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38번째 강해) 제목: 치열함 본문: 고린도전서 9:19-23 서론)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되어 있는 ‘돌아와 보는 밤’ 을 읊어드리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 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 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래도 빗속에 젖어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 읽으면서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나라를 잃어 조국을 떠나 용정에서 거의 망명과도 같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겪어야 했던 민족적인 울분과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라의 무력함과 자아에 대한 자괴감을 갖고 얼마나 시인이 고뇌에 찬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오늘 광고에 나간 안천배, 김선영집사가 새롭게 이전하는 매장에 들려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의 폭염 속에서 매장을 25일에 개업하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고 있는 두 집사님들의 얼굴이 땀범벅임을 보고 가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매장에서 두 집사님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 주고 왔습니다. “하나님, 이 두 부부에게 이번 매장 이전이 마지막 이전이자 고생의 장이 되게 해 주십시오.” 두 집사님의 장점 중에 가장 큰 장점은 성실함인 것을 알기에 주의 종이 응답 받을 것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성경 속에 담겨져 있는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삶을 어느 누구도 허툰 모습으로 살아낸 사람은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시 환언하여 이 표현을 다른 각도로 조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삶의 치열함’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삶이 치열하지 않으면 나태가 나를 좀 먹습니다. 무엇보다도 습관화가 나를 무너뜨립니다. 신명기라는 구약 성경의 5번째 책을 영어로 ‘Deutronomy’ 라고 합니다. 이 단어를 풀면 ‘두 번째의 율법’이라고 풀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광야에서의 40년이라는 세월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40년이라는 세월을 척박한 땅에서 산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습니까? 그 배후에 하나님이 직접적인 통치하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때때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아내야 할 40년의 법, 이후에는 가나안에서 또 살아내야 할 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율법(TORAH)이라 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라는 신정 정치 구조의 공동체에서는 헌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이스라엘은 신실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출애굽 당시의 장년들은 유감스럽게도 광야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신명기 1:1절은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독자들인 우리들에게 줍니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여기에 등장한 지명을 한 마디로 정리하여 설명 드린다면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스라엘이 정착한 땅인 모압 평지를 말합니다. 이곳에 잠시 정착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인구분포도의 변화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시내산 율법 수여 사건은 제 1세대들을 대상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애굽에서 나온 200만 명의 1세들 말입니다. 헌데 40년이 지난 뒤, 가나안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 정착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인구는 변함없이 약 200만 명이었지만 그 대상은 전혀 다른 2세대 200만 명이었습니다. 1세대가 불순종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2세대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지체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직접 수여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율법 조항에 대하여 서툰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동시에 그 율법의 중요함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부류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안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이 목전에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제 2 세대들을 위하여 모세에게 다시 한 번 율법에 대한 재조명을 선포하실 것을 명하셨고, 그 명령에 순종한 설교 선포 사역을 행한 기록이 바로 신명기 즉 두 번째의 율법 선포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참 중요한 교훈을 보게 됩니다. 율법을 새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사문화시키는 것에 대한 경종이었습니다. 율법을 치열하게 지키며 살라는 권고였습니다. 두 번째의 율법 선포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의도는 분명히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치열함이 사라지면 습관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치열함이 사라지면 무감각해 집니다. 치열함이 사라지면 몰상식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참담한 인생을 삽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치열함은 어찌 보면 신앙인을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바로미티이기도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직시해 보기로 합니다. 오늘 본문은 생각하기에 따라 아주 묘한 토론을 야기할 수 있는 예민한 본문이기에 설교하는 목사에게도 쉽지 않은 해석을 요하는 텍스트입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보십시다. 19절 본문을 다시 읽어 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지난 주일 설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바울은 오직 한 가지에 그의 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됨’이라는 초점이었습니다. 