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2:1-3
서론)
지난 금요일, 경북 영양에 심방 때 차 안에서 이재철 목사께서 쓰신 ‘사도행전 속으로 5’를 읽으며 다녀왔습니다.
책 안에서 이 목사께서는 신영복 선생의 글을 하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네팔 사람들은 자기나라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의 정상을 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네팔 사람들에게 그곳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세계의 알피니스트들은 히말라야의 정상인 에베레스트를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많은 사람들이 그 정상 정복에 도전합니다. 그 도전에 성공을 하든지 실패를 하든지 상관없이 그들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해발 8,848미터의 히말라야 정상에서는 절대로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곳에 이르더라도 곧장 내려오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야 할 곳은 히말라야 정상이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낮고 낮은 이 땅이라는 것입니다.”(pp,181-182)
이렇게 신영복 선생의 글을 아주 의미 있게 소개한 이재철 목사는 이 글에 대한 사족을 다음과 같이 또 다른 의미 있는 말로 남겨 놓았습니다.
“사람인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잊지 마십시다.”(p,182)
저는 이 글을 읽다가 참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일까?
제가 질문을 해 놓고 보더라도 이 질문은 참 불경한 질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정복하다니요?
믿음이란 하나님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 영역에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창세기 11:4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탑 축성이라는 인류 범죄의 전조증상을 알려주는 창세기 기자의 보고입니다.
노아의 홍수라는 세기말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 자란 노아의 후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선조들이 자행했던 죄악들을 망각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이렇게 반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인류를 멸하신 것이 합당한가?
뭐 그리 큰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만든 피조물들을 수장하여 익사시킬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을 가능성이 창세기 11장의 영적 기상도 가운데에 충만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든 피조물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지옥이 없다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뉘앙스와 창세기 11장의 분위기는 사뭇 흡사해 보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작업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들이 쓴 하나님 대항 대 프로젝트가 무엇이었습니까?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세기 11:4)
그렇습니다.
하늘에 우리들의 이름을 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표현이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요?
저는 이 표현을 최초의 사람들을 유혹한 사탄의 꼬임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3: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이 여자를 함락시킨 결정타의 발언이 보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바벨탑의 축성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우리들의 이름이 닿게 하는 욕망, 이것이 바로 바벨리즘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시대의 바벨리즘이 21세기에 무슨 언어로 대치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답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부터 우리들이 공부하게 될 창 12장에서부터 14장까지는 고린도교회의 또 다른 골칫거리였던 은사에 대하여 살피게 될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은사론은 오늘 우리들에도 치열한 논쟁거리이기에 함께 나누는 교우들에게 다른 테제들보다 조금은 더 피부에 깊이 체감되는 공부가 될 것을 담임목사는 기대하며 은사에 대한 여행을 떠나보려고 합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이제부터 다룰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깊숙이 뿌리내린 각종 은사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을 ‘신령한 것’이라는 단어로 대체했습니다.
헬라어 ‘퓨뉴마티콘’의 번역인 ‘신령한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일까요?
우리는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신령한 것’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 말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하는 용어 중에 너무 쉽게 남용되고 오용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영적이라는 단어입니다.
어떻게 남용되고 오용됩니까?
이런 경우입니다.
방언을 한다, 그러면 영적이라고 판단합니다.
예언을 한다, 그러면 영적이라고 해석하는 과유불급입니다.
그렇지 않음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근거의 성경을 제시합니다.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는 지역적으로 그리스 땅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철저한 이방의 땅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린도전서 강해를 통해 수차례 언급했듯이 고린도는 이방신전의 천국이었습니다.
헬라 다신교의 사랑의 신으로 추앙받던 아프로디테의 본거지가 고린도였습니다.
선원들의 안전한 항해를 보장해 주는 멜리세르테스 신전도 고린도 안에 있었습니다.
