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7번째 강해) 제목: 성찰(省察) 본문: 고린도전서 11:23-34 서론) “불치의 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켜 아기를 살폈습니다. 혹시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신영복, 처음처럼, p,39) 신영복 선생께서 이 글을 쓰고 제목을 ‘성찰’(省察)이라고 붙였습니다. 한자 단어 성찰을 풀면 이렇습니다. 살필 ‘省’ 살필 ‘察’입니다. 다시 말해 ‘성찰’ 이라는 단어의 뜻은 살피는 것입니다. 헌데 주목할 것은 이 단어의 쓰임새입니다. 성찰이라는 단어를 쓸 때의 대상이 2인칭이나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이라는 점입니다. 성찰은 자기를 살필 때 쓰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교회사의 역사 안에서 살펴보면 성찰이라는 단어에 합한 사람들이 즐비했습니다. 교부 신학자인 어거스틴은 그의 걸작인 ‘참회록’(The Confessions)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모르는 것도 고백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리의 빛을 조명해 주셨기 때문이며, 내가 모르는 것은 당신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로 말미암아 나의 어두움이 낮과 같이 밝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회록, 생명의 말씀사, p,164) 정말로 주옥같은 영적 성찰의 대목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거스틴이 주님에게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런 그가 이런 신앙의 정수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께 붙들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철저하게 성찰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 존경하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서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곳에 나를 대신하여 서 계신다. 그 분은 내가 존재하는 영역에 계시며, 내 존재를 넘어선 곳, 거기에도 여전히 나를 위해 서 계신다.” (본회퍼, 그리스도론, p,46.) 대단히 감동적인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서 있어야 하는 자리에 내가 없으면 대신 서 계신다는 그의 말이 적혀 있는 서재에 있는 본회퍼 목사의 색 바랜 페이지를 만날 때마다 눈물짓게 하는 감동이 있습니다. 한 사람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변증학자 C.S, 루이스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내용이 언제나(말 그대로 사실적인 의미로 볼 때) ‘허락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기도가 약한 원인이라서가 아니라 더 강한 원인 때문입니다. 기도가 ‘효과를 발휘’ 할 때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내용을 허락하실지 거절하실지 재량권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 조건이 없다면 기도는 우리를 파괴할 것입니다.”(루이스, ‘피고석의 하나님’, p,133) 루이스가 지적한 기도에 대한 성찰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기도를 들으시는 주권자가 기도의 응답에 대한 반응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근거는 기도 이후의 그림자를 그 분만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신학적 성찰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사역자였던 이 해박한 루이스의 성찰은 저를 놀라게 할 정도입니다. 교회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 세 사람을 소개했는데 영적인 감탄을 자아내게 할 신앙의 선배가 어디 이 사람들뿐이겠습니까? 더 많은 존경할 만한 신앙의 선배들이 저와 여러분 같은 후배들을 위한 큰 그림자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들의 그림자들인 이런 신앙적 성찰들이 오늘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선배들이 영적 성찰을 철저하게 개인화시키며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요? 물론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그들이 삶으로 되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본론) 본문 27-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성찬의 사역을 할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입니다. 바야흐로 이 구절은 바울 사도가 아마도 주의 만찬이 진행되었을 때 구전으로 증언되던 예수님이 전해주셨던 내용을 그도 듣고 그대로 전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바울은 주님이 인도하시던 만찬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마치 그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갈라디아서 1:12절 말씀을 근거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했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12사도로 대변되던 제자들보다 그 권위에 있어서 항상 사도직에 관해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위치에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율법주의로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이 즐비했던 갈라디아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은 그래서 매일 도마 위에 오를 정도로 그에게는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는 글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사도의 권위를 변호하는 글들이 많이 담아야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읽어드린 1:12절입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목할 문구가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문구입니다. 바울은 이 권위를 동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역설하였습니다. 본문 23-26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바울이 이 구절에서 선포한 메시지는 바울의 독창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는 만찬에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하고 있는 이 메시지는 엄격한 의미로 분석해볼 때 그 권위가 사도들의 가르침보다 덜 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본문 23-26절의 메시지가 본인이 직접 다락방에서 경험한 내용처럼 현실감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그 답을 저는 오늘 설교 제목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에서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메시지에 대한 기막힌 성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조금 더 부연하겠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찬을 베푸시면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남기십니다. 그것은 언약이라는 신학적 메시지였습니다. 주께서는 내 몸을 먹는 것과 내 피를 마시는 것은 단순히 몸과 피를 먹는 상징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이 성찬이 나를 기념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신 것입니다. 