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섞지 말라2024-02-26 15:28
작성자 Level 10

8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2번째 강해)

 

제목섞지 말라

본문고린도전서 10:14-22

 

서론)

 

교회의 무덤이라는 뉴욕의 지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하나님께 열광하게 만든 뉴욕 리디머 교회의 담임목사인 팀 켈러가 근래에 쓴 내가 만든 하나님’(counterfeit God)에 기록된 에필로그를 보면 아주 의미 있는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책 제목처럼 내가 만든 신을 내가 섬기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식별 방법을 논한 대목입니다.

4가지를 소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의미 있어 보이는 지적이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① 생각의 내용을 점검해보라.

혼자 있을 때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의 신앙이다다시 말해 마음속의 실제의 신은 따로 신경 쓸 일이 없을 때 저절로 흘러가는 생각이다혼자 있을 때 당신이 즐기는 공상(空想)은 무엇인가무심코 당신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상상은 무엇인가하나님이 아닌 그 공상(空想)과 상상이 당신이 만든 신이다.

②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라

돈을 쓰는 대상이나 방법을 보면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어떤 대상에게 지출하는 돈이 너무 많아 절제에 힘써야 한다면 그 대상은 내가 만든 우상의 징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③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해당하는 식별 법이 있다당신의 일상 속에서 당신의 구원은 진짜로 무엇인가를 질문했을 때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외의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면 이런 경우이다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분노하거나 서운해 하는 경우다왜냐하면 그 서운함과 분노가 요나가 섬기던 바로 라는 신이기 때문이다.

④ 자기 스스로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기감정이 있는지 확인하라.

이 감정의 소유자는 내가 만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자이다화가 날 때 이렇게 자문해 보라. ‘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 있는가그것이 바로 내가 만든 신이다.

팀 켈러의 글을 접하면서 제가 어렸을 때저의 어머님이 하셨던 일이 하나 기억났습니다.

큰 형님의 귀가 늦어지면 큰 형님이 먹을 밥공기를 장롱 이불속에 넣어두셨다가 형님이 들어오면 꺼내주셨던 기억입니다.

작은 형님과 저의 밥공기를 그렇게 하신 것은 기억에 없습니다.

아버님의 사업이 잘 되어서 부를 축적하고 있을 때도 그랬고아버님이 사업에 실패하여 살림이 궁색해졌을 때도 매일반이었습니다.

큰형님과 저희들의 위상은 같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신앙생활을 하시기 전까지 유교적인 전통에 붙들려 있었던 어머님의 사고 자체의 틀이 장남에 대한 배려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레벨로 보시지 않은 것입니다.

왜 제가 이 생각이 들었을까요?

나의 주군이신 하나님과 내가 만든 신의 위상을 같은 레벨로 보는 것바로 이것이 우리들이 말하는 우상숭배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팀 켈러와 같이 저 역시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팀 켈러의 지적에 참 탁월한 통찰이라고 느낀 것이 이 대목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만든 신이 함께 겸하여 경배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일반적인 저와 여러분의 생각 속에 담겨져 있는 속설 중에 하나는 우상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버렸다고 미리 단정해 버리는 착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휴가 중에 오어사(吾魚寺)라는 사찰이 있는 관광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대학 입시를 앞둔 철이라 많은 불교 신자들이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을 외우는 대웅전의 주지를 따라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적인 이해 중에 바로 돌로 만든 부처상에 절을 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행위라고 정의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통상적 이해가 아닙니까?

그러나 팀 켈러 목사의 말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정말로 두려운 우상숭배는 조금 전에 언급한 하나님과 하나님으로 대체되어 있는 일체의 만들어진 신을 대등한 레벨로 평가하여 겸상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는 만족하지 못함으로 그 만족하지 못하는 2%는 다른 것을 대치하겠다는 발상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로 두렵고 또 두려운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에게 만족을 주는나를 만족시켜주는 우상도 함께 섬기는 것이 오늘 현대인들이 버젓이 행하고 있는 우상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도 아주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강해 설교를 통해서 몇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함께 밝혀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고린도교회의 주류층을 이루고 있었던 엘리트 신자들이 갖고 있었던 교만한 믿음이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제물을 금기시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자유하다는 그들의 선언이 바로 그런 종류의 교만함임을 이미 살폈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제물 역시 아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행위를 가지고 설레발치지 말라는 그들의 단호함에 대하여 바울이 냉철하게 비판했음을 지난 설교를 통해 우리는 나누었습니다.

고린도전서 8:9-13절을 복기하겠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우상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견고함이 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제물에 대하여 단호하게 단절하겠다는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바울의 신앙적 결단에 우리는 지지를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 8장의 바로 이 대목의 연장선상에서 함께 이해해야 하는 텍스트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4절에서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상숭배를 피하라

바울의 지론 중에 이 구절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만의 신학적 토대가 있어 보입니다.

우상은 싸움에 대상이 아니라 피함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그만큼 우상에 대한 보이지 않는 힘을 바울 스스로가 인정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교훈입니다.

