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0번째 강해) 제목: 격(格) 본문: 고린도전서 12:8-11 서론) 요즈음 국회에서 국정 감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경험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국정감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 이 나라는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입법부의 국회의원들 기세가 등등하기에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간, 모 정당의 원내 대표가 국정감사 중에 피감기관 수장에게 본인이 생각하는 데로 답변을 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갑자기 막무가내로 윽박지르는 것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윽박지름 자체도 천박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날 그 국회의원의 어처구니없음은 본인보다 연배로 보이는 피감기관의 증인을 향하여 반말로 공격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제가 그날 그렇게 천박하기에 이를 데 없는 말로 폭력을 행한 그 국회의원에게 정말 참담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상당수의 국회의원들의 수준에 대하여 이미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분노한 이유는 그 윽박지름의 장본인이 지역구에서 아주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고 소문난 기독교인이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지역구에서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정까지 받고 있는 그의 행태가 텔레비전을 통해 여과 없이 방영되는 것을 보면서 오늘 현장에서 목사로 살아가는 저는 숨소리도 크게 낼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자 단어 중에 격(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그 뜻을 풀면 ‘바로잡는다.’ 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뜻으로 풀면 그 의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格을 말 그대로 인격(人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격’이라는 글자를 한자 단어 풀이에 의지하여 설명한다면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인격이란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바름 혹은 똑바름이다.” 그래서 그랬나 봅니다.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의 소유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있다.”고 말한 것이 말입니다. 오늘 저는 ‘격’이라는 단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천박하기 그지없는 반말로 알량한 국회의원의 권위를 뽐냈던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저는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닮으려고 삶으로 노력하는 자이어야 하거늘 그가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반적인 세인들보다 더 천박한 행위로 살아간다면 심각한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제천에 14년 전에 발을 디뎠을 때 누구나 그런 것처럼 제천이라는 도시는 아주 낯설었습니다. 부임한 지 약 2개월 즈음에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외부였습니다. 부교역자가 인도하는 데로 식사장소에 도착해 보니 일련의 남자 집사들이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염소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매년 그 소그룹은 이렇게 야외에서 모이며 단합을 도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아무 것도 모르고 참석한 저는 훗날 그 날의 상황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쓰립니다. 그곳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베론 성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천에서 베론 성지가 갖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나중에 알게 된 저는 그 날의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수치스러웠습니다. 타 종교 성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최소의 인격적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인격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왜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 훨씬 수준 높은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까? 우리들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론) 우리들이 본문으로 연구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2장은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은사 장이라고 정의할 만큼 성경에 기록된 여러 글들 중에 가장 은사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된 9개의 은사가 선명하게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인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인 저와 여러분에게도 초미의 관심을 끄는 대목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9가지의 은사를 먼저 열거해 보겠습니다. ⓵ 지혜의 말씀 ⓶ 지식의 말씀을 ⓷ 믿음 ⓸ 신유 ⓹ 능력 행함 ⓺ 예언함 ⓻ 영들 분별함 ⓼ 방언 말함 ⓽ 방언통역 등입니다. 저는 이 9가지 은사의 관심도가 적어도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지대하기에 그냥 개괄적으로 넘어가지 않고 앞으로 4주에 걸쳐 세밀하게 살핌으로서 은사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인 이해는 물론 그 결과물로 얻어진 이해를 토대로 가장 신학적이고 성서적인 은사 이해에 도전함으로서 혹시 우리 교회의 지체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곡해되거나 오해하고 있는 잘못된 은사 이해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척결하는 기회를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오늘 주일에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9가지 은사들을 소개하면서 바울이 붙인 수식어에 대한 해석입니다. 왜 이것을 먼저 살피려고 합니까? 잘못하면 간과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찾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본문 8-10절을 읽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9가지의 은사를 소개하면서 바울은 분명한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지시 대명사와 지시 형용사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호스, 알로스)’, ‘다른 사람에게는(헤테로스)’이라는 수식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단어들이 9가지의 은사에 빠짐없이 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9가지의 은사를 설명하면서 이런 지시대명사와 지시형용사를 각기 은사들에게 동일하게 붙였을까요? 