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개혁, 개혁 하지 말라2024-02-26 15:40
작성자 Level 10

10월 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 설교)

 

제목개혁개혁 하지 말라

본문역대하 15:8-15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종교 방식의 종교인이 된다든지 어떤 방법을 기초로 뭔가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리스도인답다는 것은 저 멀리 인간 세상과는 동떨어진 곳에서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은 사람이 사람 되어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삶에 가치를 둡니다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무대로 활동합니다세상에 적응해 함께 일하고 영향을 끼치며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풀 죽은 비관론자가 아니라 이 세상 한 가운데서 기쁘고 쾌활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정말로 기독교는 비겁할까?,p,18-19)

본회퍼 학자인 만프레도 베버가 편집한 글 속에 담겨 있는 본회퍼의 글입니다.

수 년 전에 이 글을 만났을 때 이런 소회가 저에게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로 이 땅에 서 있는 방법은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이 땅에 서 있는 방법은교회가 참된 교회로 이 땅에 서 있는 방법은 이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그냥 정상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김기석 목사가 쓴 책인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서평을 17번째 책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겨 놓았습니다.

삶의 정상화란 곧 삶의 인간화이다초월의 지평을 도외시하고는 도무지 난마처럼 얽혀 있는 세상사를 풀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욕망이라는 쇠 항아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사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는 법입니다.”(p,228)

이 글에서 쇠 항아리를 뒤집어쓰고 사는 이’ 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 글귀를 이렇게 해석해서 소그룹 지체들에게 전한 적이 있습니다.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1517년 독일에 비텐베르크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의 정문에 한 젊은 사제가 당시 종교적 상황을 전제할 때 경천벽지의 폭탄선언이자 양심 고백 선언문을 내걸었습니다.

만유의 주님이시며 영원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선포하신 그 골자는 성도들의 생애가 참회의 요소가 있어야 함을 의미하노라로 시작하여 이와 같이 하여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보다 많은 값진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할지어다.”로 끝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이 가톨릭의 심장부와 같은 독일의 한 성당에 내걸린 것입니다.

이 95개 조항의 대부분은 교황이 가지고 있는 무소불위의 제왕적 권한에 대한 정중한 도전이자 거부의 선언이었습니다.

이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걷잡을 수 없는 시대적 요청으로 그 불길이 일어나 거대한 공룡인 가톨릭을 무너뜨렸고 결국 오늘의 개신교회를 이 땅에 탄생하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은 정말로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과 같았던 루터의 행동하는 고백이 있은 지 500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서울신학대학교 교수로 있는 이길용 교수는 제가 참 귀하게 여기는 후배입니다.

종교학을 전공한 후배가 얼마 전에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루터 팔이는 되지 않아야 할 텐데 루터가 뭐 황금박쥐도 아니고그의 제한적 개혁을 무작정 띄워줄 생각은 1도 없습니다.”

후배의 일침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장본인 역시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가톨릭 교권에 대한 저항의 수준이었지 그가 요즈음 사람들에게 그렇게 추앙을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비평적 차원에서 학자적 양심을 갖고 오늘의 종교개혁 500주년에 너무 들 떠 있는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냉소한 글입니다.

교회사를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루터는 동시대에 살고 있었던 토마스 뮌처라는 농민 운동을 한 사역자와는 정 반대되는 귀족적 신앙의 행보를 보인 사람으로 한편으로는 비판받는 사람이기에 루터를 너무 우상화하는 것에 대하여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이 교수의 지적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주일에 어떤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조명하려는 위험성을 배제하고 정말로 향후 501주년 종교개혁주일을 향하여 나아가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몸가짐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4번에 걸쳐 이루어진 종교개혁 중에 그 첫 번째의 개형 운동을 소개하고 있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사의 종교개혁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은 15장의 한 복판에 있지만 사실 아사의 종교개혁을 알리는 텍스트는 14장부터 진행됩니다.

14장의 글은 아사의 제 1차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고우리들이 읽은 본문 15장은 제 2차 종교개혁을 말해주고 있는 본문입니다.

조금만 더 세부적인 본문 이해를 위해 정황들을 살피겠습니다.

남 유다는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인 르호보암을 왕으로 추대한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기초로 세워진 국가공동체입니다.