여성의 신이었던 아프로디테의 상대적인 신인 남성 신의 백미인 아폴로 신전도 고린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우상이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 도시는 로마 황제들을 신격화하여 섬기던 중심 도시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고린도에 거주하던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바울이 말한 대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분명히 이런 우상중에 한 단면을 섬기는 자들이었음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기에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었을 때에’
여기에 기록된 ‘이방인’ 즉 ‘에트네’의 의미는 앞에 전술한 말 못하는 우상들이 이끌어가는 데로 끌려갔던 전적들이 있었던 자들이라는 바울의 표현이 적절합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이방인으로 있었을 때에 이들이 이끌렸던 그 역동들을 소위 말하는 단어로 표할 때 ‘영적’이라는 단어로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우상 종교에 빠져 있을 때 이끌려갔던 황홀경과 같은 체험들을 ‘영적인 것’으로 표현했다면 과연 이것이 바울이 1절에서 말하고 있는 ‘신령한 것들’이라는 표현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의 답은 상당히 중요해 집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린다면 바울의 신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다르다는 것을 2절에서 강력하게 시사해 줍니다.
다시 2절을 읽어보십시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톰 라이트 교수도 이것을 지지합니다.
“‘영적인 체험’과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신령한 일들-설교자 주)’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만 신령한 일들이란 것들의 목적은 주님께 충성을 다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톰 라이트, 고린도전서, p,205.)
그렇다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설파하고 있는 신령한 일들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답을 본문 마지막절인 3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신령한 일은 하나님의 영(성령)이 임한 자가 예수를 저주하지 못한다는 것과 도리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임을 바울은 선명히 밝힙니다.
이 부분도 주석이 필요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이방지역이었던 고린도 사람들은 유대교적인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전승 중에는 구약성경을 기초로 한 전승이 대부분이었기에 고린도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신명기 21:23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명기 21:2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바로 이 구약성경의 전승을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인들은 의도적으로 전하면서 당시에 고린도에 깊이 침투해 있었던 기독교 신앙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는 그래서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여론화시켰을 것은 자명합니다.
동시에 이런 이유 때문에 아마도 고린도지역에서 예수를 믿는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에게 저주 받은 예수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유대인들이 노골적으로 피력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공격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반론하며 방어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영(성령)을 받은 자만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천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너무나도 선명한 믿음으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유대인들의 선동이나 공격에 휘둘리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예수를 저주하지 않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오늘 설교의 서론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본문 3절에 있는 문장으로 다시 곱씹으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하는 역동적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만들어주시는 ‘예수가 주’라고 고백한다는 것이 도대체 신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담보하는 것일까요?
※ 신-바벨리즘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인위적인 방법으로 빼앗는 일체의 것을 신-바벨리즘이라고 정의해도 21세기에는 틀리지 않는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주전 5세기의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정황을 배경으로 벌어진 치열한 영적 상황을 엿 볼 수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즉 이스라엘의 완전한 독립이 스룹바벨 제 2 성전이 재건된 이후에 수십 년이 지나도 성취되지 않자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 좌절하고 부패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당연한 순서이겠지만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더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 신앙에서 그들은 이탈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 대들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반기를 들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선택된 백성의 삶이 아닌 제 2의 랜덤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문제를 제기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였습니까?”(말 1:2절 전반절)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했습니까?”(말 1:6절 하반절)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습니까?”(말 2:14절 전반절)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까? (말 2:17절 전반절)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무너짐입니다.
말라기 예언서에 기록된 질문을 보면서 교우들은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너무나 마땅한 질문이라고 여겨지십니까?
아니면 오늘 내가 영적으로 흔들리면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과 흡사한 내용들입니까?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영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이 무너짐을 인격적으로 막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 영적인 상태를 인격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박보검이라는 유명 탤런트가 지난 주 소설 미디어에서 뜨거운 화제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그가 다니고 있는 교회 집회의 홍보대사 격으로 전도 집회의 포스터 전면을 차지했고 동시에 그의 SNS 상에도 공격적인 전도 사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자유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유명 탤런트라고 해도 그가 지지하고 믿는 신앙의 관념을 공개적으로 홍보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헌데 지난 주에 그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뜨거운 화두가 된 이유는 그가 다니는 교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제천에도 있는 예수중심교회 소속이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한국 교회가 이단으로 설정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박보검이라는 탤런트의 집회 홍보를 문제시 삼은 것입니다.