이렇게 선언한 바울은 본문에서 세 가지의 식탁공동체를 예로 제시하는 강수를 둡니다.

① 16-17주의 만찬입니다.

② 18희생 제사와 관련이 있는 유대인들의 식탁입니다.

③ 19-21우상 신전 식사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다른 종류의 식사이지만 공히 담겨 있는 공통분모가 보입니다.

무엇입니까?

이 식사에 참여한 대상자와 식탁의 종류에 따른 신과의 영적인 교제라는 공통점입니다.

무슨 말인지를 조금 더 부연하면서 설명하겠습니다.

바울은 제일 먼저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찬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주목할 것은 바울이 오늘 텍스트에서는 주께서 흘리신 보혈을 상징하는 잔보다 주님이 베풀어주셨던 떡이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끼니가 되는 것은 떡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6-17절을 읽어보십시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에 참여하여 공동체가 함께 떡을 나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이기에 떡을 함께 받아먹는 순간은 우리는 그 분과 하나 되는 영적인 신비로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이미 이 놀라운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54-58절을 주목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런데 이렇게 성찬에 참여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는 영적 코이노니아는 단지 성찬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울의 날카로운 신학적 성찰입니다.

18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참여했던 제사의 제물을 먹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톰 라이트 교수의 번역으로 18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육신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십시오제물을 먹는 사람들이 제단에 참여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식탁공동체를 통한 영적인 교제를 바울이 우상숭배의 과정에서 진행된 식탁공동체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임을 지적한 해석은 그래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무거운 대목을 바울이 어떻게 기술하고 있습니까?

본문 19-21절입니다.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이 구절의 개역개정판 내용을 유진 피터슨은 어떻게 기록했는지 보겠습니다.

이제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바친 것입니다우상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심각합니다그것은 바로 마귀입니다바라건대여러분은 스스로를 여러분보다 못한 것으로 떨어뜨리지 마십시오여러분은 둘 다 가질 수 없습니다여러분이 한 날은 주님과 잔치를 벌이고이튿날은 마귀와 잔치를 벌일 수 없습니다.”

바울의 이상의 선언을 통해 오늘 주일 설교에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두 가지의 교훈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날내가 만든 우상과 어울린다는 현대적 의미가 그 첫 번째의 교훈이요그런 우상과의 어울림을 허락하지 않는 방법이 그 두 번째의 교훈입니다.

 

1) 우상을 이용하고 있는 흑암의 세력에 대한 관대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누차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상이라는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진단을 저 역시 동의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상이 아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우상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바른 생활을 거침없이 방해하는 흑암의 영적 세력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관대함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치명적인 세력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박국 예언자의 소리를 들어보십시다.

하박국 2:18-19절입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우리가 알다시피 예언자 하박국의 시대는 주전 600년경인 여호야김 시대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바벨론의 서슬이 시퍼런 상태에서 남 유다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위험한 시기였음을 알게 해 줍니다.

물론 유다는 이 기록이 존재한 이후 약 15년 뒤에 바벨론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비극을 맞게 되지만 하박국이 이런 운명을 맞이할 남 유다의 대변자로서 하나님께 항의하는 질문에 하나님께서 위로의 메시지를 남긴 것이 읽어드린 18-19절의 배경입니다.

바벨론이 섬기는 우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돌입니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무였습니다.

그 돌과 나무는 금으로 입혀졌고스승이라고 불렸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나무와 돌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하나님은 예언자 하박국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아무 것도 아닌 돌과 나무에게 깨어나라고 말하는 바벨론의 어처구니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아무 것도 아닌 나무와 돌에게 일어나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무지가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단언하셨습니다.

생기가 없는 돌과 나무에게는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고 그것들에게 말하라고 하고일어나라고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임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우리는 떠올려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우상처럼 떠받들어진 돌과 나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나무와 돌을 신격화해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던 존재가 있었다는 배후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다이모니온’ 즉 귀신’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단어가 나왔으니 노파심으로 교우들에게 전합니다.

귀신이라는 단어를 한국적 용어의 개념으로 치부하여 평가 절하하는 누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입에서 피를 흘리며 발이 없이 떠다니는 소복이 입은 귀신을 상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박국 예언자가 말하는 돌과 나무더라 깨어나라고 말하라고 외치게 한 뒷배경의 세력오늘 본문에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쫒지 말고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맘대로 먹으라고 종용했던 세력 즉 귀신은 우리들이 한국적 감각으로 생각하는 그런 귀신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엄청난 흑암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30년을 목회하면서 만났던 귀신들을 소개합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런 신자들을 많이 만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누가복음 18:11-12)

저는 이렇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저는 아무개와는 조금은 다릅니다.

저는 성별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나름 봉사와 헌신을 감당해 왔습니다.

저는 술담배를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님 때문에 사교적인 오락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없는 시간 쪼개서없는 물질 쪼개서 교회에 유익이 되는 드림들을 바쳐왔습니다.

