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유익(有益)인가? 유해(有害)인가?
본문: 고린도전서 12:4-7
서론)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평신도 시절 섬기던 출신 교회는 상당히 정적인 교회였습니다.
은사 집회를 밥 먹는 듯이 했고, 부흥 강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와서 부흥회를 인도했던 교회였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저는 평신도 시절,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위 말하는 각종 은사들이 교회에서 떠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방언의 은사를 받고 기뻐했고, 또 어떤 이는 심지어 방서(方書)라는 이름의 이상한 글자를 쓰는 것도 보았습니다.
예언을 하는 권사님들이 다반사였고, 해서 그 분들을 중심으로 함께 모여 예언 기도를 해주는 기도파도 생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청년들과 학생들 중에 상당수가 입신을 경험해서 웬만한 은사 체험 같은 것으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그런 은사중심적인 교회였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학생회, 청년회에서 제 동기들은 물론 상당히 많은 선후배들이 각종 은사들을 경험한 뒤에 뜨겁게 신앙생활을 감당했던 것이 지금도 제 뇌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은사는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활력을 주며, 동시에 그 은사가 개인들의 신앙적인 무기가 되어 신앙의 여정을 견고하게 만드는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은사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허나 은사에 대한 한국교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 반대의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측면도 제 출신교회의 예를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출신 교회를 섬길 때, 저는 중등부 교사의 직을 감당했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감당했던 부서의 아이들에 대하여 향후 관심이 지대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고향을 떠나 목회자가 되어 상당수 많은 고향 교회의 제자들과의 소식을 끊어졌지만 직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 중에 조금 전 거론했던 당시 저와 함께 고향 교회를 섬기던 은사 체험의 한 복판에 있었던 제자들, 그리고 선후배들 중 상당수가 신앙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그들이 신앙의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저에는 믿어지지 않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체험적 신앙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그들 중 몇은 기독교를 저격하는 저격수로 활동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려 못내 아쉬움은 물론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론)
일반적으로 많은 목회자들과 신약학자들은 우리들이 지금 연구하는 고린도전서 12장을 가리켜 ‘은사장(恩賜章)’이라는 표현으로 정의하곤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익숙한 단어인 ‘은사’ 에 대하여 바울이 아주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해석했음은 물론 신학적인 해제까지 남겨놓은 성경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접근은 은사라는 단어의 한자적인 의미입니다.
‘恩賜’를 풀이하면 ‘은혜로울 恩’과 ‘선물 줄 賜’의 결합입니다.
말 그대로 은사란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단어의 정의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은사의 대단히 중요한 특징은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이 말의 대전제는 은사는 누군가에게 받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만들어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간과해서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명심해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은사는 사람이나 특정한 비인격적 주체에 의해서 남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4-6절이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이 구절에서 여러분은 잘 보이지 않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경험한 삼위일체적인 체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학자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교부신학자였던 터툴리안이라고 말하는 것에 상당수 동의합니다.
그는 주후 155년 이후의 사람이기에 바울 사도의 연대기보다 약 1세기 뒤의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바울은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이미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했다는 증거가 바로 오늘 본문 4-6절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은사(카리스마타)는 성령이 주셨고, 교회 공동체의 직분(디아코니아)은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으며, 교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역사(에네르게마타)의 주체는 성부이신 하나님으로 인하였음을 놀랍게 보고한 것입니다.
대단한 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그래서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주목해야 하는 바른 신학이 있습니다.
은사는 전적인 성령의 선물이며, 교회공동체의 직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선물이며,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역사하심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신학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민감하게 그리고 아주 바르게 직시해야 하는 은사론에 대한 신학적 조망이 필요합니다.
무엇입니까?
※ 은사는 인간의 인위적 조작품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적 작품이라는 교훈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마지막 절을 나누겠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이번에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
헬라어 단어 ‘퐈하네로시스’의 번역인 ‘나타내심’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 단어에 주목합니다.
많은 영어성경에서는 문자 그대로 ‘선명하게 드러냄’이라는 ‘manifestation’ 단어로 표현했는데 제가 주목한 영어성경은 복음주의에 입각한 현대 영어 성경 번역으로 의미 중심과 문자 중심의 균형 하에 번역된 성경인 God's Word Translation(GWT) 성경이었습니다.
