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범사에 참는 것은?
본문: 고린도전서 9:1-12
서론)
이제는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로 혹은 방송인으로 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유시민씨가 정치를 끝내고 돌아와 처음으로 쓴 글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도서출판, 생각의 길)라는 책입니다.
무신론자이며 기독교에 대해서도 반감이 큰 사람인 그의 글을 읽으면서 예상대로 목사로 살아가는 저와는 도무지 뜻을 같이 할 수 없는 상당한 부분의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곳곳에 남겨둔 글감들에 고개를 끄떡이게 하는 동의를 표한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인은 되지 못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p,36)
그가 말한 삶의 철학입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릎을 치게 만드는 상식의 테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사는 삶의 전반에 괴물들이 존재합니다.
가장 상식의 선인 것을 뒤집어엎는 괴물들이 지천에 있습니다.
불과 400만원이라는 돈을 갈취하기 위해 한 가정의 어머니요, 아내이며 딸인 평범한 여인을 힘이 없다는 이유로, 외제차를 탔으니까 돈이 많을 것이라는 이유로, 무참히 생명을 앗은 짐승보다 못한 맘몬에 눈이 먼 괴물이 존재하는가 하면, 군사력이라는 절대적 우상을 신봉하면서 핵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괴물에 노출되어 있는 자들이 우리들 주변에 맴돌고 있으며, 인격적인 치유가 필요한 막 말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정치적인 괴물도 역시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어디 이뿐인가? 싸이코패스, 편집증 등등의 정신병적인 시한폭탄을 들고 있는 자들도 우리 주변에 눈을 돌리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이들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저 역시 인정합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더 기막힌 괴물들을 만나는 것은 아픔 중의 아픔입니다.
고승우 전도사님이 공 예배를 통해 선포하는 에베소 강해 은혜를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강해를 시작하기에 앞서 저에게 이런 말을 전언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에베소 강해를 위해 열심히 자료들을 수집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충격적인 일을 발견했습니다. 고 하용조 목사님이 쓰신 ‘하나 됨의 열망’(하용조저, 두란노출판사) 이라는 에베소서 강해집을 참고하다가 놀라운 일을 발견했습니다. 그 분이 살아계시는 동안 그 분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 동역했던 지금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목사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쓴 책도 에베소강해이기에 참고할 겸 읽다가 발견했습니다. 그 분의 책은 이름난 본인의 책이었지 하용조 목사님의 에베소 강해 베끼기였습니다. 충격입니다.”
남의 글을 목사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도적절하는 괴물도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공정하지 않은 게임을 가장 공정한 것으로 둔갑시켜 아들에게 교회들을 대물림하는 괴물, 교회를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기득권으로 얼마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하는 괴물들도 존재합니다.
교회를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유재산 정도로 생각하는 치명적 괴물들입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해석불가능한 자들만의 영역이라는 비아냥도 당합니다.
도무지 대화불가의 이성적 금치산자들이 모인 비상식적인 집단이라고 매도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는 이렇게 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었음에 억울합니다.
교회는 가장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그 가치에 있어서 최고의 영역이었기에 말입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억울함을 주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견디고 보듬고 참아내는 것만이 능사인가?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는데 그냥 주님의 사랑으로 보듬는 것만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아량인가?
이것을 놓고 주님과 한판 승부를 벌일 때가 있습니다.
교회는 괴물들이 모였던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로 인해 세워진 유일한 장소인데 괴물들이라는 공격에 너무 소극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거룩한 분노가 생길 때도 있습니다.
참는 것만이 능사인가?
그러다가 오늘 본문을 접했습니다.
접하면서 피식 웃었습니다.
바울은 참 할 말을 없게 만드는 예수님과 더불어 또 한 명의 나를 포로 되게 만드는 멘토임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조금은 의외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폈듯이 본문의 전 장인 8장에서 우상에게 드린 제물에 대한 신앙적 담론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또 다른 기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말씀을 드리겠지만 9장을 넘어 10장으로 들어서면 바울은 우상에게 제물을 드린 것에 대한 담론을 해석한 8장과 맞물려 다시 우상 숭배에 대한 신학적인 대안과 지침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과 다음 주일에 걸쳐 살필 본문 9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첨가된 것처럼 보여 여느 신학자들 중에는 고린도전서 9장의 본문은 바울 개인사에 대한 변증의 글인 고린도후서에 삽입될 글이 9장에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극단적인 해석을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9장의 문맥을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왜 오늘 9장의 내용이 8장과 10장 사이에 들어가 있는지를 충분히 변호해주기 때문입니다.
2주 동안 나눌 본문 9장의 총 주제를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권리포기’라고 제목을 정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이 주제에 대한 해석과 접근을 진행하겠습니다.
본문 1절을 나눕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반어적인 문법적 표현으로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문제를 제기한 내용이 4가지입니다.
⓵ 나는 자유인이다.