솔로몬 왕 치세 말년에 하나님의 통치와는 거리가 멀어진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쪼개지는 비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술한 남 유다는 솔로몬의 부하였던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10개의 지파가 동맹하여 이룬 북쪽 이스라엘보다 상대적으로 국력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기에 주변 국가들로부터 심각한 침략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솔로몬 시대부터 전 지역에 만연되어 있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의 잔재들은 남 유다의 치명적인 영적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솔로몬 사후에 뒤를 이어 왕에 등극한 아비야는 이런 나라의 정황들을 올바르게 통치하지 못하고 3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을 보낸 뒤 사망하자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아사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미 소그룹 성경공부에서 공부한 대로 긍정적부정적 역사의 기록을 숨김없이 기록한 신명기 역사는 열왕기상 15:9-24절이라는 아주 제한된 분량으로 아사의 통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반면이스라엘 역사를 긍정적인 면에서만 평가하여 기록한 역대기 역사서에서는 아사의 통치 기록을 14-16장에 걸려 소상히 자료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사의 위업을 얼마나 후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만큼 아사의 종교개혁은 앞으로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계속 이어질 여호사밧히스기야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아주 중요한 역사 기록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남쪽 역사에 이렇게 중차대한 선한 영향력을 끼친 아사의 개혁이 도대체 어떤 개혁이었기에 역사가들이 주목하였을까요?

이제부터 그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아사의 종교개혁의 핵심적 팩트는 조국을 두 나라로 양분시키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한 근거이자 동시에 유다를 가장 약한 국가공동체로 전락시킨 원흉이었던 우상의 척결이었습니다.

제 1차 종교개혁이라고 불 수 있는 역대하 14장에는 주로 외형적 우상들을 제거하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손쉬운 예를 들자면 지난 2주 동안 본의 아니게 단풍관광 계획 때문에 몇 몇 산을 찾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명산에 여지없이 세워져 있는 고찰들을 경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찰들의 대웅전마다 사람들을 압도하는 부처상들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는데 마치 이런 맥락과 동일하게 남 유다 즉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기업으로 얻은 전 유다 땅에 세워져 있는 각종 우상의 흔적들을 제거하는 개혁을 진행한 것이 14장에 기록된 1차 아사의 종교개혁 모드였습니다.

역대하 14:3-5절을 읽어보십시다.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하나님은 이런 아사의 노력에 적지 않은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해서 주변 국가들의 서슬이 시퍼런 침략의 분위기 속에서도 14:1절을 참고하면 10년 동안 태평성대가 지속되었음이 역사가에 의해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오늘 우리들이 본 15장은 아사의 제 2차 종교개혁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 두 번째의 개혁 운동은 내부적영적 개혁 운동이라고 보면 적절한 해석이 될 것 같습니다.

15장의 시작은 당시 아사에게 영적인 멘토의 역할을 감당한 오뎃의 아들 예언자 아사랴에게 임한 신탁을 소개하면서 진행됩니다.

아사랴에게 임한 신탁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15:2절입니다.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어떤 의미로 보면 아브라함모세다윗의 계보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전 역사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언약 공동체로 인정하시고 맺은 계약의 본질적인 내용이 바로 아사랴를 통해 다시 재확인한 내용이 아닙니까?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도 너희를 만나겠지만너희가 나를 버리면 나도 너희를 버릴 것이라는 이 엄연한 계약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가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를 알고 살아가야 하는데 아사의 통치 이전의 유다의 영적 상황은 바닥 그 자체였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바닥을 쳤습니까?

이어지는 15:3절은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

그렇습니다.

아사의 통치 기간이전에 유다는 3무의 나라였습니다.

참 신(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었습니다.

율법이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아사랴의 선포는 탄식이었습니다.

영적인 참담함의 절규였습니다.

이 신탁을 받은 아사의 반응을 곧이어 살피십시다.

오늘 설교의 본문이 시작되는 8절에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애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도 없애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고

그냥 성경책에 문자로 기록된 구절이기에 교우들이 이 말씀이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올지 긍정적으로 장담하기가 쉽지 않지만 적어도 설교자인 저에게는 이 구절이 가슴 벅참으로 다가옵니다.

