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39번째 강해) 제목: 몸싸움 본문: 고린도전서 9:24-27 서론) 인도는 간디의 나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간디의 정신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잠식하고 있는 나라이며, 앞으로도 간디의 삶과 흔적들은 영원할 것이라는 의견을 모으는데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간디의 정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간디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비폭력저항주의인 샤티야그라하 운동을 간디의 뒤를 이어 계승한 비노바 바베가 그렇고, 전 세계를 도보로 여행을 하며 핵 포기를 주장한 비노바 바베의 제자인 녹색 성자로 불리는 사티스 쿠마르가 그렇습니다. 사티스 쿠마르가 쓴 ‘끝없는 여정’을 보면 그가 일본의 마츠모또 여행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만난 스즈키를 소개합니다. 스즈키는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음악가인데 그의 교수법에 대한 감동을 책에 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먼저 말하기를 배우고, 구 후에 쓰기와 읽기를 배우는 것처럼 나는 아이들이 먼저 귀와 가슴으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악보를 읽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p,375) 쿠마르의 이 글을 접하다가 ‘귀와 가슴으로 연주한다는 것’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 보았습니다.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문화에서 그리 어려운 일 같지는 않습니다. 익숙한 언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울리는 영적인 연주라고 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하여 거의 말하는 적이 없지만 오늘은 예외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모 방송국에서 방송하는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 프로에 우리들이 잘 아는 복음성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를 부른 가수로 익히 알려진 크로스오버 가수인 소향 자매가 출연하여 소위 말하는 가수왕을 6주 동안 석권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프로그램에 나와 불렀던 노래들은 분명히 대중가요들입니다. 어느 날,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이건 설교에 꼭 한 번 인용해야지 하는 순간을 포착한 적이 있습니다. 소향 자매가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에 평가를 하는 심사위원이 이렇게 평가의 변을 내리는 것을 보고 짜릿했던 적이 있습니다. 분명 그날 소향 자매가 대중가요를 불렀는데 한 심사위원이 다른 심사위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래가 은혜롭지 않나요?” 그는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복음성가 경연 대회가 아니라 대중가요 경연 프로그램인데 도 이렇게 표현 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대중가요를 불렀는데 생뚱맞게도 비 그리스도인의 은혜롭다는 평가를 받았을까? ‘노래를 부른 자의 숨길 수 없는 영적 내공’ 이것이 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귀와 가슴으로 연주하는 연주를 누가 합니까? 욕망과 탐욕으로 얼룩진 자들이 바이올린의 악보를 잘 보고 연주 기법이 탁월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연주일까요? 어불성설입니다. 영적인 내공이 없는 자는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감동, 그것이 바로 귀와 가슴으로 전하는 은혜로운 울림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참 감동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본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강해를 통하여 바울의 범접할 수 없는 영성의 흔적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누명과 헐뜯음 당함과 비아냥거림 당함 속에서도 일체의 것들을 참으며 오직 복음의 장애를 받지 않게 하겠다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감수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바울의 그 어마어마한 삶을 나누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고린도전서 9장 텍스트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본문입니다. 그야말로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영성의 끝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감동을 주는 본문입니다. 바울은 아주 계산적이고 잇속에 바싹한 고린도교회의 이기적인 신자들을 향하여 아덴에서 열리는 올림피아 경기처럼 당시 고린도에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스미안 경기를 빗대어 그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본문 24-25절을 읽겠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메타포(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이스미안 경기에 나서는 자들의 목적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상 받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부인할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주목해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받는 상은 언젠가는 썩는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바울은 이렇게 역설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며 치열한 복음의 전선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다니엘서를 읽다가 무릎을 친 구절이 있습니다. 다니엘 2:31-35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 대한 해몽을 해준 다니엘의 설명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감동이 무엇으로 여러분은 보이십니까? 느부갓네살이 본 우상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거대한 신상이었습니다. 머리는 정금으로 만들어졌고, 가슴과 팔은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배와 넓적다리는 놋으로, 종아리는 철로, 발은 철과 진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복음주의권의 학자들은 이 신상의 해석을 정금 머리는 바벨론제국, 은으로 된 가슴과 팔은 메대와 바사제국,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는 헬라제국, 그리고 진흙과 쇠로 된 종아리는 로마 제국울 상징하는 것으로 일견 동의합니다. 또한 이 거대한 우상을 무너뜨리는 도구가 등장합니다. 있는 그대로 돌덩이입니다. 이 돌덩이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이상의 해석은 거의 모든 복음주의적인 학자들이 동의하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의견일치를 보는데 어렵지 않은 다니엘의 꿈 해몽 내러티브는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돌의 상태입니다. ‘손대지 아니한’ 손을 대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시사입니다. 