이단 홍보대사가 말이 되느냐는 반론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한 유명 탤런트를 비난하고자 이 이야기를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친구가 다니고 있는 예수중심교회를 이끌고 있는 이초석씨에 대한 안면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초석이라는 사람을 폄훼하거나 공격하고 싶은 마음도 솔직하게 말하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그와 관련된 개인적인 저의 경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초석씨가 소위 말해 한참 뜰 때 그가 전도용으로 제작한 비디오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내가 혼수품으로 사온 텔레비전인 그 당시 인기가 좋았던 비디오 비전이었습니다.
우연히 받게 된 이초석씨의 전도용 비디오를 비디오 비전으로 틀어보는 기회를 가져보았습니다.
집회 광경을 비디오로 보다가 조금은 우울했습니다.
# 사례 1: 시청자 여러분, 지금부터 강사인 저의 눈과 여러분의 눈을 마주치십시오. 그런 뒤에 제가 기도하는 것을 들으시면 그 순간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게 될 것이며, 더불어 귀신들린 자는 떠나게 될 것입니다.
# 사례 2: 심각한 죄로 인해 귀신들린 자는 저와 눈이 마주쳐 기도를 받는 순간,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니 도와줄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합니다.
듣는 순간, 섬뜩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 나는 주군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사람인데 또 그에 의해서 용서를 받으면 누가 나의 죄를 용서해 준 주인공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그가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혹시 쓰러지면 이런 망신이 어디에 있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바벨리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통한 감격으로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다는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만족하지 못하기에 새롭게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불신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탈의 목회자들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런 일탈의 목회자들에게 열광하는 신자들 역시 하나님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는 공범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초석씨의 비디오를 보면서 경악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만 지존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피조 된 하나님을 만들어내 믿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이 원하시면 병자들을 일어나게 만들고, 귀 먹은 자를 듣게 하고, 암 환자의 암세포를 소멸하게 하고, 귀신들린 자의 악령을 물리쳐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이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하는 테제는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격적인 성령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 일의 주권을 갖고 계신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3절로 돌아갑니다.
예수를 주라고 선언하는 것은 성령님이 그렇게 고백하도록 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바울이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주후 1세기, 고린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선택은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는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든지, 예수는 주라고 말하든지.
주목할 것은 예수를 주라고 선언하는 자들의 그 선언이 사람들의 이성적, 감성적, 의지적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고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반면 예수는 저주받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고린도지역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이성적, 감성적, 의지적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고백이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결코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고 이성적으로 선언하는 자들의 주는 로마의 황제 시저였습니다.
반면, 예수가 주라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고백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황제에게 하나님의 자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는 순교적 영성을 갖고 있었던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대단히 중요한 영적 성찰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내 심장의 한 복판에 예수께서 나의 변함이 없는 주군임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는 자들에 대한 평가가 더불어 이루어진다는 성찰 말입니다.
바로 이들이 진짜로 성령 충만한 자들인 것입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통변을 하고, 신유의 능력을 행하고 등등 이 산을 저 쪽으로 옮기는 능력자들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내 심령의 한 복판에 신 바벨탑을 쌓지 않고 예수께서 나의 유일한 주군이심을 고백하는 바로 그 지속적인 영성을 지닌 자가 성령 충만한 자임을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 교회 홈페이지에 김기석 목사가 쓴 ‘끙끙 앓는 하나님’에 대한 서평을 올려놓았습니다.
예레미야의 한 구절을 집중하여 조명하고 서평을 정리했는데 오늘날 성령의 일하심이라는 차원의 좋은 성경적 증언이 될 것 같고 홈피를 이용하시지 못하는 교우들에게도 참 좋은 성경적 근거가 될 것 같아 예레미야의 성령 충만을 소개하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예레미야를 읽을 때마다 저는 20:9절을 소개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구금하고 린치 하는 폭력을 가했습니다.