두 가지의 신학적인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은사는 결코 비교 대상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의 이 포석을 전제하여 8-10절을 오늘의 언어로 풀겠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 라는 지체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지혜의 말씀이 필요하다고 간주하셨다. 그래서 그에게 지혜의 은사를 주셨다. Ⓑ 라는 지체에게는 무엇보다도 믿음이라는 은사가 필요하여 이 은사를 주셨다. Ⓒ 라는 지체에게는 방언의 은사를 주면 그가 훨씬 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감할 수 있겠다 싶어 방언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자에게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잘 사용하면 성령의 도구로 하나님 앞에서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결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은사가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적인 감각으로 교우들에게 풀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는 꿈도 꾸지 못하는 일들이 오늘 아들이 다니는 신학교에서는 버젓이 일어나고 있어 유감인 일들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설교 대회입니다. 심지어 이 대회를 통해 장학금까지 주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까 아연실색입니다. 학교 당국에서 이 대회를 연 이유에 대하여 심정적으로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설교문 작성 훈련, 설교자의 언어와 표정과 억양 관리, 그리고 신학생으로 공부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대회는 시작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설교는 비교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언급했던 조지 휫필드 목사의 예를 다시 한 번 드십시다. 벼락과 천둥이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자후가 설교 안에 있습니다. 성령이 자유자재로 역사하는 능력의 권세가 설교 안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이 설교 원고가 탁월함에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신학박사가 쓴 설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언젠가 한 번 이야기를 드렸지만 D.L 무디 목사는 1870년대의 정황으로 볼 때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목회자였습니다. 심지어는 무디 목사의 대중적인 인기를 시기하던 동료 목사는 그가 크리스마스라는 영어단어에 T라는 알파벳이 있는 줄도 모르는 무식한 자라고 폄훼할 정도로 정말로 너무 평범한 목사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에 T 라는 알파벳이 있는지도 모르는 무디를 통하여 1870년대에 죽어가는 200만 명의 미국인들을 회심시킨 불의 메시지를 증언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설교는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지. 같은 맥락에서 은사도 매 한 가지입니다. 성령님이 교회의 질서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는 은사는 각기 그 은사를 받은 자들에게 최대 공약수를 뽑아내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말씀을 잠시 언급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뒤에 갈릴리 디베랴로 낙향하여 옛 직업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두 번째의 미션을 주시면서 그를 용서하시고 품어주셨습니다. 그런 뒤에 베드로에게 앞으로 그가 경험하게 될 사역의 내용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네게 젊어서는 네 스스로 원하는 데로 행동하고 멋대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21:18-1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많은 신약학자들은 이 대목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게 될 것에 대한 고지라고 해석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 고지를 들은 베드로는 순간, 기분이 상했습니다. 왜 나만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지에 대한 마음으로 빈정이 상한 것이 분명합니다. 해서 그가 주님에게 딴지를 건 것이 그 다음 구절에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21:20-21절입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항상 주님의 공생애 중에도 보이지 않는 경쟁관계를 유지하던 요한을 지명하면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 한 것입니다. “주님, 나는 그렇게 죽을 건데 그렇다면 이 요한은 어떻게 죽을 것입니까?” 항의조가 섞인 비교의식입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주 단호하게 쐐기를 박으셨습니다. 요한복음 21: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구절을 풀면 이렇습니다. “비교하지 말고 내가 하는 말에나 순종하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비교의식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암적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항상 ‘너’ 이지 ‘그’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주신 은사는 너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에게 필요한 개별적인 것이지 네 은사와 그의 은사가 무엇이 다르지, 어떤 것에 더 큰 무게가 있지? 의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은사는 개개인에게 성령 하나님이 허락하신 독특하고 유일한 사역의 도구입니다. 은사를 가지고 비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인격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은사 이해 방법입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마지막 두 번째의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인격적 성령 하나님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지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에 대한 적절성의 시비는 내 몫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이 나에게 그 어떤 은사를 주셨다면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인격적인 선택으로 그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가지고 싶은 은사의 목록이 있다면 그건 순전히 내 의지입니다. 