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출신의 스포츠 역사학자인 빌 머레이가 쓴 ‘축구의 역사’ (원제:The World's Game: A History of Soccer)를 보면 축구를 이용하여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최대한 이용했던 독재자들의 만행이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솔리니는 AC 밀란을, 히틀러는 샬케 04를, 스탈린은 디나모모스크바를 지원하며 체제 강화와 홍보의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역사를 상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에도 이렇게 현대인들에게도 스포츠는 독재 정권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인 3S 정책으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인 긍정의 스펙트럼으로 보면 적지 않은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주, 저의 고향에서 제 17회 아시안 게임이 열린 이후 14일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향에서 열린 경기이기에 더 각별한 애정을 갖고 시청하기도 했습니다. 경기의 내용 중에 인기 종목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때로는 바로 그런 종목에서 따뜻한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어 집중하게 됩니다. 지난 주에 있었던 여자 마라톤이 그런 예였습니다. 여자 마라톤 국가 대표 선수인 최보라 선수가 2시간 45분 4초를 기록하고 12위로 골인 지점을 통과한 뒤에 실신하여 쓰러져 응급조치를 받았다는 소식이 여론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42.195km 완주한 뒤에야 혼절했다는 사실은 많이 이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은 메달을 따는 가? 못 따는 가?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종목에서는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 금메달을 따면 군 입대 면제라는 당근을 줌으로서 경기력을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는 일부의 염려가 있는 것처럼 스포츠가 스포츠 본연의 감동이 아닌 정치적, 상업적 목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최보라 선수 같은 생명을 건 투혼이 더 빛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최 선수의 감동적인 레이스를 보면서 목사로서의 기질이 저절로 스멀대며 올라왔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해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직시하고 이 땅에서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사는 자들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한시적으로 이 땅에서 인간은 살기 때문에 우리를 나그네라고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그네로 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러분은 그래서 바울이 양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했던 그대로 경기장에서 법에 따라 경기하는 선수로서 아버지의 뜻에 맞는 경기를 하고 있는가? 를 묻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오늘이라는 경기장 안에서 열심히 주님의 뜻에 맞게 뛰고 있는가? 를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나는 지금 세상으로 인해 공격받고 있는 세속적인 일련의 것들로 인해 본향을 향한 경주를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 또한 긴장해야 합니다. 더불어 매일 그 질문을 던지며 사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물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봅니다.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 골인했을 때 주님으로부터의 신실한 허깅을 기대하면서. 최보라 선수의 감동적인 마라톤 레이스를 지켜보면서 디모데후서의 정금 같은 말씀이 다시 용솟음쳤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