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4번째 강해) 제목: 그리스도를 본받아 본문: 고린도전서 11:1 서론) 유대인 출신의 종교 철학자인 마틴 부버는 ‘열 계단’에서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고유한 해석서인 미드라쉬에 담긴 한 예를 의미 있게 소개합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 때 아버지 데라를 따라 우상 장사를 하는 가풍에 젖어 있던 전설을 해석합니다. 어린 아브라함과 그의 형인 하란에 대한 해석인데 어린 아브라함이 우상을 숭배를 거부하여서 불속에서 타 죽지 않은 이야기에 대한 랍비 유리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하였다. 우상이 불속에 던져지기를 원한다면 나 자신이 불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살아난 이유이다. 그러나 그의 형 하란은 생각했다.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걸 보자마자 나도 불 속으로 뛰어 들어야지 하고 뛰어 들었다. 그것이 하란이 불에 타 죽은 이유이다.”(p,108) 물론 마틴 부버의 이 예는 우리가 보고 있는 구약성경의 아브라함 기사와는 아주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미드라쉬가 유대인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지침서라는 전제를 이해한다면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있는 교훈으로 이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전해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보았고 하란은 사람인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선명한 교훈 말입니다. 성경은 이런 식의 보고를 여러 차례 독자인 우리들에게 선사합니다. 공교롭게 사무엘상 28장과 30장이라는 두 개의 장에서 같은 시기에 일어난 상반된 역사적 정황을 만나면서 성경기자의 탁월한 영적 혜안에 감탄을 자아내게 됩니다. 먼저 사무엘상 28장의 정황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으로 사울이 등극하여 나라를 다스렸지만 사울의 리더십은 그야말로 나약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마침 국가적인 군사력과 왕권의 취약함으로 리더십이 다윗에게로 점점 넘어가는 시기에 블레셋이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이 위기에 직면한 사울은 죽은 사무엘이 너무나도 그리웠습니다. 사무엘이 있었더라면 무슨 방법을 제시할 텐데 사무엘은 이미 사망한 뒤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급함 속에서 사울이 택한 방법을 추적해 보십시다. 사무엘상 28:7절입니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은 엄청난 자가당착의 실수를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박수와 신접한 자들을 자기 땅에서 추방한 자가 사울 본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의 법을 어기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추적하여 그녀를 만나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한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가는 28장에서 고발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무엘상 28장에 기록된 이 참화를 뒤로 하고 두 장을 건너서 30장에 진입하겠습니다. 사울 왕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 다윗 자기에게로 이스라엘의 리더십이 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직시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그런 민감한 시기에 아말렉이 다윗이 한 때 거주했던 시글락을 도륙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다윗도 예상하지 못한 급습을 아멜렉에게 당한 것입니다. 시글락에 살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를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참극을 맛본 다윗이 시급하게 보인 반응을 사무엘상 기자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사무엘상 30:6절을 읽어드립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은 박수무당을 찾지 않았습니다. 사울처럼 신접한 여인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급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용기를 얻고 아말렉과의 남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빼앗겼던 포로들을 다시 찾고 시글락을 다시 회복하는 쾌거를 이루게 됨을 30장 후반부는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병렬된 사무엘상 28장과 30장의 차이는 무슨 차이였습니까? 누구를 보았는가? 라는 교훈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과 과연 나는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가? 에 대한 영적 범주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학자들은 이 구절이 11:1절의 위치에 편집되어 있지만 실상은 앞에서 바울이 역설한 8장부터 10장까지의 내용들 즉 바울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하여 행동했던 일체의 일과 반응에 연관해서 읽어야 하기에 10장 마지막 절과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8-10장에 걸쳐 바울이 언급한 우상 제물에 대한 소견이 무엇이었습니까? 큰 줄기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은 그 의미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음식에 대한 섭취는 신중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음식으로 인해 실족한다면 단호하게 나에게 주어진 자유 함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이었습니다. 비울이 이렇게 선언한 8-10장까지의 역설을 마치고 그는 최종 결론으로 어떻게 보면 겁 없어 보이는 그래서 때로는 극단적인 표현처럼 보이는 오늘 본문을 선포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 구절에서 ‘본받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미메타이’는 우리나라 단어로 표시할 때 가장 가까운 단어가 ‘모방하다.’입니다. 외래어로 쓰이는 이미테이션과 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말했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모방하라는 종용입니다. 이 대목에서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바울이 도대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자신하며 과대평가했으면 나를 모방하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의문 때문입니다. 교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또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발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3:10절입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어지는 로마서 3:23절을 연이어 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을 한 당사자가 바로 바울이 아닙니까? 