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왜 바울, 바울 하는가?2024-02-26 15:25
작성자 Level 10

7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37번째 강해)

 

제목왜 바울바울 하는가?

본문고린도전서 9:13-19

 

서론)

 

김기현 목사의 말씀 앞에 울다에 나오는 아주 기막힌 영적 통찰을 하나 소개하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김 목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한 말씀에 이런 은혜가 임했다고 소개합니다.

다 있어도 예수가 없으면 다 없다다 없어도 예수가 있으면 다 있다. 200데나리온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부족하다.”(김기현, ‘말씀 앞에 울다’,p,109)

음미하다가 김 목사 이 갈파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정말로 정답이었기 때문입니다.

벳세다 광야에 모인 20,000정도의 만찬을 위해서는 200 데나리온의 물질이 필요한 것은 산술적으로 정확한 진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의 이 계산과는 상관없이 주님은 제자들을 압박하지 않았습니까?

너희들이 있는 것을 주라

어떻게 이렇게 주군과 제자의 핀트가 안 맞습니까?

헌데 안드레는 주님의 명령이 떨어진 이후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있는 것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제 생각은 김기현 목사의 생각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안드레가 빌립과는 달리 오병이어를 찾아 나선 것은 진짜로 오병이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본인에게 예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을 알았기에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부족했던 예수에 대한 믿음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기현 목사의 지론이 맞습니다.

다 있어도 예수가 없으면 다 없다다 없어도 예수가 있으면 다 있다. 200데나리온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부족하다.”

오늘 설교 본문을 묵상하다가 김 목사의 이 글이 생각났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바울은 본문에서 그의 전 생각과 사고의 영역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사고라는 영역으로 몰입한 정황을 포착했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러한 바울의 사고에 접근하면서 설교자인 저는 바울의 어마어마한 영성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설교를 준비한 자가 미리 받은 은혜입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하여 바울 사도가 교회에서 마땅히 받아야 하는 사도로서의 권위에 대한 대우를 포기했음을 살폈습니다.

동시에 그는 비열하고 치사한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의 사도권 거부에 대한 억울함도 오직 복음을 위해서 참았음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갖고 있었던 사도권에 대한 조금 더 세밀하고 구체적인 변호가 기록되어 있는데 깊이 들어가 보면 참 귀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3절을 보십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성전에서 업으로 일하는 자(레위 지파)는 당연히 성전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드렸던 종교세를 통하여 생활을 하는 것이 맞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렇게 하도록 도와야 하고또 레위 지파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방법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침일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이 성경적인 내증을 든 근거는 민수기 18장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에 관한 말씀일 것입니다.

민수기 18:1-7절에서 최초의 제사장이었던 아론을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론의 아들들과 그의 계보들이 앞으로 성전에서 해야 할 직무들을 맡기시며 고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약 구절이 민수기 18:4-5절일 것입니다.

레위인은 너와 합동하여 장막의 모든 일과 회막의 직무를 다할 것이요 다른 사람은 너희에게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니라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다하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직의 직을 맡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한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직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생활비는 이스라엘 다른 지파 공동체가 드리는 헌물로 충당하게 해 주신다는 선언이셨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것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민수기 18:8-20절에 기록된 제물의 몫을 할당하여 주신다는 구절이고, 21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셨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자들이 성전 관리와 하나님의 성 사역을 감당하는 데 에 있어서 물질적인 곤란함이 없이 오로지 사역에만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신경 쓰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구약 성경에서 약속하신 이 하나님의 선언하심을 붙들고 담대히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마땅히 본인의 사역을 위해 생활비를 비롯한 물질적인 지원을 해야 함의 타당성을 우격다짐이 아닌 성경적인 증언을 제시함으로 역설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한 번 성경의 내증을 바울이 강조한 것은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사역에 대하여 물질적으로 몰라라함에 대한 섭섭함의 반향이고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역함이라는 표현임을 분명해 보입니다.

또 다른 시각에서 볼 때 고린도교회는 당시 바울이 개척한 소아시아 교회 중에 가장 부유한 교회였기에 바울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도 바울을 섭섭하게 한 또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사정이 이 정도라면 바울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비난함이 마땅해 보입니다.

그리고 나를 책임지라고 압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행보를 보면 머리를 숙이게 하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15절을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지금 읽어드린 본문은 우리 교회에서 지금 사용하는 개역개정판 번역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전에 보았던 개역판 성경은 개역개정판에 삭제해 버린 대단히 중요한 표시가 들어 있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개역판 성경 번역을 자막을 통해 눈 여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무엇이 다릅니까?