인간이 터치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것은 변질되지 않습니다. 썩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적확한 진리입니다. 신 바벨론 제국인 세속적인 가치는 반드시 썩습니다. 메대, 바사, 헬라, 로마 그리고 이 땅에 존재하는 세속의 모든 나라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따라가는 자들의 나라와 삶의 가치는 절대로 썩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 24-25절은 정답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멘을 하면서 한 가지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선언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경기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자들 즉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해서 사는 자들은 손 놓고 있으면 됩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바울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해 싸운 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의무 조항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여기에 기록된 ‘절제하다’의 번역인 ‘엥크라크레타이’를 유진 피터슨이 기막히게 번역했습니다. “되는 대도 살지 않는 것” 그렇습니다.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절제는 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막 사는 랜덤 인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의 구문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되는 대로 사는 것은 나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절제하는 삶이란 막 사는 삶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삶입니다. 화요일 소그룹 지체들과 함께 보고 있는 ‘삶의 메시지다’에 보면 김기석 목사는 주자의 촌철살인을 하나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바르게 사는 삶의 태도로 삼을 만합니다. “거인욕 존천리(去人欲 存天理)” 와 상반되는 또 다른 삶인 “거인욕 폐천리(居人欲 廢天理)입니다.” (p,129)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떠나면 진리와 함께 동거할 수 있지만, 사람이 욕심과 함께 동거하면 진리가 떠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엥크라크레타이’ 즉 절제하는 삶의 모본입니다. 이 삶을 바울은 본문 26절에서 기가 막힌 표현으로 보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두 가지의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향방 없는 것 같이 하지 아니하고’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새벽에 교우들과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는 지금 저에게 2017년 대한민국 개신교회의 현직 목사로 살아가고 있는 자로서의 뼈저린 가슴 아픔을 고스란히 전수받고 있는 듯한 살아 있는 말씀의 체휼을 경험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새벽, 읽은 예레미야 28장은 저에게는 절절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받은 은혜의 구절 한 곳을 전해 드립니다. 예레미야 28:10-11절입니다.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꺾고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참 선지자 예레미야와 궁정에서 예언하던 거짓 선지자의 대부인 하나냐의 한 판 승부 기사입니다. 당시 권력의 상층부와 기생하고 있었던 다시 말해 부와 권력을 쥐고 있었던 길 예언자이자 거짓 예언자인 하나냐가 아무런 물리력도, 권력도 갖고 있지 못한 예레미야의 목에 걸려 있는 멍에를 빼앗아 꺾어버리는 폭력을 자행합니다. 예레미야가 목에 걸고 멍에는 남 유다가 앞으로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된 이후에 짊어지게 될 멍에를 상징하는 하나님의 사인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냐가 빼앗아 짓밟은 것입니다. 남유다는 멸망하지 않을 것임을 하나냐가 인위적인 방법과 행동으로, 힘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예언을 한다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능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한 것입니다. 아마도 예레미야 28장의 기록만을 놓고 보면 하나냐의 압승으로 보입니다. 예레미야는 일방적으로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냐의 한판승으로 결론을 맺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일방적으로 당하였지만 하나님의 반전이 있었습니다. 하나냐의 죽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냐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은 후 2개월 만에 죽음을 당합니다. 예레미야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장면, 아무런 힘이 없었던 예레미야를 보면서 저는 이상하게도 상처를 당한 것이 아니라 전율하는 감동을 받습니다. 한 구절 때문입니다. 다시 예레미야 28:11절을 목도하겠습니다.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냐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년 안에 모든 민족의 목에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와 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후반절 마지막 부분이 보이십니까? “예레미야가 자기의 길을 가니라” 예레미야의 영적 내공이 보이십니까? 그 살벌한 살해의 위협, 주류들의 폭력, 여론의 등 돌림 등의 고통 속에서도 예레미야는 자기의 길을 갔다고 예레미야 기자는 표현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한 선언과 매치시켜 보십시다. 향방 없는 자처럼 허공을 치는 달려감이 아닌 분명한 목적을 향하여 달려가는 달려감을 예레미야는 걸어갑니다. 소리는 없지만 엄청난 무게의 아우성을 다가오는 바울과 예레미야의 외침이 가슴을 떨리게 합니다. 시카고 대학의 신학과 기독교 윤리학 교수인 랭던 킬키는 그의 수작 ‘산둥 수용소’에서 라인홀드 니버의 촌철살인을 소개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동적으로 해소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은혜가 충돌하는 전투지이다. 따라서 인간의 교만이 이기면 종교는 인간 죄악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전투 속에서 인간 자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자신의 이익이 되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종교는 모든 인간이 갖는 이기심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P,360) 엄청난 통찰입니다. 우리 세인교회의 교우들은 여러분의 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이기고 있습니까? 