설령 그 대상자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상식을 상실했어도,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바울에게 누명을 씌워 공격을 했더라도, 가진 것이 너무 많아 충분히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인색하기에 짝이 없었던 자들이었어도, 그들이 복음으로 은혜를 받고 회복되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만 있다면 그는 사도로서의 권위가 아닌 종으로서 본인의 위상이 깎여도 괜찮다고 역설하며 사역을 감당했음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고린도교회라는 정말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비정상의 교회는 사역하기가 녹록하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인적 구성원 자체가 만만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살핀 대로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교만한 자들을 비롯하여, 풍부한 물질을 무기삼아 교권을 휘두르고 있는 인간 같지 않은 교회 내의 불신자들도 수두룩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출신 성분이 다른 자들로 엮어 있었습니다. 유대 출신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토종(이방 출신) 크리스천들이 보이지 않는 세 다툼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마치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구제의 건으로 분열의 위기를 겪었던 것처럼 유대적인 성향의 그리스도인들과 헬라적인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있었기에 교리적인 민감함으로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만 보더라도 바울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복음을 전했는지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20-21절의 긴장감은 압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은 학자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의 고린도전서 주석은 상당한 신학적 성찰을 줍니다. 바울의 선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바울 스스로가 율법 아래에 있다고 표현한 것이고, 둘째는 율법 없는 자와 같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바울의 이 발언에 대하여 우리는 아주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의 이해에 접근해 보십시다. 바울은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로 들어갔다는 선언합니다. 경우에 따라 이 발언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수신자들 대부분은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율법 아래로 들어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되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에 반하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에는 배도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런 위험한 발언을 했을까요? 데이빗 프라이어는 바울의 이 행위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인종적 편견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선언한 것이다.” (p,216) 이 해석의 의미가 더 어려울 수 있지만 너무나 적확한 해석이라고 저에게 수용되었기에 여러 교우들에게 이 해석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는 사역을 하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선민의식, 혹은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반 예수적인 복음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것처럼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수장이었던 베드로가 이방적 그리스도인과 식사하는 자리에 있다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을 마주치자 그 자리를 황급히 벗어난 그 외식을 가차 없이 지적할 정도로 그는 철저하게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서 있었던 사역자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바울은 영락없이 이방인 중에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의 대부(代父)요 지탱대요 그들만의 사도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그는 유대인들에게서는 같이 하지 못할 배신자요 혹은 변절자로 낙인찍히는 요주의 인물로 각인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말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을 구원시키는 사명 때문에 부름 받은 것은 문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조국인 유대인들을 구원시키는 사역,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일에 대하여 손 놓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단적인 증거를 로마서 9장에서 찾습니다. 로마서 9:1-3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져도 상관없다는 폭탄 발언을 할 정도로 조국을 사랑한 자기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가 바울은 우리 편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기에 그에게 있어서 이방인들만을 위한 사역자라는 인종적인 편견을 깨뜨려야 할 필요가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나는 이방인들만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형제들을 위해서도 부름을 받은 사람임을 분명히 선포한 것이 바로 이 문구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20절을 다시 읽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실제적으로 행동한 몇 가지의 실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아마도 디모데를 제자 삼을 때 그의 어머니인 유니게가 유대인이었기에 그녀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줄여주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일, 겐그레아에서 나실인으로 머리를 깎은 일일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은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머리를 깎은 나실인으로서의 서원 행함 역시 구원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했기에 그리 했을 것입니다. 