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1번째 강해) 제목: 진의(眞意) 본문: 고린도전서 10:13 서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위험에 처하여서도 겁내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게 하시고 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이 세상의 싸움터에서 동조자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지 마시고 인생과 싸워 이길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근심스런 공포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지 마시고 자유를 얻을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나이다. 도와주소서. 일취월장하는 성공 속에서만 신이 자비롭다고 생각지 말게 하시고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신이 내 손을 쥐고 있다고 감사하게 하소서. 신학교를 다닐 때 타고르의 이 시어들을 만났습니다. 우리에게는 ‘동방의 등불’ 이라는 시를 헌사 한 좋은 친구로 기억에 남아 있는 인도의 시성이라고 할 수 있는 라빈 트라나트 타고르의 ‘기도의 시’입니다. 힌두교 신앙의 거봉이라고 할 정도로 타 종교의 정점에 있었던 위인이었지만 그가 남긴 이 기도 시는 기독교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도 역시 귀한 가르침을 주기에 곱씹어도 괜찮은 금언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목사로 사는 저에게 타고르의 시어 중에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은 시의 제 1연의 2행이었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위험에 처하여서도 겁내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 기독교인들조차도 이 시어의 1연의 1행에 목이 메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허나 아쉽게도 2행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시험이 나에게 없도록 해 주십시오.” 이것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기도문입니다. 그러나 타고르의 고백처럼 더 중요한 다음의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시험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타고르가 2행을 기도한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힌두교적인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제가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타고르는 고전적인 힌두교의 폐해들과 맞서서 싸운 전사였기 때문입니다. 힌두교가 부유층을 위한 가진 자의 종교로 대변되는 것과 도드라지게 싸운 자가 타고르였습니다. 그는 힌두교가 조직과 제도에 목이 메 천민 계급의 사람들을 옥좨는 종교로 서 가는 것에 분연히 맞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종교의 핵심적인 본질이 변질되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고 도리어 상대적으로 차별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했던 진정한 종교인이었기에 저는 그가 고백한 1연의 2행의 고백을 높이 평가합니다. 신앙인의 참 된 본질의 삶을 고민한 흔적이 그의 고백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과 성찰을 지탱해 온 타고르였기에 그는 이 아름다운 고백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시험이 오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타고르를 소개한 이유는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선언과 기막힌 매치를 이룰 수 있겠다고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선언한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본문 구절은 참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메시지로 자리매김한 구절입니다. 저 역시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마다 이 구절로 인해 힘을 얻고 다시 용기백배할 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일반성도들이 알고 있는 내용과는 조금은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이 구절을 이해하는 폭은 시험에 온다고 해도 괜찮다는 위로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시험이 온다고 해도 감당할 시험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 시험이 와도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는 시험이기 때문이라는 위로가 거의 대부분의 이해일 것입니다. 허나 저는 이 구절의 감동을 거기에만 머무는 감동이 아니라 더 큰 의미의 감동으로 외연을 확장해 나아가곤 합니다. 그것은 시험의 진의(眞意)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의 진의는 과연 무엇입니까? 저는 바울의 이 선언의 역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 가지의 예외 조항입니다.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시는 시험의 예외 조항입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시험이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시험의 예외 조항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이다. 말장난이 아니라 분명한 신학을 근거한 정의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험은 순전히 내 책임입니다. 마태복음 4장이 이것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광야로 나가셔서 예수께서 시험을 당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험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나에게 절하면 부귀와 명예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험의 팩트는 너의 아버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의 이 주문에 예수께서 물리치신 도구가 무엇이었습니까? 신명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고(신6:16), 주 너희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신 6:13) 주님에게 강력하게 시도되었던 하나님을 시험하라는 사탄의 명령은 오늘의 시대에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시도되고 있다는 점에 긴장하고 경악해야 합니다. 나의 생존을 책임져 주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지금 가장 완벽한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주는 보이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마라와 엘림을 거친 뒤에 신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엘림의 단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맛 본 백성들이었지만 신 광야에 도착한 그들의 현실에 또 닥친 고통은 배고픔이었습니다. 해서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서 내놓으신 처방이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만나와 메추라기 공급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손에 집어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첫 반응을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16:31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그렇습니다. 꿀 섞은 과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던 이스라엘이 에시온게벨에 이르러 호르 산을 출발할 때 광야 생활에 싫증이 난 그들이 다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면서 내뱉었던 만나와 메추라기의 표현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봅니다. 민수기 21:5절입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꿀 섞은 과자’가 ‘하찮은 음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담지(擔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이라는 것이 21세기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 역동적인 교훈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또 다른 대체의 욕망의 하나님을 요구하는 불신앙입니다. 지난 금요일, 남창규 한의원에서 침 치료를 받는 데 칸막이는 쳐져 있지만 옆 베드에게 치료를 받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라이브로 듣게 되었습니다. 한 여성은 제천에 소재해 있는 구원파(기독교 복음 침례교) 소속 신자였고, 또 한 명의 여성은 30년 동안 성당을 출석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라이브로 생방송되는 두 여성의 목소리에 의존해 보니 두 사람의 의견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구원파 여성: 우리들이 지은 죄를 예수께서 다 감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짓는 죄는 이미 용서받았기에 다시는 그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는데 기존 교회에서는 날마다 회개하라고 다그치는 것을 보니 기존교회는 엉터리라는 결론. 천주교 신자: 아무리 죄를 회개해도 사림이 착하게 살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함. 