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3번째 강해) 제목: 목적이 무엇입니까? 본문: 고린도전서 10:23-33 서론) 지난 주간에 친한 동기 목사 부부들이 여름 정기 휴가를 제천으로 내려와 청풍 리조트를 포스트로 삼아 재충전의 기회로 삼고 올라갔습니다. 수요일 오전에 우리 교회로 친구 부부들이 오는 스케줄이 있어 기다리고 있는 급한 목소리가 담긴 전화가 친구에게서 울려왔습니다. 산곡동 지점에서 4중 출돌 사고가 났는데 그 차량 중에 하나가 차준희 교수의 차량이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사고지점으로 달려갔습니다. 자초지종의 결과는 차간거리 미확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다행이 인사사고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교통사고는 모르는 일이라 보험회사 서고처리 담당자를 불러 사고처리를 하고 난 뒤에 명지병원으로 친구들 전체가 차 목사 부부의 진료를 위해 함께 동행을 했습니다. 고개와 목 쪽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차 목사 부부를 치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과 다행히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아 안도했습니다. 결과가 나온 뒤에 교회로 이동하여 편안히 사후 이야기를 나누다가 차 목사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리조트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나왔는데 왜 이런 사고가 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듣던 아내가 위로의 말로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사모님, 기도했으니까 인사사고가 안 난 거예요.” 다시 차 목사가 아내가 반응했습니다. “아, 정말로 그러네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북치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북치고 장고치고, 꿈보다 해몽이 좋다.” 조금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세기의 변증론자인 C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 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일종의 거래로 보는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편의 계약사항을 준수하는 것처럼 따라서 하나님도 하나님 편에서의 준수사항을 준수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P,223) 제가 루이스의 이 갈파에 주목하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내가 무언가의 의무를 지고 그 부담을 감당했다는 것이 근거가 되어 하나님께 말도 안 되는 일을 요구하는 일이 너무나 당연시 되는 것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쉽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아내가 차 목사 사모와 건네고 주고받은 대화는 위로와 그 위로에 대한 반응이지 성서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 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차간 거리를 지키지 않고 운전할 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사고를 하나님께서 피하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친구 아내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먼저 성서적인 오류를 비평적인 차원에서 분명히 바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내의 말을 두둔도 해야 하겠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심정적으로는 수용이 된 분위기입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내의 해석과 그것을 받아들인 차 목사 아내의 반응은 성서적인 답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두 사람의 해석과 반응은 그리스도인이 한 사건의 정황에 따른 해석을 긍정화 시키려는 노력이 전제되었다는 점에서 칭찬할 수 있습니다. 아내나 차 목사의 아내가 이렇게들 생각한 것은 교회에서 자라나며 받은 학습의 효과일 수 있겠지만 또 하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어떤 불리함도 드리지 않겠다는 순수한 신앙 말입니다. 제 아내가 언급한 말이라 두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자라면 적어도 이런 대전제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을 위하여’입니다. 본문 3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의 삶의 목적, 바울이 그 동안 본인이 공부하여 축적한 일체의 지성적인 과정의 지식의 총아들을 그는 한 가지의 목적을 두고 사용하고 이해했던 정황들이 그의 서신서는 물론 그의 선교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1/2의 내용들을 접하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하여’(SOLA DEO)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에 아주 대표적인 실례 중에 하나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생각보다 상당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구조로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본문입니다. 해서 설교를 준비한 저 역시 상당히 철저하게 본문 이해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설교자의 노력은 당연히 말씀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들을 위한 수고이기에 괜찮지만 저에게 주어진 설교의 숙제는 어려운 이 본문을 어떻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가?의 제 문제였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심혈을 기울인 본문 연구임을 사전에 밝히고 본문 이해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바울은 그 동안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지성적 그룹 즉 엘리트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전한바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엘리트주의자들의 슬로건이었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바울이 곧바로 반격하기를 그렇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동시에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직격탄을 날렸던 것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부터 시작된 이 바울의 불편한 진실은 고린도교회의 엘리트층의 신자들은 매우 불쾌하게 했든지 아니면 곤란하게 했든지 둘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은 이 불편한 진실을 본문이 시작되는 23절에서 다시 복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바울은 본인이 천명했던 고린도교회 엘리트신자들을 향한 공격적인 발언을 다시 상기하면서 그가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에 대한 조금은 구체적인 정황 설명을 이어지는 24절에서 언급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대체적으로 참 선한 것이었습니다. 주지했던 것처럼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는 오늘의 단어로 말하면 乙의 위치에 있었던 나약한 자들이 다수였습니다. 이들은 항상 비주류의 위치에서 엘리트주의에 있었던 부유한 자들에 의해 소외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항상 당하는 자의 아픔을 견뎌야 했습니다. 바울의 신앙적 지지는 바로 이들을 위한 것이었고, 항상 이들의 대변자 역할도 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24절에 언급된 바울의 선언은 참 귀담아 들을만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기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위한 삶이어하는 것이 말입니다. 