개역개정판과 개역판이 무엇이 다릅니까?

그렇습니다.

개역판 성경에는 … (줄임표)가 들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세종대학교 김판임 교수는 이 줄임표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자신의 주석서에 남겨 놓았습니다.

바울은 돈과 관련된 일을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언급할 때 대단히 자존심이 상했고급기야 그것은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너희가 주는 것으로 먹고 살지 않겠다는 각오어린 발언이 나온 것 중에 앞부분(차라리 죽겠다.)만 하고 끊게 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고린도교회와 바울, p,144.)

바울이 왜 이렇게 흥분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치사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역자의 사역을 사역으로 보지 않고 교회의 유-불리를 따지며 바울의 선한 복음 증거의 사역을 돈으로 저울질하려는 악한 짓에 대한 분노였을 것입니다.

설교를 위해 본 어느 주석서에도 지금 제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으로 부연하고 있는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만이 갖고 있었던 부자 교회의 질 나쁜 행태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

빌립보서 4:14-16절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이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해 줄 것을 부탁하자 당시 참 어렵고 힘든 교회였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보여준 반응에 대하여 칭찬하는 글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무슨 말입니까?

소 아시아 있는 교회 중에 구제헌금을 해 준 교회가 빌립보 교회가 유일하다는 보고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그래서 바울은 후에 고린도교회에게도 구제 사역을 독려하는 글인 고린도후서 8:1-3절에서 마게도냐 교회 중에 빌립보 교회의 충성스러운 사역을 소개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빌립보 교회와 여타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그런데 바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구제헌금 사역의 협조를 구할 때 마음을 상하게 한 교회가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이 보고 있는 바울에게 이렇게 인색하게 했던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바울에게 딴지를 겁니다.

어떻게 딴지를 겁니까?

헌금을 강요하여 우리들에게 짐을 지운다고 시비를 겁니다.

심지어 우리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바울이 속인 것이라고 압박합니다.

고린도후서 12:16절입니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이 기막힌 일을 목도한 바울이 가슴을 칩니다.

그리고 얼마나 비통하면 이렇게 말하였겠습니까?

고린도후서 12:14-15절을 소개합니다.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눈에 띠는 바울의 격한 아우성이 보이십니까?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라 오직 너희니라

내 자신까지 내어 주리니

이렇게 바울을 힘들게 한 교회가 부자 교회였던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영적 상태가 이 모양이었기에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줄임표를 동원하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돈을 받는 구걸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절치부심의 표현이 절절하게 이해가 됩니다.

바울의 심정은 이렇데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위대함은 이런 감정선에서 끊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어찌 보면 담임목사가 오늘 설교의 주제로 삼은 부분이기에 이제 오늘 본문 텍스트의 마지막 부분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본문 15절 하반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구절을 만나면서 한 동안 멍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바울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원죄의 뿌리자범죄의 사슬다 가지고 있는 자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조금 더 나아간다면 어떻게 이 정도의 영성을 소유할 있었단 말일까?

그냥 감동의 감동이며감탄의 감탄입니다.

15절 하반절부터 18절까지의 바울의 선언이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이 보인 소위 악한 행위들질 나쁜 행위들 때문에 속이 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허물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정말로 소중한 것을 망각하게 하려는 사탄의 시도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정말로 자랑할 것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의 자랑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그게 무슨 자랑이냐는 것입니다.

그건 마땅히 해야 할 이기에 자랑거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영적인 무너짐이라는 화가 임할 것이기에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결과궁극적으로 나는 상을 받게 될 것인데 그게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냐고 역설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정말로 자랑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18-19절에 답이 있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기막힌 역설입니다.

바울의 영성을 가늠하게 하는 통찰입니다.

권리를 쓰지 않음으로 오는 은혜 말입니다.

값없이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감동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정말로 자랑하고 싶어 했던 사례비는 따로 있었습니다.
김판임 교수는 바울이 정말로 받고 싶어 했던 사례비를 19절을 주석하면서 밝혔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의 활동에 대한 삯을 생각했다면그것은 교인들이 주는 생활비가 아니라 그들 자신(고린도교회 신자들즉 그들의 그리스도인 됨이라” (김판임, p, 145)

 

★ 바울의 궁극적인 목회의 목적은 흔들림 없는 신자의 그리스도인 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김 교수의 명쾌한 해석을 접하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바울이 진짜로 자랑하고 싶어 했던 것바울이 진짜로 받고 싶어 했던 사례비가 물질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그리스도인 됨이었다는 역설은 망신창이가 된 한국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들이 결코 버릴 수 없는 로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 목사가 얼마 전 사석에서 저에게 이런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 친구는 정말로 저를 아껴주는 친구인데 저의 목양 사역을 보면서 많이 애처로웠는지 농담 반진담 반의 뼈 있는 소리를 던진 것입니다.