모든 사람에는 바울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조금 더 긴장의 도를 높여 보십시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본인의 여타 다른 서신에서 여과 없이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7:19-24절은 결정타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어떻게 곤고한 사람을 본받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양아들에게 전하는 편지에는 더욱 극단의 자아를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어떻게 이런 자가 나를 본받으라고 떠벌일 수 있냐는 질문은 타당해 보입니다. 바울이 서신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면서 내뱉었던 말들을 곱씹다보면 바울이나 우리나 별 다름이 발견되지 않는 평범함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헌데 본문은 아주 선명하게 독자인 우리들에게 보란 듯이 선언합니다. ‘나를 본받으라.’ 이 단락만 본다면 우리는 아멘 할 수 없습니다. 도무지 수긍이 안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주절과 종속절을 나누고 종속절에서 또 다른 문장을 남겨놓았다는 점에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합니다. 바울이 종속절에 남겨둔 문장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선언에는 대 전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나의 자아와 인격 그리고 개성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취하고 있는 행동을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대전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것” 바로 이것을 너희들도 본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 박사는 메시지에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는 참 귀한 번역을 남겨놓았습니다. 그의 번역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여러분이 나를 기억하고 존중하여,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믿음의 전통들을 지키고 있다니 내 마음이 참 기쁩니다. 모든 실질적인 권위는 그리스로부터 옵니다.” 유진 피터슨 박사의 이 번역은 저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이 내 삶의 실제에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기막히게 터치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내 삶의 실제적인 통치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분의 통제를 철저하게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통제라는 단어가 나왔으니까 이제 신학적인 접근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1세기라는 작금의 세태에 신앙과 불신앙의 척도를 신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앙이란 주군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행하셨던 삶 그리고 그 분이 언급하셨던 말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서 그 분을 삶과 말을 닮아가고 살아가는 행위입니다. 반면 불신앙이란 주군이신 예수의 삶과 말에 대하여 내 삶과 말을 이원화시켜 철저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는 행위입니다. 이 두 개의 틀은 묘하게도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이며 형태입니다. 설교의 서두에 언급한 표현으로 돌아간다면 신앙이란 주군이신 예수의 삶과 말을 보고 따라가는 것이며, 불신앙이란 주군이신 예수의 삶과 말을 외면하여 따르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에 고전으로 추천한 ‘월든’이라는 감동의 책을 기록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또 다른 의미 있는 책이 있습니다. 걸작 중에 걸작인데 ‘시민의 불복종’입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 출신의 수재였지만 국가 권력의 폭력적인 행위에 대하여 반대하여 부와 명성을 다 버리고 월든이라는 호숫가에 집을 짓고 평생을 자연과 벗하며 친 환경주의자로 살면서 많은 지식인들에게 국가의 물리적 폭력에 항거하며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며 살라는 메시지를 삶으로 전해준 지식인이었습니다. 소로우는 미국이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인권을 짓밟는 합법적인 죄에 항거하기 위해 인두세를 내지 않고 지내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기에 이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국가를 인정할 수 없다는 소위 시민 불복종이라는 화두를 전 세계에 던진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남겼던 명언이 있습니다. “사람 하나를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 (p,41) 이 한 마디가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 지식층의 사람들에 용기를 주는 메시지가 되어서 바른 길을 가는 자들의 삶을 곧추 세워주는 길라잡이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팔로워가 되게 한 기폭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왜 수많은 전 세계의 지성들이 이렇게 소로우를 지지했습니까? 삶으로 살아내는 진정성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십시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면면이 아니라 주님의 삶과 말을 따라가는 내 삶의 진정성을 닮으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분에게서 진정한 권위가 유출된다는 것을 믿고 따랐던 그 분의 삶을 본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소그룹을 이끌다보면, 목회의 현장을 이끌다보면 말잔치가 풍성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살아냄의 빈약함이 너무 속살 보이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이제는 감히 그리스도 예수의 공동체에게 무슨 일을 하려면 우리들의 허락을 받으라고 압박하고 겁박해도 대항할 수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에 나누어 드린 별지의 메시지처럼 “저의 내면의 의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 크게 작용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독교 신앙입니다.”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리고 정당한 신앙고백을 해도 유린당하고 있는 참담함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패역의 시대가 판을 치는데도 우리는 꼼짝할 수 없이 기죽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선언한 바울의 이 놀라운 고백을 오늘의 언어로 적용하고 교훈을 얻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다는 것은 과연 오늘의 신앙적 언어로 어떻게 대치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이 살아내신 삶의 퍼즐 판과 똑같이 우리들의 삶의 퍼즐 판도 이미테이션하는 것입니다. 리처드 헤이스 교수는 이렇게 본인의 고린도전서 주석서에서 본문 11절을 석의했습니다. “본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희생이라는 사랑의 패턴에 따라 우리의 삶을 조각해 나아가는 것이다.” (p,307) 너무 귀한 표현이자 가르침이 아닙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난 부분들을 예수님의 자기희생이라는 실루엣에 맞추어 하나하나를 잘라가며 조각해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는 표현은 기막힌 통찰입니다. 