우리 세인교회는 인간의 이기심이 보란 듯이 이기는 공동체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자아가 하나님을 만난 철저하게 부서지는 승리의 공동체입니까? 내가 섬기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한국교회가 니버가 말한 후자 즉 절제하는 그래서 아무렇게 막 살지 않는 교회의 길을 가야 하는데 반대로 절제하지 않아 막 살고 있는 전자의 길을 가고 있음에 통탄할 수밖에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세인교회가 잡아야하는 향방이 보여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세속의 거대한 공격이 우리들을 짓누르는 압박이 있어도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합니다. 바울처럼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기 위해 절제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마지막으로 얻어야 할 교훈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절제하는 진정성이 있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테제입니다. 그 답을 본문 마지막 절이 줍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절제란 내 몸을 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쳐’ 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 단어를 ‘휘포피아조’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이 의미심장합니다. ‘눈 아래를 때리다.’ 그렇습니다. 관자놀이를 치는 것입니다. 권투 경기에서 상대방의 눈 아래(관자놀이)를 가격한다는 것은 적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공격법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바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까? 내 몸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불구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이 발상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받아들여지십니까?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해가 됩니다. 내 몸을 하나님의 선한 도구이자 무기로 만들려면 육적인 정욕들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치명상을 입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거인욕 존천리(去人欲 存天理) 요 거인욕 폐천리(居人欲 廢天理)”를 믿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내 몸을 친다는 말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방심하다가 허를 찔리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친다는 말을 이제 21세기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방심하는 삶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홈페이지에 글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홈페이지를 이용하시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공개합니다. 여류 문학비평가인 레베카 솔닛은 ‘어둠 속의 희망’에서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의 회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총보다 더 위험하다. 우리는 적이 총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데, 생각을 갖는 것을 왜 허용을 하겠는가?” (p,56.) 글을 읽으면서 스탈린이 얼마나 똑똑한 독재자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가 얼마나 무서운 자였는지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구축해 놓은 소비에트라는 나라가 허물어지게 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해 방심하지 않겠다는 무서운 결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은 거창한 데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 영혼이 방심할 때 무너지는 것입니다. 금요일 뉴스에 우리가 살고 있는 제천의 한 시골자락에 있는 펜션이 소개되었습니다. 참 좋은 펜션으로 소개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뉴스에 보도된 제천의 펜션은 수치스러운 펜션이었습니다. 뉴스에 소개된 대로 말하자면 ‘누드 펜션’입니다. 그 펜션에 들어가는 자들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벌거벗은 채로 지내야 하는 펜션입니다. 인터넷 동아리를 통해 모집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모두가 나체족들입니다. 자세히 뉴스를 보지 않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항변은 아마도 이럴 것입니다. “옷을 입고 벗고는 우리들의 취향입니다. 어쩌면 옷을 입는 것은 껍데기 같은 변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위선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취향이니 간섭하지 마십시오.” 워싱턴 사귐의 교회 담임인 김영봉 목사는 자신의 책인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죄’라고 부르던 것을 요즈음에는 ‘선택’ 이라고 부르고 과거에는 ‘죄’라고 부끄러워했던 것을 요즈음은 ‘기호’라고 자랑합니다. 이렇게 죄를 쌓아 갑니다.”(p,163) 마치 제천에 소재해 있는 한 펜션에 모여든 무리들을 이미 예고한 말 같지 않습니까? 내 자신과 치열한 몸싸움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방심하게 되 허를 찔리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본문 27절 하반절에 있는 것처럼 나는 물론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불복종 운동을 창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그의 역작인 ‘월든’에서 아주 인상적인 금언을 하나 소개합니다. 그는 이집트의 관광 명물로 유명한 피라미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독설을 남깁니다. “피라미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 인생을 어떤 야심만만한 자의 무덤을 만들도록 강요한 흉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일을 시킨 자의 시신은 차라리 나일 강물에 처박아 죽인 후, 그 시체를 개들에게 주어 먹게 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당당한 일이었을 것이다.”(p,84)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리한 진단이 아닙니까? 썩어질 것에 대하여 미련을 둔 자에 대한 강력한 독설입니다.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제체 여러분! 썩어질 것을 위해 몸단장하지 마십시다. 도리어 썩어질 것은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지면서 제자로 산다는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내 것, 그것이 몸이든, 물질이든, 내가 만든 일체의 우상들을 쳐서 복종시킬 때만이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설 수 있음을 명심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절 본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