GWT는 이렇게 고린도전서 12:7절을 옮겼습니다.
‘The evidence of the Spirit’s presence‘
즉 ‘성령의 임재에 대한 증거’ 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제가 이 번역에 주목한 이유는 다음 주에 함께 나눌 9가지의 은사 내용들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증거의 산물임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미리 잠시 간을 본다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신유,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방언 말함, 방언 통역함이라는 9가지의 은사들이 성령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바울은 분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성령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은사들을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셨다고 확신했을까요?
그 답이 오늘 본문 마지막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대단히 중요한 답변이자 오늘 설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는 은사를 받은 개인에게 유익하게 함이고, 둘째는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왜 이 점에 천착했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고린도교회의 은사에 대한 무질서 때문이었습니다.
동시에 은사 받은 자들의 무례함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무례했고 무질서했습니까?
듀크 대학교의 리처드 헤이스 교수의 주석으로 이 답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즉 자신이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천상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이 자신들의 영적인 권능과 성숙의 궁극적인 사인이라고 믿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 예배 모임은 여러 가지 교인들이 성령의 영감 아래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동시에 하면서 무질서한 혼란에 빠져 들어갔다. 아마 방언의 과시 속에 서로 잘하려고 경쟁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만찬의 남용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일에 대해서도 공동체의 균열을 가져오는 행동을 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칭찬할 수 없었다.” (고린도주석, p,384)
무슨 말입니까?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주기 위해서 나타내신 은사들을 받은 자들이 도리어 그 은사를 신령한 그 무언가를 받은 권위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서 교회 공동체에 유해를 주는 존재들로 변질되었기에 그 무례함과 무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바울은 12:7절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의 현상인 은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바울의 이 강력한 의지 천명을 14장을 연구할 때 더 세부적으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세부적인 공부의 내용은 그때를 기약하고 오늘은 성령의 은사가 교회에 공급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에 대하여 접근하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이자 핵심적인 레마가 바로 이것입니다.
※ 내 은사가 성령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 선물의 은사인지를 확인하는 결정적인 방법은 내 은사가 교회 공동체와 성도 간의 유익을 주고 있느냐? 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가 교회의 유익을 주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공급해 주신 선물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내 은사로 인해 교회가 무질서해지고 나 자신을 나타내는 도구라면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은사이든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라고 착각의 망상에 빠져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유익하게’로 번역된 ‘쉼페론’ 이라는 단어가 참 흥미롭습니다.
‘쉼페론’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짐을 함께 옮긴다.’ 는 뜻입니다.
짐이 무거워 두 사람이 함께 짐을 맞들어 물건을 옮긴다는 참 좋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조금 더 의역해서 ‘조화를 이룬다.’는 뜻의 ‘심포니’ 라는 영어 단어가 탄생한 것입니다.
독일 필하모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어떤 연주를 합니까?
모든 현악기, 타악기, 금관악기, 건반악기 등등의 일체의 악기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창조하지 않습니까?
똑같은 의미로 성령의 은사로 이해하십시다.
성령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증거인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유는 조화로운 질서와 조화로운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들이 주의해야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특별은사집회’라는 슬로건입니다.
이 단어를 해석하는 것은 현직 목사로서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단정적으로 정의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이런 슬로건을 내건 교회의 목회자는 건강한 신학을 소유한 자라고 보기에 어렵습니다.
‘은사집회’ 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이 궁색합니다.