저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만하면 저는 꽤 괜찮은 신자 아닙니까?

일인칭 주격의식이라는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입니다.

직전 교회에서 단 위에서 1부와 2부 그리고 주일 오후 예배를 참여한 지체가 저에게 그 날따라 예배가 끝날 때마다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목사님오늘 설교는 히트였습니다히트아주 멋있는 설교였습니다최고였어요최고다음 주도 기대할 게요,”

목사에게 설교를 통해 교만에 빠지게 하는 아주 질 나쁜 귀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엄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애굽기 20:4)

이 선언의 대단한 교훈적 압권이 무엇입니까?

우상을 만들지 말라와 형상도 만들지 말라가 아니라 너를 위하여입니다.

오늘우리들을 쓰러뜨리는 흑암의 세력은 너를 위하여를 부추기는 존재의 일체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언자 미가의 글에서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미가 6:6절 말씀입니다.

교우들과 함께 미가서 강해를 나눌 때 드렸던 미가 시대의 영적 상태는 만신창이기 된 시대였음을 주지했었습니다.

주전 8세기 후반에 남왕국 유다는 사회적으로경제적으로 불의가 만연했습니다.

부유한 지주들은 가난한 농민들을 수탈했고당시 사회 지도층의 힘이 있는 자들은 식인종들과 같은 악을 행하였습니다.

힘없는 자들의 노동을 착취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 있어서 최후의 양심적인 보루가 되어야 할 법정은 뇌물과 더러운 돈으로 오염되어 더 악질적인 판결을 내리는 죄악의 보루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당시 서민들과 민초들이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시대의 예언자들 즉 종교 지도자들뿐이었는데 당시 맘몬에 물든 종교지도자들은 한 술 더 뜬 도적놈들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미가 3:11절은 당시 영적 상태의 절정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렇게 엉망인 삶을 살던 종교인정치 지도자들그리고 부유층에 있었던 자들은 자신들의 일탈들을 보상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꼬박꼬박 성전에 나와 제사를 드리고 제물도 드렸습니다.

읽어드린 6:6절은 가증한 자들의 독백입니다.

다시 읽을까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이 기막힌 독백을 드린 자들을 향하여 예언자가 선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미가 6:7절을 심금을 울립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천둥이요 벼락같은 말씀이 아닙니까?

쓸데없는 짓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 나와 몇 푼의 맘몬들을 헌금함에 떨어뜨리면서 애교떨거나 아양 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벼락으로 다가온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순결한 네 몸이라는 것입니다.

아벨과 가인의 제사 기록에 보면 대단히 중요한 한 구절을 뱔견하게 됩니다.

그냥 스쳐 지나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지만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구절입니다.

창세기 4:4절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무슨 말입니까?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그 기름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드림이 있었습니다.

자기도’ 드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드려지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빼고 다른 것들이 드려지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나에 대하여만 너그러운 것을 용인하지 마십시다.

오늘제가 스스로 각성하고 긴장하고 고삐를 죄는 것은 나에 대한 관대함입니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영적 세력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공격받고 있는데도 긴장하지 않는 것철저한 오늘의 우상숭배입니다.

기독교가 너무 배타적이야나는 영적인 수용성이 있는 참 괜찮은 존재야라고 해석하는 자만감철저한 오늘의 우상입니다.

바울이 저와 여러분 정도의 영적인 실력이 없어 이렇게 절규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2) 이 우상을 허용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본문 14절을 공격적으로 인용하며 권고합니다.

앞서 언급한 오늘의 우상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다.

우상과의 긴장관계에서 내가 그 우상에게 넘어지지 않는 방법은 바울이 14절에서 말한 방법입니다.

피하는 것입니다.

피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휴고를 유진 피터슨은 빠져 나오라고 번역했고톰 라이튼 교수는 멀리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공통점이 보이십니까?

그 자리를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그 장소를 떠나는 것입니다.

우상을 돋보이게 하는 자리에서 머물러 있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권고했던 말세에 일어날 일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의 그 돌아섬이 우상 숭배의 자리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요즈음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비빔밥을 먹곤 합니다.

비빔밥이 때로는 맛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저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볶음밥도 시도해 보려고 하는데 아직 볶음밥은 비빔밥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밥이야 얼마든지 섞을 수 있습니다.

근래 퓨전이라는 장르의 음식들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저 역시 핸드드립 커피를 요 근래는 한 가지 콩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한 세 가지를 섞어 먹는 경우가 있는데 아주 색다른 맛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음식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코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양태를 섞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혼합주의적인 신앙이라는 변종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본문에서 경고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관대하라고 종용하는 악한 시대입니다.

귀신의 식탁에 대하여 문을 열라고 압박하는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내가 섬기는 현대적인 우상들에 대하여 관대한 내 신앙의 자리를 피하십시오.

우리가 닮고 따르고 달려가는 것은 신앙의 순결함입니다.

섞지 마십시오신앙에 관련해서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