이런 행동들은 오히려 오늘 본문 20절에 기록되었듯이 율법 아래에 있는 자 즉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바울의 문화적인 접근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두 번째의 담론에 대하여 해석하고자 합니다. 21절에 대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또 하나의 위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율법 없는 자가 누구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전술한 유대인들을 위한 전도법과 동일한 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구원을 받는 조건에 있어서 율법에 대한 무용론을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자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방인의 모드로 그들에게 나섰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행동은 역시 인종적 차별과 편견에 대한 벽을 완전히 부수는 혁명과도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율법을 목숨처럼 여겼던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경악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 말한 선언은 과히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해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불편한 글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7:5-6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을 묵은 조문이라고 정의한 바울의 이 선언은 당시에는 목을 건 발언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율법에서의 해방 선언은 그의 서신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방적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철저하게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상의 대목에서 아주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무슨 질문입니까? 바울은 혹시 기회주의자가 아닙니까? 바울은 상황에 맞추어 자신의 입지를 표현하던 절충주의자가 아닙니까? 그는 카멜레온과 같은 자가 아닙니까? 너무 우유부단하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일까요? 데이빗 프라이어는 주석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 “그는 진정한 영적 카멜레온이었다.” (P,218) 그의 또 다른 문구가 저에게는 눈에 띄었습니다. “본문(20-21절)에 기록된 바울의 발언은 슬픈 주석처럼 보인다.”(P,217) 그렇다면 바울에 대한 제반적인 앞 질문을 인정한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바울을 본받을 만한 이유도 없고, 지난 주일에 담임목사가 설교한 대로 그는 영성에 있어서 따라야 할 롤 모델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자이며 해석자인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제시하고 싶은 오늘 바울의 사역도(事役圖)는 무엇일까요? ● 복음을 위한 치열한 삶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앞에서 전술한 내용이 바울 개인의 유익이나 행복을 위한 방편이라면 바울은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그가 자기의 입신양명이나 출세를 위하여 어떤 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에게 붙었다가, 또 어떤 때는 율법이 없는 자에게 붙었다면 그는 말 그대로 기회주의자이고, 세속적 카멜레온과 같은 비겁자이고,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는 아주 치사한 상종하지 못할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이렇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의 구절 때문입니다. 비난은 고사하고 도리어 그에게 머리가 숙여지는 이유입니다. 본문 22-23절을 함께 묵상하십시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그렇습니다. 지금 바울에게 보이는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지금 바울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목적 말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 19-23절에 무려 6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얻다’입니다. 헬라어 ‘케르다이노’의 번역인 ‘얻다’라는 단어는 곧바로 본문에서 다른 단어로 대치됩니다. 그것은 ‘구원하다.’ 라는 22절의 ‘쏘조’입니다. 통상적으로 ‘쏘조’는 육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를 구출해 주는 의미보다 조금은 더 숭고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영혼의 구렁텅이에서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행위 말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인 구원을 말할 때 사용되는 고유적 단어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바라보았던 자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세속적 가치를 위해 살았던 자가 아닙니다. 그는 오직 복음으로 무장한 예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가장 민감한 지역에서 가장 민감한 방법을 동원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에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주어진 예수라는 복음에 사로잡혀 치열한 인생을 살았던 자였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가 복음의 현장에서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알려주는 귀한 감동을 줍니다. 서울신학대학 81학번 동기회 단체 톡이 있습니다. 이 단체 톡이 만들어진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 톡을 통해 동기들의 근황도 접하고, 목양의 현장에 대하여 함께 중보 하는 장도 만들어져 저 역시 관심 있게 이 장을 이용합니다. 헌데 지난 주에 톡에 약간의 불편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한 회원이 단체 톡 방에 자신이 은혜로 받은 일련의 동영상들을 올린 것입니다. 그 예로 이데올로기에 관한 편향된 사상을 가지고 있는 한 목사의 동영상을 올린 것입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승만 정권으로 보고 김구 정권의 상해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그런 목사의 동영상입니다. 글을 보고 아뿔사!