죽어다 깨어나도 이런 삶을 살지 못한다고 으르렁대는 자들이 한국교회 안에 지천에 깔려 있다고 해서 막말로 말해 ‘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교회가 바울의 말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무슨 교회이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내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식이고, 하나님의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 23-24절은 별로 저항 없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25절부터의 바울의 언급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동안 바울이 8장과 9장에서 언급한 내용과 상반되는 말을 던진 것처럼 보여 상당히 헷갈릴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입니다. 부담스럽지만 전진해 봅시다. 25-30절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겠습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갑자기 바울이 생뚱맞은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언급한 25-30절의 본문 이해는 평신도인 여러분에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런 개역개정판 번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다가 리처드 헤이스 교수가 쓴 고린도전서 주석에 기록된 그가 의역한 번역이 이해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의역으로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고기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나 사서 드십시오. ‘양심’을 위해서는 지나치게 소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이르기를 ‘세상과 세상에 가득 찬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불신자 중의 한 사람이 당신을 저녁에 초대했을 때 가기를 원하신다면, 당신 앞에 차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드십시오. ‘양심’을 위해 지나치게 소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약한 형제나 자매가 당신에게 ‘이것은 제사에 드려졌던 고기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이슈로 삼은 그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양심을 위하여 드시지 마십시오. 여기서 저는 분명히 당신의 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만, 당신은 ‘양심’을 위하여 너무 소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나의 자유가 누군가 다른 사람에 제한된 도덕 감정에 의해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감사로 음식을 먹으면 내가 감사를 드린 음식 문제로 해서 왜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p,303) 이 번역의 도움으로 훨씬 더 쉽게 본문 25-30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쉽게 이해는 되었는데 더 헷갈리게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무엇이 헷갈립니까? 바울의 태도입니다. 25-30절까지의 발언을 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이전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하여는 약한 신앙인들을 위하여 먹지 말아야 하는 절제의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 바울이 입장을 바꾼 것 같은 입장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고기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나 사서 드시라는 표현, 지나치게 양신에 관한한 소심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 당신 앞에 차려진 것은 무엇이든지 먹으라는 표현, 왜 나의 자유가 누군가 다른 사람에 제한된 도덕심 때문에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등등의 표현들을 놓고 볼 때 도대체 바울의 정체가 무엇이지? 하는 의구심을 품을 수 있을 만할 정도로 바울이 급작스럽게 변질한 것 같은 행태로 인해 적지 않게 실망스러운 느낌이 드는 구절이 본문에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바울의 이 행보와 발언에 대한 해석을 접근하려면 다른 성경 텍스트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수훈의 교훈 중에 한 단락을 소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38-4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주님이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약과 신약의 메시지가 모순된 듯한 모양새로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대로’라는 주님의 여기에서 인용하신 구절은 소위 신학적인 용어로 ‘동해보상법’이라는 어려운 이름을 갖고 있는 출애굽기 21:22-25절의 구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1:22-25절입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 구절의 적용 대상은 22절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임신한 여인을 싸움 중에 낙태시킬 정도의 상해를 입힌 자에게 떨어진 무거운 대가성 결론을 정한 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무거운 출애굽기의 구절을 인용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마태복음 5:38절을 본다면 주목할 것이 이것입니다. ‘너희가 들었으나’입니다. 어떤 가능성을 주님이 열어놓으신 것입니까? 구약이 천명한 상황의 역전이 있을 수 있음을 열어놓으신 것이 아닙니까? 구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방법을 새롭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입니까? 정반대의 개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제는 주님이 동해보상법을 폐지하시고 새로운 사랑과 용서의 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이 구절을 통해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주님은 성경해석을 성서중심의 해석이라는 입장도 견지하셨지만 또 하나 상황 중심적인 해석이라는 장도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에 주목하라는 교훈입니다. 신앙인들에 있어서 절대로 따라가지 말아야 하는 사상이 하나 있습니다. 근본주의입니다. 근본주의라는 말이 이미 아주 보수적인 사상으로 학습된 자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무서운 사상인데 가장 극단적 근본주의를 예로 든다면 축자영감설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수구적인 사상입니다. 성경은 글자 하나하나를 성서기자가 하나님의 영이 불러주는 대로 썼다는 것을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기록한 것임을 부인하면 그건 이단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한 문자, 한 문자는 절대로 오류가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은 그건 생떼이고 무지함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성경은 번역상의 오류가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류가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린다고 저는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성경이 번역상의 오류가 있는 것은 성경은 구전으로 전해 오던 하나님의 신탁들과 수많은 역사기록과 예언자들의 선언들을 성서 기자들이 손으로 직접 수기로 받아 기록한 글들입니다. 