 말하는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로 주신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객관적인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무질서는 주관적인 예언(豫言)이 난무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본 환상이 옳다, 네가 본 환상은 엉터리라는 식의 비교 의식이 팽배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언의 은사에만 국한 되었던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피게 될 방언의 은사에서는 더 엄청난 무질서를 야기 시키는 고린도교회의 적폐 요소 중에 하나였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무질서한 예언으로 인해 교회는 와해될 수 있는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분열의 위기에 마주쳤습니다. 이것은 직시한 바울은 올바른 예언을 적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연구하게 될 14장 말씀 중에 미리 몇 구절만 앞당겨 보십시다. 14:3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14:32-33절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예언은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혹은 권면하거나 위로하여 교회를 질서 있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언함의 은사는 반드시 지식과 지혜의 말씀으로 주어진 은사를 대신 말하는 영역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내가 기도하는 중에 이런 환상을 보아서 하는 말인데”는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이 말씀이 있기에 하는 말인데‘가 되어야 안전합니다. 우리는 2014년 9월 한 여전도사가 말한 12월 전쟁예언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녀의 주관적인 예언(豫言)의 도발은 교회 신뢰를 추락시키는 데에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더 심각한 것은 앞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지극히 성서적인 예언마저도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게 했다는 영적 불감증을 유발했다는 점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내 자녀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기 위해 용한 권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정치인들조차도 예언을 잘 한다는 무당들에게 찾아가서 이번 대선에는 어디에 줄을 대야 하는지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역했던 이전 사역지에서 교회를 휘젓던 한 권사가 어떻게 해야 아들을 낳는 지를 예언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 신자들에게 가르쳐 주어 교회를 풍비박산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역지에서는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온 한 남자 집사가 이후부터 예언을 한다는 명목으로 교회 목사를 비롯하여 일체의 직분자들의 사생활을 무자비하게 비판하여 결국은 담임목사로부터 치리를 받는 해프닝도 경험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언함의 은사는 ‘미리 보는 예언함’의 은사가 아니라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근거로 ‘대신 전하는 말씀’의 은사임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6) 능력 행함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는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권능들의 내적 역사’입니다. 저는 이 은사를 성경적으로 조명해 본다면 대표적으로 저는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담화를 들고 싶습니다. 아나니아가 공동체주의의 양태를 보였던 초대교회를 무너뜨리는 거짓의 행동을 보이자 수장의 역할을 감당하던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5:4-5절입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가만히 이 베드로의 선언을 묵상해 보십시다. 아나니아에게 무슨 서슬이 시퍼런 공격적인 멘트를 베드로가 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잘못을 지적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음을 누가는 분명히 기록합니다. 이어 그의 아내 삽비라에게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음을 보고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말씀에 실려 있는 하나님의 권능 때문입니다. 어떤 신약성서해석자는 능력 행함을 기적을 일으킴이라고 해석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외연이 너무 좁아 보입니다. 저는 본문에 기록된 6번째의 은사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말씀에 실려 선포된 하나님의 역사라고.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능력 행함을 그래서 ‘선포’ 라고 번역했는데 탁월한 통찰입니다. 한 가지 성서적인 예를 더 들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제 1차 전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이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의 살라미로 갑니다. 이윽고 살라미를 거쳐 바보 섬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바예수라는 별명을 가진 박수 엘루마를 만나게 됩니다. 헌데 이 엘루마가 바보 섬의 총독으로 있는 서기오바울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관심을 가져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는데 이 일을 방해합니다. 이 소위를 악하게 본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다음과 같이 엘루마에게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사도행전 13:10-11절을 소개합니다.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바울이 무엇을 한 것입니까? 복음 수용을 방해하는 엘루마에게 주의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이렇게 선포된 말씀의 권능이 능력으로 엘루마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토대로 한 선포 즉 능력 행함으로 인하여 얼마 동안 눈이 머는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6번째로 강조하고 있는 은사에서도 여전히 빗나가지 않고 앞에 말씀드린 5가지의 은사와 더불어 초지일관으로 강조하고 있는 메시지가 보이십니까? 능력을 행하는 우리들이 대단히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은사 역시 말씀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능력이 행해지는 일체의 은사적인 역사는 말씀과 ‘함께’ 입니다. 말씀과 ‘더불어’ 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배제된 능력 행함은 거짓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 자체가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능력을 행하는 은사는 철저히 말씀을 근거로 이루어짐 또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제가 아는 지인 목사께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강덕 목사님에게 말씀 사역과 더불어 성령의 치유 사역이 전면에 무장되면 정말로 날개 달린 엄청난 사역자가 될 텐데 그게 아쉬워요. 그 치유 사역을 배우게 해 주는 부흥사 학교에 들어와 볼 생각이 없습니까?” 듣고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교만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그 지인 목사의 권고를 거절한 이유는 말씀 사역과 성령의 치유 사역이 구분되지 않음을 믿기 때문이고, 누군가에 의해서 배우는 성령의 치유 사역은 이미 하나님이 행하시는 치유 사역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능력 행함과 말씀 사역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올곧게 전하고 증거 할 때 그 사역의 현장에 능력이 그대로 임하는 것이며 그렇게 임한 능력은 곧 나와 성도들의 영과 육과 혼을 찔러 쪼개고 우리들의 깊은 영적 심연까지 터치하셔서 가장 아름답고 강력한 치료와 회복의 은총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누가 예언함의 은사가 탁월한 자이고, 누가 능력 행함을 많이 하는 자인가가 아니라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역사하는 그 능력을 믿고 있느냐? 입니다. 동시에 이 은사들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는가? 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나에게 가장 강력한 예언의 은사가 활발하게 역사하는 현장, 오늘 나에게 가장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현장은 바로 세인 교회 공동체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이강덕 목사의 은사가 이 은사 행함에 탁월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의 전 영역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건강하게 선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우리 교우들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주명들을 죽어가는 자들에게 대신 전해 주는 예언의 은사들이 불일 듯 일어나기를 바라며, 동시에 여러분에게 날마다 선포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장에서, 범사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 행하심의 은사들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