마음을 강하게 했습니다.

가증한 물건들을 빼앗아 일소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이 감격적인 우상 청소에는 열외가 없었음을 역사가는 분명히 밝힙니다.

아사의 모친인 마아가가 습관으로 갖고 있었던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마저도 빼앗아 가루로 만들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 소각했음은 물론 국가적 개혁 운동에 반대편에 있었던 어머니를 폐위시키는 아픔도 감수했음을 역대하 15:16절은 숨김없이 보고합니다.

이제 이렇게 내부적심정적 우상 숭배를 단호하게 개혁한 아사의 제 2의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역사가 의미하는 교훈을 찾아내야 합니다.

저는 그 답을 본문 11-13절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고 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이 구절을 통해 저는 두 가지의 아사 개혁의 원 모드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싶습니다.

 

1) 예배의 자리로 옮겨 타는 회복입니다.

 

14장에 보면 아사는 에티오피아의 세라가 이끄는 백만 대군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중과부적이었지만 드라마틱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4:9-15)

이 전투에서 승리한 아사는 획득하고 노획한 탈취물들 중에 소 700마리와 양 7,000마리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11절 본문에서 보고합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찾아냅니다.

에티오피아 세라의 군대는 백만 대군이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철 병거(오늘날로 표현하면 기갑부대에 무장된 탱크) 300대로 완전무장한 최 정예화 부대였습니다.

이 말은 세속적 가치로 표현한다면 넘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바벨리즘의 극치였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치할 수 있는 최고의 하나님과 같은 가치였다는 말입니다.

이런 결코 이길 수 없는 이 싸움에서 아사의 군대가 승리했습니다.

어떻게 이겼는지 아십니까?

역대하 14:11절은 전율하는 감동의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아사의 이 신앙이 이길 수 없는 전투를 하나님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대체하겠습니다.

도무지 상대하기 어려운 21세기의 세속적 가치의 최고봉을 주님의 가치로 승리한 하나님의 사람이 그 세속의 가치를 제물 삼아 하나님께 승리의 보고를 드린 사건의 현대적 정의입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아사 시대 전까지 단절되었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회복되었다는 교훈입니다.

다시 11절을 곱씹겠습니다.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고

개혁’ 이라는 단어를 영어 단어로 표현할 때 ‘REFORMATION’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형태에서 저는 오늘 설교의 첫 번째 교훈인 예배의 회복이라는 팩트에 대한 아주 선명한 은혜를 받습니다.

‘REFORMATION’은 두 단어가 합쳐진 명사형태의 단어입니다.

영어 단어 ‘FORM’ 은 이른바 형태형식 등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개혁이라는 단어는 이 ‘FORM’ 이라는 단어 앞에 접두사 ‘RE’ 를 붙여 만든 단어입니다.

‘RE’ 는 다시’ 혹은 두 번째’ 라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이라는 표현의 ‘REFORMATION’ 은 직역하자면 흐트러진 어떤 형태의 형상을 재조각하여 원래의 형태로 맞추는 행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 적용한다면 개혁개혁하는 모토의 진의와 실천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부쳐진 95개 조항의 교황권에 대한 반박문을 다시 붙이는 행의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래의 의지로 다시 형태를 갖추는 작업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다시 꿰맞추어야 하는 영적 REFORMATION 즉 개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시스템의 전환프로그램의 도입조직의 활성화교회 행정의 효율화, 10-20년 뒤의 교회 미래 청사진 제시 등등의 수순을 도입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동적인 교회로 만들어가는 것도 경우에 따라 필요한 일이지만그 보다 앞선 그리고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오늘 2017년의 진정한 ‘REFORMATION’ 은 세속적 가치를 끊임없이 추구하게 만드는 세속에게 드리는 예배를 일소하고 그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리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로 옮겨 타는 것이야 말로 세인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 개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예배 자리로 옮겨 탄 뒤에 잊어버린 하나님을 그 예배에서 다시 찾는 원상회복입니다.

 

본문 12-15절에 걸쳐 무려 3번이나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며

1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자들은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15절입니다.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만나 주셨고

예배의 정의를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여호와를 찾는 자리이다.”

