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신앙은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1:17-22
서론)
참 들을 만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사화학자 송호근 교수가 쓴 ‘나는 시민인가?’에 보면 그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사절의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하나 전해줍니다.
“나들이를 가다가 길에서 얘기에 열중하던 탓에 그만 앞차를 추돌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행이 저속 상태였지만 순간 당황했습니다. 앞차가 걱정되었습니다. 문을 얼고 내 차로 오는 노부부는 다행히 험악하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부부는 동양식으로 예의를 갖추더니 첫 말을 던졌는데 의외였습니다. ‘당신 아이가 괜찮은가?’ 왜 이 첫 마디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히지 않을까? ‘괜찮으십니까? 제 실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들의 배려 깊은 질문에 대한 내 답례였습니다. 내 중고차가 그 품격 있는 세단에 흠집을 냈는지 아직도 난 모른다. 그 노부부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p,138)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참 재수 좋은 경험을 했다고 그의 발언을 깎아 내리지 않았습니다.
진정성이 있는 경험 그대로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미국 우월주의라는 ‘AMERICANISM’으로 인해 역겨움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선진국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노부부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이라는 명칭의 대우를 받으려면 1인당 국민소득의 상위 개념만으로는 안 됩니다.
국민소득이 높은 것을 물론 거기에 걸 맞는 문화와 예절을 갖추고 있느냐에 부합해야 합니다.
중동의 산유 부국을 지칭하여 선진국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볼 때 선진국이라는 말의 함의는 아마도 수준일 것입니다.
이기적 잣대가 아닌 이타적 잣대로 나라와 국민이 움직이고 있느냐 하는 점 말입니다.
‘필란트로피’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리스어 philos(사랑) 와 anthropos(인간)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요 근래에 만들어진 신조어입니다.
붙이면 인간의 형제애적인 사랑 즉 인간 사랑을 말하는 단어로 이해되지만 이 단어는 기부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의 시대에 사용됩니다.
그래서 핀란드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 교수인 테오 슈이치 박사는 이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필란트로피란 경제적인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가족 이외에 자신이 속한 소수민족, 그룹의 구성원이나 단체를 돕는 것이다.”(테오 슈이치, ‘이타주의자의 시대’, p,46)
적어도 이런 필란트로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삶이 된 나라와 민족을 선진국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이타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단어가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다는 개념은 헬레니즘 문화의 복판이었던 고린도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들이 지금 살피고 있는 본문의 배경은 필란트로피의 정신이 피어난 고린도지역이라는 상황의 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가치와 윤리를 추구해야 하는 고린도 교회라는 배경이기에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가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기대감과는 달리 고린도교회 안에서 벌어진 오늘 본문의 내용에 대하여 지적하는 바울의 지적을 살펴보면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많이 아쉽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의 전개는 우리들이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는 주님의 성찬 제정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정리에 앞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본문은 성찬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고린도교회라는 배경을 전제해야 이해가 되는 구절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오늘날의 지역 교회처럼 한 지역에 건물을 두고 모이는 그런 로컬 처치의 성격이 아니라 도리어 셀 교회의 성격이 농후한 성가족 공동체 교회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당시 교회를 이해하는 데 성서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전 지역에 퍼져 있는 성도들의 가정에서 돌아다니며 모이던 가족 교회 형태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고린도교회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식탁공동체로 함께 교제를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 한 가지 본문 이해를 통해 전제해야 하는 이해의 폭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의 예배 시간에 대한 이해인데 우리는 선입관으로 오늘의 교회처럼 주일 오전 11시의 개념으로 집회 시간을 가늠할 가능성이 있기에 미리 정리하고자 합니다.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인 김판임 교수는 당시 고린도교회 예배 시간에 대해 이렇게 추측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는 주일 예배 후나, 매일 저녁 몇 시 몇 분이 아니라 일과 후, 혹은 해가 넘어갈 무렵이라고 여겨지는 시간에 모임의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김판임, “바울과 고린도교회”,P,196)
이유는 본문 20절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그렇다면 고린도교회에서 베풀어졌던 식탁공동체는 굳이 주일 오전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린 뒤에 나누는 점심 식탁공동체라고 제한할 수 없게 됩니다.
