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개척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인교회가 14살이 되어간다. 내일 실시하는 사무총회가 은혜로 진행되기를 소망한다. 14년 전은 광야 그 자체였는데, 세인 교회가 가진 게 너무 많아졌다. 개척교회가 다 그렇듯이 중간 중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도미니크 수도회의 사제이자 사회 활동가였던 리 호이나키의 말대로 가리산지리산 비틀거려도 정의의 길로 걸으려고 노력했던 14년이었다. 2022년 세인교회가 교만하지 않고 세인교회이었으면 좋겠다. 제 14회 연차총회(구 사무총회) 개회사 ‘샬롬’이라는 단어는 ‘평강’, ‘평화’를 말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건네는 인사의 멘트입니다. ‘야훼 샬롬’ 야훼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에게 있기를 바란다는 상용어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세인 공동체에 이 인사가 나누어져야 한다는 당위에 있어서 교우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지금이야 말로 야훼의 평강이 그 어느 때보다 교회는 물론 모든 영역에 빈틈없이 임해야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수없이 장황한 말로 지난 2년의 펜데믹 상황을 분석하고, 진단하는 말의 홍수가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대안도 제시되었습니다. 많은 집단에서 여타 많은 리서치 기관과 단체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대안들에 주목하며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는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가요? 예외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지난 2년 동안 여타 다른 집단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뿌리가 얕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지반 자체가 약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기독교에는 있습니다. 하여 훨씬 ‘을’의 위치에 있는 교회는 펜데믹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공격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고난이 임할 때, 사정과 이유가 없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매일반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뱀같이 지혜로울 필요가 있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2022년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 우리 세인의 숙제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보니 교회는 사람이라는 해석이 적확합니다. 사람이 교회라는 것을 동의한다면 당연히 교회의 생명력이 관계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등등으로 연대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아프고 또 아픈 것은 지난 2년 코로나 사태는 일련의 이 모든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전술한 대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소그룹을 파괴했고,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는 예배를 무력화했습니다. 더불어 교회 공동체가 관심을 갖고 교육하는 내용인 그리스도인이 돌보아야 하는 자연에 대한 관계를 경홀히 여기도록 강제했습니다. 재론하지만 지난 2년 동안 펜데믹이 준 가장 유감스러운 비극은 ‘관계 파괴’였습니다. 이제 2022년을 맞이했습니다. 펜데믹 3년차입니다. 역시 관계의 파괴는 지속될 것입니다. 불을 보듯 뻔한 이 아픔이 2022년도 지배할 것인데 우리 세인 공동체는 어떻게 2022년을 살아내야 할까요? 전술한 대안, 방법론들이 펜데믹 3년차를 극복하게 해 줄 구세주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부분적으로는 공동체가 와해되지 않게 해주는 완충제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세인공동체는 무기력하게 또 한 해를 보내야 합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난해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달려왔습니다. 이 명제는 2021년만 내 건 슬로건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ad fontes’ (다시 기본으로)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가히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재앙입니다. ‘다시 기본으로’의 마음다짐은 2022년에도 여전히 진행형 강령이어야 합니다. 저는 다만 2022년은 세인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의 강령을 뛰어넘어 교회 공동체의 목표를 재설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서 개인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이 어려운 펜데믹의 시대에 다시 부침(浮沈)해야 하는 것이 역시 원칙으로의 회귀라는 점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방법론이 많이 부각되는 시대, 대안이 수면 위로 수없이 떠오르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원리는 강조되지 않는 시대입니다. 원리는 고루한 것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며, 구태의연한 것이라고 사정없이 매도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펜데믹 시국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세인교회가 그 비난을 감수하고 원리(원칙)로 돌아가는 2022년이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세인 교회의 2022년 표어는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갈 6:14)입니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침투하여 십자가가 아닌 할례 받아야 진정한 구원이 완성된다는 거짓 복음에 넘어가 수많은 자들이 무너지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서슬이 시퍼런 복음의 정수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재일동포 학자인 강상중의 글을 읽다가 소름이 돋았던 문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신이 없는데도 이 세상에서 신을 믿는 일이 가능할까? 그런 건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악이 있다는 것에 의지한다면 이 세상에 신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지도. 이 말에는 악이란 것이 ‘거꾸로 선 예수’라는 표현이 담겨 있다.”(강상중, “악이란 무엇인가?”, 사계절,p, 90.) 펜데믹의 치하에서 세속은 대치된 신을 경외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너뜨리지 못하는 그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전포고에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거꾸로 선 예수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는데도 이 거꾸로 선 예수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신뢰하거나 믿지 말라고 압박하는 폭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습니다. 마치 코로나 공격이 주는 무언의 압박은 히스기야 치세 때 남 유다를 압박하며 항복을 강요하던 랍사게와 흡사해 보입니다. 거의 모든 유다 공동체가 겁에 질려 있던 바로 그 때, 항복문서를 전달 받은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그 항복 문서를 펴놓고 하나님께 엎드려 절규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왕하 19:14-19) 백척간두의 위기 앞에 선 히스기야는 방법과 대안과 전략이 아닌 원리로 돌아갔습니다. 원리(하나님)로 승부를 가릴 주사위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 세인교회의 2022년 표어입니다. 투박하기 그지없고, 시대의 소리와는 정 반대로 가는 촌스러운 설정 같으며, 무엇보다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 같은 시대의 감각이라고는 1도 없는 무지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한 표어입니다. 하지만 담임목사는 그냥 이대로 가겠습니다. 세인교회는 이렇게 가겠습니다. 세인교회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인 지체들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먼저 못 박히신 예수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 대 명제를 각인하고 달려갈 때만 ‘거꾸로 선 예수’가 판을 치고 있는 이때, 신 세속의 바이러스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천세인 교회 성도 여러분! 2022년, 이렇게 살아봅시다. 이렇게 살아내 보십시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 되기를 기대하며 의장은 한국기독교나사렛 성결회 제천세인교회의 제 14회 연차총회(舊 사무총회)가 개회됨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2022년 1월 2일 제천세인교회 담임목사 이 강 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