더불어 조선시대 역모를 꾀하던 자들을 저작거리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참수한 머리를 걸어놓아 경종했던 것처럼 예레미야를 베냐민 문 위층에 묶어 두어 사람들에게 수모를 준 뒤 방면한 기록을 예레미야서 기자는 기록합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위협과 공포를 경험했던 나약한 인간인 예레미야에게 왜 자괴감이 없었겠습니까?
예언자는 이 수모를 경험한 뒤에 20:7절에서 대단히 민감했던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여과 없이 토로합니다.
헌데 이 토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고발의 성격이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저자는 이 구절을 설명한 글에서 아주 명쾌하고 웃픈 해석을 남겼는데 탁월합니다.
“‘권유하셨다’와 ‘이기셨다’는 표현은 지나칠 정도의 순화시킨 번역이다. ‘권유하셨다’고 번역한 ‘파타하’는 성경에서 여자에게 결혼 전에 성행위를 승낙하도록 설득,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기셨다’고 번역된 하자크‘는 여자에게 혼외정사를 강요하는 것으로서, 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된다.”(p,224.)
무슨 말입니까?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을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작품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달콤하게 유혹해서 예언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순화시킨 단어를 썼지만 하나님은 강간하는 자처럼 난폭함을 동원하셔서 예언을 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강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게 해서 예언을 하게 했으면 나를 책임져야 하는데 나는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예레미야의 영적 상태가 20장에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예레미야의 이 항의 섞인 불만 토로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이제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습니다.
그런데 20;9절은 슬픈 반전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이 고통으로 말씀을 어떻게 전합니까?
그런데 김기석 목사가 20:9절을 ‘끙끙 앓는 하나님’에서 이렇게 주석하고 있는데 감동입니다.
“예레미야에게 달콤한 시간은 지나갔고 소태처럼 쓴 시간이 다가왔다. 대중들의 귀에 단 말을 했더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파멸’과 ‘멸망’을 예고하자 사람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그를 조롱하고 박해했다. 그래서는 그는 다시는 여호와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호와의 말로 인해 빚어진 현실이니 그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으면 괴로움의 시간도 지나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이다. 예언자란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다.”(pp,225-226)
저는 이것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이 글이 왜 감동인지 아십니까?
김 목사가 해석한 20:9절에서 예레미야의 마음을 이렇게 뒤흔들어 놓은 주체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은 기도원에 올라가서 마약 주사만 맞고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치유집회에 가서 불 받아서 내려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일하심을 경험한다는 것은 다시는 여호와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는 것을 경험하도록 성령께서 인격적으로 나에게 오셔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대의 큰 족적을 남긴 달라스 윌라드 박사가 대단히 의미 있는 촌철살인을 본인의 걸작인 ‘하나님의 모략’에서 피력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실재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거듭 확인한다. 사람을 정죄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신자들이면서도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삶을 사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p,158.)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은 자기가 마음 가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은 내 안에 ‘내 마음대로’ 라는 신 바벨탑을 쌓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멘로파크 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인 존 오트버그가 ‘내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는가?’에서 그래서 이렇게 일갈했던 것은 정답입니다.
“당신의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에 헌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늘의 우상임에 틀림없다.”(p,117)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예수가 주이신 것을 인격적으로 확신시켜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 이외의 일들을 재삼 고백하게 하는 불신앙을 제어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철저히 저와 여러분에게 인격적으로 다가 오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26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주 나를 세우시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 지치고 내 영혼 연약할 때/근심 속에 내 마음 무거워/주 오셔서 함께 하실 때까지/나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날 세우사 저 산에 우뚝 서리/날 세우사 풍랑 가운데도/함께 하심 나 강하게 하네/날 세우사 모든 것 할 수 있네
열망 없는 그런 삶은 없으리/끊임없이 고동치는 가슴/주 오셔서 경이로 날 채우고/
영원한 삶 나에게 주시네/날 세우사 저 산에 우뚝 서리/날 세우사 풍랑 가운데도/
함께 하심 나 강하게 하네/날 세우사 모든 것 할 수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