⓶ 나는 사도이다.
⓷ 나는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
⓸ 나는 그 부활의 주를 너희에게 증언하여 너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였다.
왜 바울이 이렇게 4가지를 반어법적 문법으로 구사하며 초강력 메시지의 도구로 사용하였을까요?
그 답을 우리가 지난 강해를 통해 살폈던 8장과 관련하여 명쾌하게 제시한 한 학자의 글로 대신해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오래 전부터 고린도교회교인들로부터 들어온 말 중에 괴로움을 당했던 말이 있었다. 바울은 스스로 벌어가며 사는 걸 보니 사도가 아니다.”(김판임저, ‘고린도교회와 바울’ 동연 간, p,131)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인 김판임 교수의 이 지적을 오늘의 언어로 정리해보겠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지명되지 못한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도 사도로 인정받지 못해 마땅한 사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베드로와 같은 레벨의 사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고린도교회의 분위기였다.”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런 의식은 너무나 큰 상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바울이 이 토로를 한 것을 묵상하다가 한편으로 바울이 걸었던 길에 대한 숙연함, 존경 등등의 복합적 감정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마음에 애틋함이 스며들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이 한 구절의 고백 속에 바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견디며 주의 사역을 했는지를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C.K 바레트 영국 더럼대학 교수는 자신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5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믿는 자매들을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냐는 반문은 사도들도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말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가정을 이룬 사도들은 마땅히 가족 부양의 책임을 져야했는데 교회가 그런 일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사도들은 그 권리를 누렸다.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포기했다.”(C.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 고린도전서’, 한국신학연구소, p,240)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다른 여타 사도들의 권리를 소개한 이유는 바울 스스로도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충분한 사도였다는 방증입니다.
특별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더 더욱 말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왜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본인의 이런 섭섭함을 토로하고 있는 듯한 메시지를 강하게 역설했습니까?
당연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복음의 능력으로 회심시킨 자들이 모여 이룬 교회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지중해 여러 도시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 중에 특히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회(갈라디아 교회)에 비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더 더욱 신뢰함으로 지지해 주어야 마땅한 공동체가 고린도공동체이어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이 어떻습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자기가 벌어서 자비량 선교를 하는 것을 보니 그는 분명 사도가 아니라고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을 고린도교회가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나름의 분노에 사로잡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에 이릅니다.
이번에 소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7-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이 구절은 바울이 자신에 대하여 적절한 사례와 선교를 위한 물질적 지원을 해야 하는 정당성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변증한 것입니다.
바울은 세 종류의 직업을 끄집어냅니다.
군인, 포도원의 농부, 양치는 목자입니다.
군인은 무기와 군복을 받습니다.
전쟁을 위해서입니다.
과일을 생산하는 농부는 자기가 생산 한 과일을 사기 위해 시장에 가지 않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목자는 자기가 돌본 양의 젖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먼저 취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통한 노력한 것에 대한 마땅한 사례, 그리고 대우받음은 너무나도 사도들에게 정당한 일임을 바울이 적극적으로 대변합니다.
절정은 성경적인 지지입니다.
바울은 신명기 25:4절의 토라를 인용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토라 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적 토라로 인정받는 성경이기에 신명기의 권위는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대단한 권위입니다.
신명기 25:4절입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왜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면 안 됩니까?
유진 피터슨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타작 일 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마십시오.” (유진 피터슨, 모세오경 메시지, P,485)
왜 그래야 합니까?
미물인 소도 일한 대우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알레고리적으로 신명기 율법을 제시함으로서 바울은 물론 그의 동역자들의 사역은 마땅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대우를 받을 만한 충분한 성경적 근거가 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당할 만한 이유가 없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본문 9-11절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1절까지 기록한 바울의 선언은 자신이 내세워야 할 권리는 충분한 권리임을 고린도교회에 전한 것입니다.
매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소문으로 바울의 사도권에 흠 짓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땅한 권리를 섣부른 너희들의 잣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그의 선언의 클라이맥스인 발언을 남깁니다.
본문 12절을 마지막으로 보십시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저는 12절의 구절을 오늘 설교의 주제절로 삼았습니다.
앞선 메시지에서 오늘 본문의 주제를 삼으라면 ‘권리 포기’라고 정할 수 있음을 내비쳤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신분으로 인해 고린도라는 교회 공동체에 충분한 물질적인 지원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지금 교우들에게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그 권리를 바울이 어떻게 했다는 말입니까?
가장 쉬운 단어로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권리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습니까?
우리기 아는 것처럼 바울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함으로 해서 얼마나 엄청난 고통의 길을 갔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린도후서 11:23-27)
바울이 정신박약아입니까?
그는 신약성경의 13개 서신을, 그리고 1/3의 분량을 저술한 똑똑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이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당대 최고의 율법 가문인 가말리엘 문하 수료생이었습니다.
