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일 수요일 묵상 노트: 불편한 것은 불편한 거다. 성서일과 시편 55:16-23, 시편 44편, 에스더 7:7-8:17, 호세아 6:11-7:16, 마태복음 5:43-48 꽃물 (말씀 새기기) 에스더 8:17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마중물 (말씀 묵상) 어떤 진보적인 학자는 에스더에 대해 대단히 비평적인 태도를 보였다. 가장 민족주의적인 편파적 글이라고. 해석자의 스펙트럼에 따라 의견을 개진하는 것 자체를 무시하거나, 매도하는 것은 지성적 영성을 가져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르지 않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합작으로 바사의 유다인을 진멸하려던 하만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도리어 모르드개를 내 걸려 했던 장대에 하만이 내 걸렸다. 동시에 하만이 바사의 127도에 해당한 전국에 걸쳐 시행하려던 유다인 진멸의 프로젝트도 역전되어 유다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던 자들을 도륙하는 반전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여 지금도 부림절을 지킨다. 사정이야 어떻든 한 구절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본토 백성이 유다인 되려는 자 많더라’ 왠지 모르게 이 구절이 은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게 다가온다. 정경으로 인정된 성경을 그렇게 목사가 보면 되겠느냐고 공격해도 어쩔 수 없다.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니까. 철저한 기회주의자들로 여겨지는 본토인들이 곱게 여겨질 리 없다. 적어도 내 신앙의 양심상은 그렇다. 아주 가끔은 너무 웃긴 경우를 본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조건 이스라엘 편이 되어야 한다는 억지다. 어느 기고의 글에 알란 파페의 ‘팔레스타인 비극사’(열린 책들 간)와 슐로모 산드의 ‘만들어진 유대인’(사월의 책 간)에 대한 북 리뷰를 긍정적으로 호평했더니 돌아온 비난이 하나님의 선민을 그처럼 범죄자 취급하면 되겠느냐는 훈시였다. 이스라엘이 선민이니 그들이 하는 일에 무조건 박수를 보내야 한다는 억지를 적어도 지성적 영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더 무섭게 공부하는 내가 되어야겠다. 기울어지지 않도록. 두레박(질문) 이스라엘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손 우물(한 줄 기도) 하나님, 하나님이 원하시는 미슈파트와 체다카에서 빠져 나가지 않게 하소서. 나비물(말씀 실천) 이라크의 바그다드에 토마호크 미사일이 발사되었을 때, 맥박과 혈압이 올랐다고 고백했던 권정생 선생의 마음을 나도 공유하자. 지금 아파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 그들을 절절한 아픔을 보듬는 목사가 되어 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우크라이나, 미얀마, 그리고 제 3세계에 존재하는 하루 소득 1달러 미만의 이웃들을 위해 내 삶의 경비를 아낄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리고 나누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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