이 목사제자훈련크로스웨이구원 그 이후 소그룹 반 사역다 쓸데없는 일이다신자들안 변해절대로 안 변해그러니까 죽을 것 같이 기 쓰지 말고다음에 오는 2대 담임목사 괜히 힘들게 하지 말고이 목사의 역량만큼 해라체력적으로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다가 이 목사 병들면 이 목사만 손해야이 목사 설교를 들어보면 요 근래 그렇게 설교에 목숨 거는 사람 없어제발 몸 생각하고 해라.”

여러분은 듣기에 불편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친구는 아끼는 친구 생각하고 던진 충고였습니다.

그러나 듣고 나서 보니 사실은 충격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말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에 대한 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저를 충격 받게 하였는지 아십니까?

저의 흔들림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목숨 걸고 지켜왔던 목회적 자존감의 흔들림 때문이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말의 상당수가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섬기면 목사도신자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다.”

뿌리고 또 뿌리다보면 신자들의 성도됨을 이룰 수 있다.”

양육하고 기도로 키우다 보면 자연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상식이지 않겠습니까?

열왕기하 5:1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아람이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도단에 도착했는데 자기를 대우하지 않는다고 열 받아 엘리사의 명령을 거절하고 아람으로 돌아가 요단강처럼 더러운 똥물에 몸을 담그느니 차라리 내 고향에 있는 아바나와 바르빌에 있는 더 깨끗한 물에 몸을 담그겠다고 혈기를 부릴 때 도단에 함께 왔던 종들이 목숨 걸고 나아만에게 직고한 말입니다.

종들의 말을 풀면 무슨 말입니까?

엘리사가 명령한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기에 목숨을 얻게 위해서는 더 큰 일도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역설로 조금은 폼 나는 일을 시켰으면 분명히 하지 않았겠느냐는 반문입니다.

밑져야 본전인데 왜 그것을 모양새 때문에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느냐는 말입니다.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정말로 필요한 자들은 나아만이 아니라 종들이지 않겠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결국 나아만의 질병을 고침 받게 한 주인공들은 나아만 개인이 아니라 종들이었다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생각을 말입니다.

목회가 무엇일까?

나아만을 만드는 것이 목회가 아니라 종들을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갈망했습니다.

바울은 종들을 만드는 것그리고 결국에 종들이 만들어지는 것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기 스스로 본인이 누릴 수 있는 사도권의 권리를 포기한 이유였고그가 정말로 받고 싶어 했던 사례비였습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들이 제천에 내려왔을 때 아들의 사역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아들이 시무하는 교회는 강북에 그래도 살기에 어렵지 않은 중산층들이 출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련회를 앞두고 교사들과 함께 기도회를 갖는데 부족한 것이 별로 없는 교사들그래서 헌신에 목매는 일이 별로 없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교사들에게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뼈 있는 말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전언해서 들었습니다.

아들이 교사들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예수를 믿으십니까?

당연하죠믿으니까 교회에 나오지요.”

그렇다면 선생님들을 구원하신 그 예수님은 선생님들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입니까?”

아들이 물은 질문의 요는 입술로 고백하는 구원의 주님에 대한 삶의 priority 즉 우선순위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울그락불그락 하며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본 아들이 교사들에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삶에 있어서 의미가 없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한 마음이 몰려 왔습니다.

아들이 과연 21세기에 목회를 할 수 있을지.

제가 좋아하는 팝송 중에 닐 세다카가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을 향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You are the answer to my lonely prayer/You are an angel from above/

I was so lonely till you came to me/With the wonder of your love./

I don't know how I ever lived before/You are my life, my destiny/

Oh my darling, I love you so/You mean everything to me./

닐 세다카의 이 노랫말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이 팝송이 단어 하나만 대입하면 기막힌 복음성가가 될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바울은 닐 세다카의 노래에 등장하는 ‘YOU’를 이렇게 확증했습니다.

You are my Lord, Jesus Christ.

그래서 바울은 저의 롤 모델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