본문에 기록된 식탁공동체는 그 종류가 주일 일몰 이후 시간의 만찬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일 저녁 식탁공동체가 될 수도 있음도 열어둡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식탁공동체가 뭔지는 모르지만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7-20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칭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칭찬은 고사하고 한 발 더 나아가 몇 가지의 불편함을 내색합니다.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도리어 해롭기까지 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분쟁까지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본문 텍스트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한 보입니다.
식사 때문입니다.
20절을 다시 언급한다면 만찬을 먹을 수 없는 불편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질문하면서 바울이 불편하게 여겼던 내용들을 추적해 보십시다.
고린도교회에서 행하고 있었던 식탁공동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바울의 격앙된 목소리로 고린도교회의 식탁공동체를 비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단서를 이어지는 21-22절을 통해 찾아내 보겠습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이 구절을 중심으로 고린도교회의 공동체 식사 문제를 제기한 학자들이 의기투합한 4가지의 문제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① 주의 만찬에서 상이한 당파들이 위화감을 조성했다는 점입니다.
부연한다면 고린도교회 안의 신자들 중에서 부유한 자들의 식탁과 가난한 자들의 식탁을 차별하여 따로 식사 장소를 가졌다는 해석입니다.
② 상이한 식사 시간으로 인한 갈등이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을 했지만 고린도교회의 예배는 꼭 낮에만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일몰 직전에 드린 경우가 있었다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때 모여야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다양한 직업 분포도였습니다. 부자들은 예배 시간에 맞추어서 넉넉하게 여유를 갖고 예배를 드린 뒤에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자영업을 하는 자들은 경우에 따라 마감이 늦어질 수 있었고, 피고용인들은 고용인이 보내주어야 하는 불가피한 불편함이 있었고, 심지어 노예 계급에 있었던 신자들은 주인들이 허락해 주어야 하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했던 것이 고린도교회의 만찬이었습니다. 헌데 이런 각 종 상황의 다양성을 갖고 있는 신자들이 저녁 식탁공동체에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예배를 드리고 그 후에 있는 만찬에 함께 참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만찬은 모인 자들만의 잔치로 끝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먹고 살기에 급급한 민중 계층의 신자들은 만찬이 도리어 공동체의 연대를 무너뜨리는 있는 자들만의 잔치로 변질된 것에 대하여 심각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③ 이기적 그룹의 질 나쁜 행위들입니다.
식탁공동체에 늦게 온 자들은 이미 식탁공동체에 미리 참여한 자들에게 음식을 뺏겨 버렸습니다. 해서 그들은 적은 음식을 갖고 슬픈 음식을 대하게 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식사를 하지 못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나게 된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본문 21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이런 불공평함이 형제의 사랑과 다음 주에 나누겠지만 주님이 만찬을 통해 가르쳐 주셨던 섬김의 도를 완전히 깔아뭉개는 이기적 일탈로 변질되는 바람에 정말로 음식이 필요한 자들은 굶주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질 나쁜 자들을 향하여 아주 강력한 표현으로 힐난하며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본문 22절은 바울의 격앙된 노를 보게 힙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무슨 말입니까?
음식 가지고 장난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나쁜 행동을 하려는 자들은 식탁공동체에 나오지 말고 너희들의 집에 가서 너희들끼리 먹으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이기적 행위들을 통하여 가난한 형제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자들을 향하여 비수를 꽂습니다.
교회를 업신여기는 자들이라고.
그렇다면 신약학자들이 제기한 이상의 해석들을 참고하여 볼 때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바울의 가르침을 지혜로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 신앙은 곧 예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신자들 중에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식탁을 구분한 행위에 대하여 질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파를 짓게 하는 일이라고 .
이것이 바로 해로운 일이라고 말입니다.