그러니 문법적인 오류, 앞뒤 배열의 모순, 이 번역 사본과 저 번역 사본에서 보이는 상이성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자들처럼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구절을 무기삼아 자간 하나하나가 완전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리어 무지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이하는 일은 이렇게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기록들 중에 잘못된 해석, 번역, 잘못된 이해들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전제할 때 우리들이 당연히 인정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의 이해는 성서를 성서로 푸는 일차적인 해석과 더불어 당시의 시대적 상황, 역사적 배경, 저자의 의도, 당시 문자의 학문적의 의미 등등을 연구하여 그 시대에 맞게 상황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생각하여 해석하는 것을 불신앙적인 것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도리어 너무나 불신앙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출애굽기에 기록한 동해보상법의 판을 뒤집어 업으셨다고 해서 구약 시대의 그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의 상황과 배경에 따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해석과 더불어 이제는 주님의도래 이후에 사랑과 용서가 더 필요한 시기임을 예수께서는 직시하셨기에 뺨맞은 이야기도, 옷 이야기도, 오리 십 리 이야기도 끄집어내신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울이 말한 본문도 해석하고 접근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오늘 본문의 양상은 바울이 그 동안 공격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고린도교회의 엘리트주의자들을 배려한 본문 텍스트라는 사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너무 양심에 대해 소심할 필요가 없다는 표현을 무려 3번에 걸쳐 반복한 것이고, 고린도 지역의 아고라(시장)에서 팔고 있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들을 먹는 것에 대하여 너무 께름칙하게 생각하지 말라고도 한 것이고, 심지어는 불신자가 초청한 식사 초대에 가서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으라는 자유함도 허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노파심일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의 이 배려심을 전제한다고 할지라도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신학적 목적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지지자들(가난한 신자들, 비주류에 있었던 별로 배우지 못했던 자들)에게 잘못하면 비난의 화살을 맞을 수 있었던 모험을 시도한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을 희소화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31절 본문을 나누어 보십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자들의 구성 분포도는 각기 달랐습니다. 헬라인, 유대인이라는 출신 성분의 차이도 있습니다. 헬라적 다신교주의자, 유대적 유일신론자, 소아시아라는 지방을 국가권력과 군사력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적인 우상숭배자, 무신론자 등등의 다양한 배경 속에 있었던 자들이 모여 있던 공동체가 고린도교회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보는 것처럼 결코 녹록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고린도전서 9:20-22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렇게 행동하였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빌립보교회의 교우들에게는 이렇게 행동했음을 보고합니다. 빌립보서 4:11-12절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로마서 1:14절은 압권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이 왜 이렇게 카멜레온식의 반응, 사귐, 교제, 경험들을 마다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목적 때문에 8장에서는 엘리트주의자들에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던 자들을 위한 메시지를 선포했고, 오늘 본문 10장을 마감하면서는 그 엘리트주의자들을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한 메시도 남긴 것입니다. 여기까지 어려운 본문 해석을 잘 따라와 주신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저는 오늘의 언어로 본문 설교의 은혜를 나누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돌직구를 던지겠습니다. 세인 공동체를 섬기는 지체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이제 조금 부담스러운 질문으로 돌입하겠습니다.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교회를 나오십니까? 대답하십시오. 여러분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까? 김기현 목사의 ‘말씀 앞에 울다’에 나오는 글 중에 저를 떠 전율하게 만든 또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김 목사는 우연히 히브리서를 묵상하다가 한 구절에서 뻘쭘했다고 했습니다. 그 구절이 히브리서 12:1절이었음을 보고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이 구절을 읽은 김 목사가 이렇게 구절 해석을 했는데 정말로 감동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은 삶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신자와 교회로 말미암아 확증된다. 증거 부족이 아니라 증인 부족이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가 문제다. 기독교를 논리로 증명하기보다는 생활로 증언하라. 허다한 증인도 한 명의 증인에서 시작된다. 그가 너였으면 좋겠다.”(p,162) “증거 부족이아니라 증인 부족이다. 메시지 부족이 아니라 메신저 문제다.” 라는 그의 말이 저의 심장을 도려내고 후벼 팠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한국교회 신자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신체는 딱 한 가지 밖에는 없는 것 같아 유감천만이다. 입이다.” 너무나 수치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합니까? 내 영광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일전에 소개한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일찍이 이렇게 신자와 비신자를 대비하여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사이에 타인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함께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 어떤 ‘신자’는 ‘홀로 족한 자’들이며, 어떤 ‘비신자’ 는 ‘공감하는 자’들이다.”(단순한 기쁨, pp,226-227) 피에르 신부의 글을 접하다가 묘한 그러나 별로 기분 좋지 않은 여운을 느꼈습니다. 아십니까? 이 땅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비신자들이 즐비한 반면, 하나님의 영광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 영광을 위해 사는 신자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는 이 기막힌 아이러니를.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31-33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결론) 이제 찬양을 한 곡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그는 왕 내 노래 내 생명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 영광을 위해 사는 자는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