제가 왜 이 정의를 강조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강조한 찾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라쉬는 특히 히브리 공동체에서 예배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찾는 시간입니다.

워싱톤 사귐의 교회를 시무하는 김영봉 목사께서 몇 해 전에 펴낸 그 분 안에 내가내가 그 분 안에’ 라는 요한일서 강해 설교집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예배는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듣고 바람 같고 햇살 같은 하나님을 만지는 것입니다하지만 우리의 예배는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하나님을 만나고 듣고 만지고 보고자 하는 열망이 없습니다그런 열망과 간구를 가진 사람도 알고 보면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유 때문입니다하나님이 목적이 되고하나님이 주인이 되고하나님이 이유가 되는 예배를 보기가 힘듭니다.”(pp,105-106)

김 목사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이렇게 신학적인 입장을 내놓고 싶습니다.

목회의 현장에서 30년이라는 세월을 씨름해온 현직 목사로서 뼈저리게 저를 몰아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즐김’ 이라는 유감입니다.

예배를 즐기는 자들의 특징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오늘 설교는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명 설교였습니다.”

오늘 대표기도는 대단한 은혜의 표현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탁월한 기도였습니다.”

오늘 성가대 찬양은 화음이 조금 어색해서 아쉬웠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너무 식상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복이 임하는 축도만큼은 정신 차리고 받았습니다.”

예배가 무엇인지 기본도 모르는 자들의 헛헛한 토로들입니다.

금년 초에 티모시 켈러 목사의 설교라는 책에서 읽은 글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에 마무리 작업으로 다시 말해도 또 다른 도전이 될 것 같아 재음미해 봅니다.

조지 휫필드가 처음 그의 설교를 출판하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 그는 일단 동의를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천둥과 번개를 지면에 담아낼 수 없을 텐데요.” (티모시 켈러의 설교’ p,257)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가슴을 강타하는 천둥과 번개가 치는 강력한 성령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습니까?

지금 2017년 10월 29일에 드리는 종교개혁주일 설교와 예배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만지고 듣고 체휼하는 하나님 찾기의 감동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여호수아 5:12절을 읽어드립니다.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의 경종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만나가 내린 기간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입니다.

끝없이 만나가 내린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그 땅의 소산을 먹은 날부터는 만나가 그쳤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성령을 보내심으로 주실 수 있는 은혜를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보내신 성령님의 민감한 은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이제 내가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은혜가 지속되는 곳이 어디입니까?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열망하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예배를 우리들이 즐겨서야 되겠습니까?

세속의 가치에 함몰되어 있다가 주일 날 교회에 나와 예배를 즐김으로 도장 찍어서야 되겠습니까?

예배의 회복은 여호와를 찾는 투쟁입니다.

지난한 고투의 과정입니다.

난 오늘의 설교의 교훈에 해당되지 않는 군번이라고 생각하는 일체의 신자들이여 들으십시오.

예배조차 3인칭 복수화를 시키고 철저히 주관화를 시키는 자들에게 선포합니다.

2017년의 종교개혁은 말과 슬로건의 개혁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임을 명심 또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을 교회 홈피와 제 불로그와 SNS에 링크했습니다.

다른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분위기가 살얼음판과도 같습니다.

지인들이 부담되는 직격의 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슬로건 목회는 이제 충분합니다.

개혁개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돌아와 REFORMATION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배의 자리로의 회복그리고 그 예배를 즐기는 것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회복이것이야 말로 종교개혁 500주년에 오늘 우리 세인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긴박한 메시지입니다.

담임목사도 예배를 1인칭 단수화함으로 날마더 감동의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 철저히 객관화된 자아의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겠습니다.

교우들도 담임목사가 가고자 하는 방향성으로 함께 걸어가 주기를 바랍니다.

20세기 불의 사자라고 불린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교회 부흥에는 단 한 푼의 돈도 필요하지 않다다만 피와 눈물과 땀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 p,231)

그렇습니다.

예배를 통해 땀을눈물을 그리고 보혈의 은총의 피를 흘리고 공유하십시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의 예배가 끝나면 모든 성도들이 피와 땀과 눈물이라는 하나님의 흔적으로 일주일 동안 삶의 현장에서 밑줄 그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군대인 마하나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