무엇을 기념하라는 것이었을까요? 리처드 헤이스는 이렇게 기념에 대한 답을 제시하였습니다. “주의 만찬에서의 기념의 의미는 십자가와 파루시아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 간격 안에서 그 분의 죽음을 공동체가 기억하는 일을 표현한다.” (리처드 헤이스, 고린도전서 주석,p,335) 쉽게 말하면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의 의미는 골고다 언덕에서 나를 위한 대속의 물과 피를 쏟으시고 돌아가신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더불어 그 기억을 ‘파루시아’ 다시 말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그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라는 엄숙한 명령임을 헤이스 교수는 역설한 것입니다. 우리가 월삭예배와 절기 때에 행하는 성찬의 예식은 이렇게 주님이 죽으심 이유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라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테마가 들어 있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성찰을 진지하게 소화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지난 주 설교와 접목할 때 고린도교회의 무례했던 식탁공동체에 참여한 일부 신자들에게는 뼈아픈 비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베풀던 만찬이 유일한 끼니였던 가난한 자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수고한 뒤에 만찬에 참여한 일용직에 있었던 신자들, 주인에게 묶여 있어 자유함이 없었던 노예들과 같이 보살핌과 배려가 필요한 자들이 교회 안에 수두룩하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만찬 기회를 집단적 이기성으로 앗아가 버린 부유한 자들에게 연이어 선언하고 있는 바울의 성찬 메시지는 엄청난 경종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이 선언하신 성찬의 신학적 교훈을 서슴없이 선포하였기에 이렇게 경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27-29절을 설교를 생각하며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어떻습니까? 27-29절이 더 성큼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까? 이 구절의 의미를 깊이 있게 받아들였다면 이제 남은 본문 구절은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30-3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앞선 담임목사의 본문 해석을 이해하셨다면 이 구절은 큰 공명으로 울릴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약한 자가 부지기수였습니다. 병든 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열거한 이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서 찾아내야 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 존재했던 이유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세 종류의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바울의 역설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교회 공동체에서 전혀 나약한 자들을 돌보지 않은 자들에 대한 질타가 담보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31절의 동사가 보이십니까? ‘살폈으면’ 조건문의 동사로 이 단어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강력하게 피력하는 것입니까? 살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설교 제목으로 표현한다면 성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에 거주하고 있던 바울은 이 아쉬움을 고린도교회의 일부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부유한 지식층의 신자들에게 전하면서 내가 다시 고린도로 돌아가서 이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을 때가 돌이키고 행동으로 반응해 줄 것을 종용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주 설교에 적용합니다. 만찬이 시작되었을 때 그것이 끼니였던 가난한 자, 만찬에 아직 일 때문에 도착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기다려주라는 권고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을 기다려주지 못하겠거든 너희들의 집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하라고 강력하게 명합니다. 다시 말해 어려운 자들의 끼니를 빼앗지 말라는 압박이었습니다. 그들의 끼니를 빼앗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판단을 받은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바울은 본문에서 역설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주어진 오늘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특별히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면서도 자기중심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했던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는 신자들에게 그래서 영적 성찰을 게을리 한 일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주님의 성찬을 예로 영적 성찰에 민감할 것을 기대하는 메시지를 살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한 메시지를 오늘의 언어로 환원하여 교훈을 받은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세인 교회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하는 영적 성찰은 무엇일까요? 33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이 문장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기다리라’입니다. 헬라어 ‘에크데코마이’ 의 번역인 ‘기다리라’는 참 적절한 번역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톰 라이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의역했습니다. ‘서로를 존귀한 손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고린도전서’,p,196.) 유진 피터슨 목사도 이렇게 의역했습니다. “예의를 갖추어 서로 정중히 대하십시오.”(유진 피터슨, 메시지, ‘고린도전서’, p,464.)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주일에 주시는 본문의 은혜를 이렇게 오늘의 언어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성을 갖고 영적인 성찰을 행할 때 받게 되는 결과는 신앙은 타인을 향한 배려임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신앙은 곧 예의를 지키는 것임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주일은 비슷한 것 같지만 약간의 뉘앙스가 다른 교훈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타인을 향한 배려입니다. 열왕기하 4장을 보면 수넴에 살고 있었던 여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인 즉은 그곳에 살고 있었던 한 여인이 엘리사를 위해 잘 섬겼다는 기사입니다. 사역에 분주했던 엘리사가 수넴에 들릴 때마다 그녀의 호의를 받았던 것으로 성경은 추측하게 합니다. 열왕기하 4:9-10절을 읽습니다.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청하건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 역사가가 글로 기록했지만 수넴 여인이 남편에게 청한 이 내용은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농후했던 유대적인 정서로 볼 때 상당히 위험천만한 발언일 수 있는 내용입니다. 