은사는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성령 하나님께서 가장 완벽하게 나를 판단하시고 나를 위해 주시는 인격적인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성령 하나님의 그 선택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은 내가 받은바 은사를 인격적으로 사용하고 은사대로 사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대로 산다는 것의 결정적인 증거는 순종의 삶으로 은사를 승화시켰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성령 하나님의 결정에 인격적으로 반응하고 존중하여 그 은사에 순종하면 살았던 사람을 소개하라면 저는 주저 없이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를 추천할 것입니다. 한 남자와 정혼하여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한 순결했던 처녀 마리아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성령 하나님의 고지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이것은 마리아 개인에게는 무시무시한 아픔과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죽음을 담보한 선언을 고지였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고지에 순순히 아멘 할 여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마리아는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약혼자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기막힌 고지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약혼녀의 임신은 간음을 통한 임신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임신이라는 고지였습니다. 세상에 이걸 믿을 남자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수태고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두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일하시는 그 일함을 인격적으로 순응한 두 사람의 대단한 믿음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먼저 요셉의 인격적 선택을 보십시다. 마태복음 1:24-25절입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이어서 마리아의 인격적 선택을 보십시다. 누가복음 1:37-38절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신앙이란 성령 하나님의 선택이 내 선택보다 완벽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치 마리아와 요셉처럼 말입니다. 왜 하나님, 나에게 이런 은사를 주셨지요? 라고 대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이 은사보다 저 은사를 원하는 데 번지수를 잘못 찾으신 것 같네요. 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령 하나님이 나에게 접근하셔서 일하신 그 사역이 인격적인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이드 니브 박사가 쓴 ‘구약의 성령론’이라는 책을 차준희 교수가 번역하여 보내주었습니다. 친구가 비평적 서평을 부탁한다고 해서 조금은 세밀하게 읽었습니다. 책 제목부터가 의미 있지 않습니까? 성령 하나님을 발언할 때 전제하는 것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님을 떠올리기 때문에 항상 성령 하나님의 인식은 신약적입니다. 그런데 니브 박사의 논문들은 모두가 구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습니다. 책을 읽다가 모세 오경에 나타난 하나임의 영(루하흐)을 위시하여 계속해서 구약 전반에 흐르는 성령 사상의 특징이 일관성이 있게 기록되었다는 흥미진지 한 사실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활동하신 성령 하나님의 아주 뚜렷한 특징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위격(hypostasis)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태도를 결정하게 된다. 성령에 대한 불순종은 성령을 매우 슬프게 만들고, 성령이 떠나가게 만든다. 그 결과 신성한 삶의 흐름이 중단된다.”(p,233)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간의 태도에 따라 당신의 사역을 결정하는 가장 인격적인 영이시라는 결론 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 우리 세인 교회 성도들이 설교 제목으로 돌아가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에 대한 태도를 겸비할 교훈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 하나님의 위격을 존중하고 그 분의 사역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분이 주신 은사라는 선물을 비교하는 불신앙을 저지르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성령 하나님이 나를 위해 택하신 선택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분의 일하심을 존중해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에 인격적으로 반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출타하기 위해 승용차 운전석에 가보니 신천지 집단에서 만든 소위 말하는 찌라시 전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찌라시에는 가짜 한기총과 진짜 신천지의 교리를 비교해 보라는 압박과 자극적인 문구들 천지였습니다. 글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신천지 집단이 말하는 교리가 100, 1,000번 양보해서 맞는다고 치더라도 그 집단에는 속하지 않을 것 같다는 소회 말입니다. 첫째 글 자체가 무례하기 그지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단 한 글자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힘으로 무분별한 논리로 압박하는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을 비인격적이라고 말합니다. 비인격적인 그 집단은 그 논리의 시비를 떠나서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집단이기에 경계합니다. 두 번째, 이제까지 받은 일체의 신천지 관련 문서들은 공개적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순간, 혹은 은밀한 공간에서 배포되었습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격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면 인격을 소유해야 하고 사물이면 품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신천지 집단은 비인격적입니다. 왜 신앙인은 인격적이어야 합니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이 인격적인 일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는 우리 세인 교우들이 성령 하나님의 은사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그 성령의 은사를 교회의 질서와 유익을 위하여 인격적으로 사용하시는 격조 높은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