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에 생긴 일 화요일은 근무지가 서재가 아닌 1층 사무실입니다. 부교역자 없기 때문입니다. 해서 읽고 있는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1’을 들고 내려갔습니다. 근무를 하다가 습관적으로 음악을 틀었습니다. 물론 외부 스피커로 나가는 잔잔한 찬양의 산책을 동네 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헌데 뭔가 허전 한 것 같아 서재로 다시 올라와 친구가 보내준 에티오피아 산 원두 ‘아리차’를 로스팅해 끓였습니다. ‘아리차’ 는 묘하게도 두 개의 냄새가 납니다. 끓일 때 나는 장미꽃 냄새와 먹을 때 느끼는 레몬의 향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향기를 고스란히 담아 1층으로 다시 내려와 이번에는 교회 정원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나름 날씨가 따뜻하여 커피 한 잔을 들고 정원으로 나간 것입니다. 외부 스피커 나오는 마음을 아름답게 정화해 주는 음악, 정원 벤치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피어있는 봄꽃 민들레의 성스러움, 그리고 두 개의 냄새를 공급하는 아리차의 조그마한 감사, 그리고 숙독하고 있는 책에서 주는 사회철학적 사유들은 정말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콤비네이션을 이루며 고즈넉한 그리고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행복의 도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개월 전만해도 정원에서 느끼는 이 행복은 고스란 행복이었는데 오늘은 분명한 불청객이 생겼습니다. 정면 공터에 짓고 괴물처럼 보이는 다세대 주택이 불청객의 장본인입니다. 둔탁한 금속소리, 마구 부딪히는 돌과 나무의 마찰음, 그리고 인부들의 고성까지 합쳐진 한 쪽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건물이 올라가고 있어 소개한 고즈넉한 감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삶이요 현실임을 저는 압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바로 일상인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불과 1개월 전의 뻥 뚫린 시야, 그래서 직선으로 보이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제천의 산야를 가로막고 있는 건물은 무척이나 제 입장에서는 유감천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나마 교회 정면의 1/3만을 가린다는 것이 천만 중 다행입니다. 리젠트신학교의 영성 신학교 교수인 미르바 던이 ‘안식’에서 갈파했던 “그침에서 쉼으로의 진행은 우상 숭배에서 믿음으로의 기본적인 이동이다.” 라는 언급은 정말로 기막힌 통찰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세워감이 아니라 쉬어감과 그쳐감이라는 생각을 나 또한 동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욕심의 그래프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환상 속에 있는 우상은 아닐까? 하는 엄습함이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지 확인해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에서 말한 대로 ‘옷은 팔아도 생각은 팔지 말고 간직하라’ 는 말처럼 온통 콘크리트로 전 국토를 도배하려는 것 같은 건축 공화국과도 같은 이 불행한 시대를 지금 살고 있다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유와 성찰과 묵상을 팔지 않는 시대의 자존심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마침 읽고 있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포퍼가 이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 들립니다. “우리는 금수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인간으로 남기를 원한다면 오직 하나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열린사회로의 길이다.” 패러디를 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금수가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남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 내려감이라는 생각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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