저는 리처드 헤이스의 의견을 공유하면서 조금은 더 폭넓게 오늘 본받는다는 바울의 표현을 적용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삶이라는 퍼즐 판이 있습니다. 그 퍼즐 판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 퍼즐 판은 완벽한 롤 모델링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 삶의 퍼즐 판을 맞추어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본받는 삶입니다. 내 삶의 파편들이 어떤 의미로 보면 리처드 헤이스의 말대로 조각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조각의 파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무엇이 주님의 삶과 달랐는가를 엄격하게 판단하고 조금은 더 완벽한 퍼즐을 만드는 삶이야말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에게 시선을 놓지 않을 때만 가능한 게임입니다. 창세기 12장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작하는 족장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기사가 실려 있는 장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인 아브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이루신 구속사의 시작점을 알려주는 족장 역사의 시작을 보고합니다. 개인적인 소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아브람은 의외의 인물이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우상숭배자의 집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평범하다 못해 일그러진 초상화와 같은 아브람이 열국의 아비가 되고 하나님이 그를 선택했던 극명힌 이유를 보여주는 한 구절이 소담스럽게 1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이 구절은 창세기 기자의 확연한 의도가 엿 보입니다. 어떤 의도입니까? 한 씨족 공동체에서 부름 받은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인생은 여러 가지 모난 부분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심으로 궁극적으로 승리한 주인공이 되게 하신 의도와 또 한 사람은 같이 출발했지만 실패한 인생의 초상으로 그려진 의도를 알게 합니다. 무엇이 이렇게 두 사람의 인생의 길을 갈랐습니까? 아브람이 따랐던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사람인 아브람을 따랐다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주군의 삶의 퍼즐을 본받아 내 삶의 퍼즐을 맞추어가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의 퍼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은 주군이신 예수의 말씀이라는 퍼즐을 바라보지 않고 경우에 따라, 상황에 따라 사람의 퍼즐로 내 삶의 궤도를 조정할 때입니다.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이 구절의 불편한 진실을 지혜롭게 깨닫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지난 주일에 이동우 집사님과 김학례 권사님의 사위인 포곡고등학교 한문 교사인 심정흠 선생님이 출간한 참 좋은 양질의 책 한 권을 저자 사인에 담긴 증정본으로 선물 받았습니다. 이 책을 양질의 책이라 평한 이유는 한문 교사가 자기의 전공인 한자숙어에 얽힌 고전적인 지식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서양 음악사에 큰 거보를 내딛은 유명 음악가들의 삶으로 적용시킨 소위 말하는 퓨전식의 책을 발간해 냈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아마도 요 근래 인기가 높은 ‘통섭’이라는 차원으로 접근한 책이라서 아주 의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내용 중에 러시아 출신의 피아노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가 음악 초년병 시절에 작품 실패를 경험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 심각한 우울증과 신경 쇠약증에 걸려 음악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를 아끼는 자들이 라흐마니노프를 재기시키기 위한 노력한 일들을 저자가 한자 숙어 권토중래(捲土重來)라는 단어로 적용한 글을 심도 있게 읽어보며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권토중래’ 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어떤 일에 실패한 뒤 힘을 길러 다시 그 일을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라흐마니노프가 심각한 정신적인 병마와 싸울 때 그를 한 지인이 당대 최고의 문호인 톨스토이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톨스토이가 이렇게 라흐마니노프에게 고언 해 주었습니다. “인생이 순조롭다고만 생각하십니까? 우리들의 삶 속에는 누구나 어렵고 곤란한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개를 들고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을 위해 나아가세요.” (심정흠저, “음반 골라주는 한문 선생님의 매치 수업”, 홍문각간, 2017년, p132) 대 문호의 이 정도의 충고라면 이겨야 하는데 라흐마니노프는 호전되지 않았다고 저자는 밝힙니다. 해서 그를 이번에는 모스크바 최고의 정신과 전문의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의뢰했고 그가 치료한 치료법이 정신치료와 최면 요법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한 끝에 라흐마니노프는 권토중래하며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을 작곡하게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양질의 글을 읽으면서 또 다른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했는데 저는 목사이기에 이 글을 통해 영적인 이면의 공부를 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제일 먼저 충고를 해 준 사람은 거장 레오 톨스토이입니다. 그의 권면이라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실패했습니다. 해서 이차로 만난 사람이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의 치료법은 최면치료였습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지만 그의 최후가 어떠했습니까? 러시아에서 미국을 망명한 그는 미국에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 러시아를 그리워하다가 향수병에 걸려 미국인들의 부의 상징인 로스앤젤레스 비벌리힐스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결국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정신적인 질병은 미완성의 상태로 무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합니까? 인간의 완성은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 않음을 각인하고자 함입니다. 오늘 별지에 기록한 김기석 목사의 갈파가 그래서 맞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 앞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사람은 사람다워집니다.”(끙끙 앓는 하나님, p,343) 사람이 주장하고 올곧게 서야 할 자리는 과학도, 정치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누구를 보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누구의 퍼즐에 당신의 조각들을 맞추고 있습니까? 본문에서 말한 바울의 역설은 이 답을 말하는 데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해답을 줍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