은사가 어떤 집회를 통해 주어진다면 그것은 앞서 설명을 드린 대로 인위적인 그리고 가공적인 은사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어떤 집회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의 영적 상태에 맞추어 필요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날마다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성상가상으로 ‘특별’이라는 단어는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단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이미지를 은연중에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나오지 않으면 은사를 못 받을 줄 알라는 압박과 강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번에야 말로 강사든, 목사든, 아니면 특별한 누군가에 의해서 공급되는 은사를 받을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공격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몇 주 전에 외부에서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 한 지체와의 경험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체는 마침 그 날 담임목사의 설교 중에 톱 탤런트인 박보검 씨가 다니는 예수중심교회의 이단성에 대한 담론을 의미 있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식탁공동체 시간에 그 지체가 교제를 하던 중에 저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나와 만민중앙교회라는 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는 데 담임목사가 치유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00가지가 넘는 인간이 앓고 있는 일체의 질병들의 이름들을 알고 있는 것도 놀라웠는데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모든 질병의 원인이 죄와 귀신들림이라는 이유 때문이라는 진단이었습니다. 해서 그 목사님은 그 날 귀신들을 축귀함으로 일체의 질병들이 떠나갔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에게 한 말이 기억에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감기 몸살이 나면 감기약을 먹어야 났는데 감기는 약이 낫게 하는 것입니까? 귀신 쫓음이 낫게 하는 것입니까? 약도 의사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닙니까?”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질문하는 집사님에게 제가 굳이 답변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제가 기도의 무용론을 말하는 은혜 없는 목사입니까?
저 또한 목회를 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교우들을 위하여 치유 기도를 한 뒤에 하나님께서 경우에 따라 질병을 앓고 있는 성도들을 고치신 일들을 열거하라면 페이퍼로 기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은사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담임목사가 강조하는 설교의 요가 무엇입니까?
작금 한국교회의 상당수의 영역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의 증거들인 은사가 성령의 나타나심의 증거가 아닌 목사나 특별한 개인의 능력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으로 둔갑해 버리는 아연실색함에 대한 반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후에 14장에서 다시 강조하겠지만 이렇게 은사가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능력으로 인위적인 둔갑을 할 때 문제 많았던 골치 아픈 교회인 고린도교회처럼 질서가 와해되고 교회공동체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탄이 무너뜨리는 집단으로 변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교회를 통해 이미 보았던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강하게 권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26-30절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바울은 은사 사용에 대한 신중함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이재철 목사께서 쓰신 ‘사명자반’ 보면 이런 갈파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인격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은사 받은 사람은 독선적일 수 없습니다. 은사 받은 사람은 더 겸손하고 더 이타적이고 더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p, 334)
100%, 1,000% 동의합니다.
어느 유명한 강사가 인도하는 은사 집회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집회에서 강사는 참석한 신자들에게 은사를 공급해 주는 무소불휘의 살아 있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날 강사의 모습을 보면서 혹 간혹 텔레비전에서 만나는 한 대상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말로 예언하는 것이나, 반말로 은사들을 나누어주는 것이나 정말로 빨간 깃발 꽂은 곳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데이빗 플라이어가 쓴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눈을 번쩍 뜨게 해 주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성령은 신령화’ 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은 몸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 분이 내 몸 안에서 일하시는 것은 실제로 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가시적 영광이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pp,266-267.)
대단한 갈파이자 성찰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은 그만큼 인격적인 영이시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성령 하나님도 신령화시키면 안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만든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를 신령화시키는 이 기막힌 참담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지난 주간에 있었던 등록 신자 소그룹 반에서 지체들이 이렇게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예수님께 나아와서 정말로 신비롭게 제 언어가 바뀌었습니다. 목사님, 예수께 돌아와 회복되면서 사랑하는 삶을 살아내려고 하는 내 자아 때문에 저도 놀랍니다. 목사님, 남편을 잃고 많이 힘들었는데 예수께 돌아와 말씀에 집중하면서 말씀이 들리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님, 오늘 목사님이 말씀해 주신 신학은 인문학이라는 말에 너무 큰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에 대한 삶의 애환을 느끼지 못하고 전해지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많이 힘들었는데 오늘 그것을 일소하는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 지성과 영성 사이를 읽다가, 아이든 토저의 GOD를 읽다가, 박경리 작가님의 ‘버리고 갈 것이 없어 홀가분하다.’를 읽다가 필립 얀시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읽다가, 조정래 작가의 ‘시선’을 읽다가 나에게 오셔사 말씀하시는 숨결을 느꼈습니다.”
고백하는 저들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성령의 나타나심의 증거들인 은사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진정한 영적 챔피언들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향에 따라 각자 성령께서 주신 은사들은 유익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까? 유해의 도구로 사용하고 게십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