문제는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서로에게 분명한 확신을 갖고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는데 서로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같은 벽을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옆에서 라이브로 그들의 부흥회를 청취하는 목사로서 느낀 소회가 이렇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게 하려면 제발 무례하게 떠들지 말라” 자기의 신념은 자기의 신념이지 하나님의 신념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자기의 신념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까? 자기의 신념은 그냥 신념이지 하나님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은 결코 만족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조금만 불편하면 더 욕망적인 만족을 주는 것이 나타날 때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그냥 하나님으로 만족해하는 신앙입니다. 더욱 자극적인 무언가의 하나님으로 대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약 주사를 놓아주는 하나님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의 영혼의 만족이 아니라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해 흡족한 만족을 주기를 소망하는 데 그것들을 주지 않고 감감무소식으로 있는 하나님을 못견뎌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적용해 보기를 원합니다. 결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을? 이런 참담한 삶을 살면서 본인에게 임한 시험이 오면 너무나 자랑스럽게 고린도전서 10:13절을 인용하는 그런 착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에게 인한 시험의 결과는 멸망이요 파멸이지 하나님이 그 시험을 이길 피할 길을 주신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시험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 임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 교우들에게 담대하게 선포하는 메시지를 지지해 줄 대단히 중요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주기도문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마태복음 6:13절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구절 전반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은 기도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주님의 이 기도를 인용하면서 예수님도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고 기도했는데 어떻게 목사님은 시험이 오지 않도록 해달라는 가도에 대하여 부정적이냐고 항의하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항의하는 분의 의견을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시험에 대한 개념을 항의하는 분들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 예수께서 언급한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 ‘페이라스몬’은 대체적으로 악으로부터 임한 시험을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시험이 악의 영역에 함몰될 때 임하는 시험이라는 의미입니다.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으로 사역하는 정용섭 교수의 ‘주기도란 무엇인가?’ 를 보면 정박사가 설명한 ‘페이라스몬’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출애굽기 32장을 예로 들어 ‘페이라스몬’을 설명합니다. 모세의 진두지휘아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애굽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시내 산에 도착을 했습니다. 사실, 3개월 만에 시내 산에 도착을 한 것은 맨 처음 계획이 틀어진 결과입니다. 한 달이면 가나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불순종으로 인해 지체된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들은 광야에서의 최소의 생존 조건에서 본인들이 처한 현실이 매우 열악한 것을 알고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 격분의 결과로 만들어낸 것이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정용섭 교수는 바로 시내 산에서 벌인 이 난장을 예로 들면서 시험(페이라스몬)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알려준 그 신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이’요, 그런 신의 약속을 믿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런 신보다는 당장 생존의 조건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다. 사람들을 금송아지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니라”(P,154) 이 성경의 예를 든 정용섭 교수의 다음 진단이 저에게 아주 크게 공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대를 그대로 채워 주는 분이 아니다. 해서 그 분을 신뢰하고 살기가 힘든 것이다. 결국 시험이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P,153) 기막힌 통찰입니다. 악의 영역에 함몰되어서 인간이 스스로 빠져드는 시험은 하나님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로부터 임하는 시험이라는 해석은 탁월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이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의 주님의 간절한 기도에 담긴 시험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악한 시험입니다. 왜 주님이 이렇게 기도를 가르치셨을까요? 당연합니다. 이 시험에 드는 자는 피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험에 빠진 자는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이렇게 영적 긴장의 끈을 놓지 말 것을 경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경고성 멘트로 옥좨는 일로 마무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 긴장을 놓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임하는 시련들을 직시하면서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남긴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개역개정판으로 읽지 않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앞길에 닥치는 시험과 유혹은 다른 사람이 직면해야 했던 시험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한계 이상으로 내밀리지 않게 하시며, 그 시험을 이기도록 언제나 곁에 계시며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진의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들이 당하는 시험에 하나님이 간섭해 주신다는 그 진의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의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당하는 시험에 대해 뒤짐 지고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진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결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은혜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금세기 프랑스인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1위에 오른 아베 피에르 신부가 쓴 ‘단순한 기쁨’이라는 명저에서 저자가 ‘죄’에 대해 정의한 글이 제 심장에 남아 있어 노트해 두었습니다. “죄란 더 이상 하나님에게 의존하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 오직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운명이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으며 혼자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아무 것도 신세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P,175) 제가 아베 피에르의 이 글을 기억에 담아 둔 이유는 피에르 신부의 이 말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험에 든 케이스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보는 시대,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종교가 문화라고 인식하는 절망의 시대의 가장 치명적이고 고약해서 치유 불가능한 죄는 하나님을 한 시대의 유행이었던 문화의 아이콘으로 보는 죄입니다.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종교의 창시자로 보는 죄입니다. 이 시대의 공통분모는 하나님의 범신론적 하나님화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담임목사가 역설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들입니다. 하나님의 진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지체들이 하나님의 진의를 선명하게 파악하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은 종교와 문화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찬양을 한 곡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는 이 곡을 부를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곡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격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함으로 인해 당하는 여러 시험의 주인공들입니다. 믿음으로 이 곡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의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찌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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