한 가정의 여인이 다른 남자에 대하여 배려하자는 청은 단순히 신앙적인 내용으로 남편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헌데 정말로 다행인 것은 남편 역시 아내의 청에 동의했다는 점입니다. 해서 수넴 여인과 남편은 엘리사가 쉴 수 있는 공간을 준비했고 그 공간을 엘리사에게 제공한 것이 열왕기하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환대와 호의를 수넴에 갈 때마다 받은 엘리사는 그 부부에게 그 호의에 감사하는 대가를 영적인 기적으로 다시 돌려주는 따뜻한 교제가 4장에서 이어집니다. 아들을 낳을 것에 대한 예언, 그리고 낳은 아들이 갑자가 사망하자 그 아들을 다시 살리는 기적까지 엘리사가 수넴 여인 부부에게 되돌려 주었던 감동의 스토리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제가 이 기사를 인용한 것은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받은 섬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았는데 그 호의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유감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받은 호의에 대하여 무 반응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응하였음을 열왕기하 역사가가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열왕기하 4:13절입니다.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그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는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하니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 여기에 기록된 ‘배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라드’는 더 깊은 의미로 ‘전율하게 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소름을 끼치게 하는 감동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단어의 의미를 접할 때마다 무릎을 칠 때가 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긍정적인 의미로 누군가가 타인으로부터 전율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감동적이었음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배려는 타인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감동을 주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가능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행하기 위해서 먼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타인들이 내가 이렇게 함으로 마주쳐야하는 것이 무언지를 심사숙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자기 성찰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마련입니다. 부유한 목회를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지리적 상황으로 부유한 교회를 만들게 되어 목회의 후반전에 몹시 힘들어 했던 고 옥한흠 목사의 유고집인 ‘문득 당신이 그리워질 때’를 보면 옥 목사의 회고 어록 중에 이런 글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낚싯대를 갖다 주어도 들고 일어설 힘조차 없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인 도움과 기도입니다. 이것이 구제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가 마땅히 떠맡아야 하는 부담이 아니라, 복의 통로입니다. 가난한 자로 인해서 교회가 교회답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복까지 누리게 됩니다.”(pp,175-176.) 가난한 자를 가난하게 그대로 방치한 교회,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잇지 못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데도 그것을 그대로 방치한 교회, 신발 깔창으로 생리대를 만들어 살 수밖에 없는 소녀들이 있는 데 그것을 그대로 방관한 교회, 장애우들이 손길을 내밀 고 있는 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교회, 고독사라는 무서움이 항상 잔존하는 홀로된 노인들을 돌보지 않는 교회가 주후 1세기 고린도지역에 세워졌던 교회 공동체에 존재했던 이기적인 그룹과 뭐가 다를 바 있겠습니까? 중세 거대한 영성가인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건강하다면 마주치는 것 마다 살아 있는 거울이 될 것이며 거룩한 잠언이 될 것이다. 겉보기에 보잘 것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피조물은 없다.”(토마스 아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브니엘 간, p,73.)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선언이 왜 그리 장엄하게 저에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아켐피스의 이 장엄한 선언은 철저한 자기 성찰의 결과로 주어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이타적 신앙의 노래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태웅이와 은비를 보면서 참 대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본 남매 중에서 저렇게 사이가 좋은 남매를 근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여느 날과 같이 사무실에서 남매가 아주 사이좋게 놀았습니다. 태웅이가 뒤에서 은비를 백 허그를 하며 안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은비가 오빠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 내가 그렇게 좋아!” 광경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오빠는 여동생에게 권위로 서려고 하지 않을까! 여동생은 오빠를 사춘기가 되면 시크하게 근처도 오지 못하게 하지는 않을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은비와 태웅이의 어릴 때의 저 모습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의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남자로서, 여자로서의 성 정체성이 생기고 오빠와 여동생이라는 상하관계가 지적 능력으로 설정되고 하는 나이가 되면 저들도 모르는 사이에 어릴 때 없었던 담이 생길 터이고 그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하면 할 말 없겠지만 지금의 오누이의 순진한 모습이 사라지게 될 것임을 알기에 왠지 씁쓸합니다. 왜 배려하지 않는가? 왜 기다려주지 않는가? 타인 중심성에서 자기중심성으로 자아의 정체성들이 갈아타기 때문입니다. 강력하게 역설합니다. 신앙은 자기중심성이라는 담을 허무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타인중심성으로 옮겨 타는 작업입니다. 듀크대학교의 조직신학부 교수인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한나의 아이’에서 자기중심성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 그래서 일찍이 이렇게 경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난제가 우리기 말하는 바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교회와 세상을 전혀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p,293.) 신앙은 이타성을 갖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타성을 갖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와 성도는 다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보루라고 세상이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교회로 이런 이 시대를 살아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