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동기들이 여러 차례 반대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단체 톡이 안타깝게도 동기들의 친교적인 장이 아니라 사상과 성향을 검증하는 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임원들이 중재를 하며 문제가 될 만한 동영상을 올린 동기에게 앞으로 이런 종류의 영상을 게재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엘로우 카드는 던지는 것으로 일단락을 하였습니다. 이 일을 경험하면서 느낀 소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가 얼마나 엄청난 다양성을 갖고 있는지. 30년 전에 한 신학교에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공부했던 동기들이 30년이란 세월동안 각자의 현장에서 마주치고, 경험하며, 또 공부하는 과정에서 서로들의 가지고 있는 신학적 성향, 목회적 철학, 정치적 방향 등등이 설정되었을 텐데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색깔과 성향이 옳다고 그것을 홍보하고 압박하고 강제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폭력인지를 간접적으로 친구들을 통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간, 저는 단체 톡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영상을 올린 친구 목사와 진보적인 교회와 단체에서 사역을 함으로 발끈했던 또 다른 친구 목사들이 자기들의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한 번 균형 잡힌 목양의 현장을 존중하자고 의견을 개진하는 데 의견일치를 이룬 것은 한 친구가 올린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의 글입니다. “서로 부족함을 메꾸어주고 손을 내밀어 함께 갈 수 있어서 나는 한울 동기들이 소중하다. 정글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가만히 듣고 보니 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정글 같은 세상’이 맞습니다. 바울이 사역했던 현장이나,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사는 현장이나 공히 정글 같은 세상이 맞습니다. 정글 같기에 삶이 치열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설교의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기에 오늘의 정글에서 사는 저와 여러분이 선택해야할 영적 선택을 권고하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치열한 정글에서 사는 우리이기에 이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더 치열한 복음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복음은 선택해야 하는 운선순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무장하고 있었던 복음은 마땅히 제일 우선순위였습니다. 이 영혼도 살려야 하고, 저 영혼도 살려야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도 살리고, 저 영혼도 살리는 유일한 것은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만들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톰 라이트 교수는 ‘이것이 복음이다.’ 에서 대단히 중요한 갈파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좋은 소식)은 언제나 누군가에는 거리끼는 것이며 다른 누군가에는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고 만약에 좋은 소식이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복음의 그 핵심을 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p,121) 복음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주신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무기는 치열한 삶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치열한 무기입니다. 바울은 이 치열한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우들도 이 무기를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로마서 1:16-17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CS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이렇게 한 세기 전에 이렇게 개탄했습니다. “고대인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가듯이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헌데 현대인들의 경우에는 그 역할이 바뀌었습니다. 인간이 재판장이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있습니다. 인간은 상당히 이해심이 많은 재판장입니다. 하나님이 전쟁, 가난, 질병 등을 허락하신 일에 대해 조리에 맞는 항변을 내놓으시면 인간은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재판은 무죄 항변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판사석에 앉아 있고, 하나님은 피고석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P,329) 오늘까지 2017년 여름성격학교가 진행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수고하며 땀을 흘리며 수고한 것은 예년이나 금년이나 진배없이 똑같습니다. 허나 금년에 아이들을 동원하고 전도하는 데에는 가장 저조한 여름성경학교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낳지 않는 시대, 교회의 위상에 대하여 좋은 시각이 아닌 것에서 오는 역부족, 또 다른 여타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듣자하니 우리 교회 주일학교 남학생이 여름휴가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한 타격이 그 학생이 전도한 모든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었다는 보고가 이번에 여름성격학교가 저조한 성적을 거둔 이유였다는 보고입니다. 이제는 재판석에 앉아 있는 뭇사람들의 처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교회의 기막힌 영적 정황들과 그 처분에 따라 움직이겠다고 꼼짝하지 못하는 교회학교의 상태가 피고석에 앉아 있는 하나님의 상태와 별 다를 바 없는 참담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은 고루한 목회적 성향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복음의 치열함에서 멀어진 정황이 빚어내는 비극은 앞으로 더하면 더할 것이지 덜하지 않을 것이 저에게는 보입니다. 그러기에 더 한층 영적으로 옹골찬 기개가 있어야 함을 직시합니다.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무장하여 치열하게 정글 같은 세상과 맞서십시오. 세상이 치열한 정글 같다고 종이호랑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바울은 기회주의자 아니었습니다. 복음에 미친 치열한 그리스도인이었지. 가슴에 그의 권고를 다시 담아봅니다. 23절 마지막 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