바울이 출신성분이 불온한 자라서 권력에 요주의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진골, 성골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자기의 권리를 포기했습니까?
그는 왜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치욕과 억울함과 누명 씌움에 참았습니까?
바울은 이 참음의 영역을 ‘판타’ (범사-ALL THINGS) 라고 정의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 중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일체의 일들에 대하여 참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12절에 ‘참다.’ 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스테고’는 원래의 의미가 ‘지붕을 덮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말도 안 되는 누명, 말도 안 되는 핍박, 말도 안 되는 요구,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폭력을 덮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왜 바울이 이렇게 했습니까?
그에게 결점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에게 흠결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에게 남에게 책잡힌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이미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편지한 글에서 그가 어느 정도로 바른 정신, 바른 신학, 바른 삶을 살아왔는지 배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그런데 왜 바울이 참았습니까?
그의 고백이 눈물겹습니다.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본문 12절 하반절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참은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 증언에 장애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쉬운 말로 오직 자신이 죽고 참음으로 고린도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영적 관점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관점이었습니까?
흔들림 없는 복음의 승리라는 관점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까지의 본문 해석을 통하여 오늘 주일에 주시는 영적 은혜를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가졌던 영적 시각입니다.
★ 내 시각입니까? 하나님의 시각입니까?
바울이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던 그만의 권리 포기는 다음이 전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이 중요하다는 통찰 말입니다.
우리들이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불손하고, 가장 교만한 내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이라고 포장하는 기막힘 말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성경 강독 시간에 경청하게 하신 벼락같이 다가온 말씀 새겼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이사야 30:8-11절입니다.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이 구절의 배경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 왕 치세입니다.
호세아는 처음에는 앗수르에게 화해하는 친 앗수르 정책을 폈지만 후에 반 앗수르 정책을 피면서 앗수르에게 맞서기 위해 애굽과 연합하는 정책을 핍니다.
이 정책에 대하여 이사야는 강력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멸망하는 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독단으로 이 정책을 폈다가 결국 주전 722-23년에 사마리아가 함락 당하여 멸망하게 되는 비운을 맛보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에 대하여 정면으로 거부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 예언자에게 그들의 행위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장면이 읽어드린 이사야 30:8-11절입니다.
주님이 정의하신 멸망 직전의 북 왕국 상태가 어떤 상태였습니까?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시대,
선견자들에게 선견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패역의 시대,
선지자들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는 참담함의 시대,
도리어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요청하는 무시무시한 시대,
바른 길을 버리라고 종용하는 시대,
이런 엄청난 결과의 궁극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내 앞에서 떠나게 하라는 참극의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습니다.
오늘 설교의 테제로 적용하여 다시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는 세대,
오로지 내 시각만이 관철되기를 폭력적으로 압박하는 불신앙의 시대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지난 주간, 새벽에 이 말씀을 받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철저한 분리를 요구하는 행위, 다시 말해 내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을 잠식하는 행위로 탄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치료되지 않는 괴물입니다.
‘존재냐? 소유냐?’ 로 유명한 독일 출신의 정신 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의 걸작인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이렇게 저자가 정의한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전쟁을 선포하셨다. 인간은 ‘개인’이 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인간’이 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p,35)
인간의 독립적인 시도에 대하여 긍정화입니다.
그러나 저는 에리히 프롬의 이 관점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비로소 인간이 되려는 순간으로부터 그 인간은 괴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내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을 점령하면서부터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되고 만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아들이 방학을 맞이해서 잠시 제천에 내려왔었습니다.
한 날, 너무 더워 시내 모처에 있는 이름 꽤나 있는 막국수 집을 찾아 아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찾아간 시간이 이제 거의 폐장할 시간 즈음이어서 다행히 손님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식사를 다하고 일어사려는 데 그 집 주인 아들이 우리 일행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제 돌이 채 되지 않았을 정도의 앙증맞은 사내아이가 너무 예뻤습니다.
해서 저와 아내와 강 전도사님이 너무 예쁜 나머지 서로 나에게 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아들이 일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한 테는 오지 마!”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라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고 오지 말라는 아들에게 접근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실망했습니다.
오면 안아주려고 했는데 오지 말라는 아들한테 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들에게 간 그 아이가 갑자기 아들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내리친 것입니다.
주인도, 저희들로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신기해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아들에게 박장대소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살면서 이론으로 이해가 안 되는 억울한 일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로 머리통을 쥐어 박히는 일이 어디 이런 애교스러운 일뿐이겠습니까?
그럴 때 몰려오는 분노가 있습니다.
나도 동일하게 맞서.
나도 한 번 붙어봐.
그러나 그것은 내 시각일 뿐 하나님의 시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범사에 참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하나님의 시각은 참으심이었습니다.
참음은 복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시선’ 을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주를 보기 시작할 때/주의 일을 보겠네/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하늘의 꿈꾸게 하네/주님을 볼 때/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세상은 주의 나라 되고/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