동시에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생존의 현장에서 고된 삶을 살고 온 형제들, 때로는 굶어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예배에 나와 감동적인 하나님의 영의 양식을 먹고 이제는 교회 공동체에서 사랑으로 베푸는 밥 차에서 따뜻한 음식으로 육체의 굶주림을 채워야 할 행복을 자기들의 이기적 욕심으로 앗아 가버린 일부 이기적 신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그 알량한 배를 채우려면 너희들의 집에서 먹으라고 소리치고 있음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힘들게 교회공동체에 참여한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배려해 주지 않는 자들에 대한 과감한 질타를 본문에서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기다림은 예의이고, 참아줌은 신앙의 예의임을 직시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이런 접근에 대하여 100% 지지합니다.
신앙은 배려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다혈질 성격의 사람이라고 흉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을 만한 사람은 그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음을 성경이 시사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되는 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불완전성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많은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가야바의 뜰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후 그는 급격히 영적으로 다운되어 주님의 부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옛 모습으로 살아가는 쓰라림을 경험합니다.
이것을 알고 계셨던 주님께서 안제나 그랬듯이 갈릴리 디베랴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로 찾아가십니다.
주님이 찾아가신 그 날도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사명을 받았을 때와 똑같이 고기잡이에서는 허탕을 치고 있던 우울한 날이었습니다.
그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던 베드로는 바닷가에서 또 다시 부활의 주님을 통해 고기를 많이 잡는 카이로스를 경험하게 됩니다.
불현 듯 지금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지 않을까 하는 심증으로 가득 차 있던 순간 요한으로부터 한 외마디가 들렸습니다.
“주님이시다.”
바로 그 순간 억제할 수 없었던 은혜를 받은 베드로가 곧바로 행동한 장면을 소리를 외쳤던 요한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7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이 상황의 그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주님을 부인한 이후 급격하게도 영적으로 추락한 자아를 느끼던 베드로는 자기의 참담함 때문에 충분히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차에 부활하신 주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나는 기회를 포착했으니 그에게 임함 감격이 얼마나 컸을지 충분히 짐작합니다.
그 순간 베드로에게는 아마도 감성적인 격정이 몰려 왔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무조건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당연지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마디 외침에 갈릴리 호수로 뛰어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요한이 놓치지 않게 기술한 한 구절이 눈에 더 큰 감동으로 들어옵니다.
“겉옷을 두른 후에”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더위로 인해 상의를 벗고 있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물겨운 반가움에 호수로 뛰어내리면서도 베드로가 잊지 않고 행했던 액션은 겉옷을 챙겨 있는 예의 갖춤이었습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는 교만함에 무례를 저지를 때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누군가를 정죄하는 교만함이 충만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더 두껍게 교만의 갑각으로 덧씌우는 악함이 있습니다.
출처를 찾지 못해 각주를 달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이동원 목사가 쓴 어느 책에 이런 글을 읽었는데 가슴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항상 다윗이었지 사울이 아니었다. 나는 항상 세리였지 바리새인이 아니었다.”
신앙은 내가 항상 사울의 심정을 갖고 또 다른 다윗과 같은 자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고, 또 언제나 바리새인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인정하고 항상 또 다른 세리와 같은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동시에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예의를 지키는 것임을.
창세기 8:20절을 읽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1년 17일 만에 지긋지긋한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우선순위를 할 수 있는 일들이 정마로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정말로 인간으로 하고 싶었던 일체의 것을 미룹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께 예의를 차립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 이 땅에 존재합니다.
상대방에게 나는 예수를 믿는 자라고 소리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삶의 가장 한 복판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를 곱씹어 보면 유구무언입니다.
어느 새 나의 삶의 복판에 내가 예배를 드리는 대상은 맘몬이요, 세속적 가치요, 육체적 쾌락이요, 보이는 것들의 실체요, 손에 잡히는 것들의 현학으로 변질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렇게 사는 데도 나는 정말로 괜찮은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무감각의 포로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무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의를 지키는 것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의를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치우치는 자들이 어찌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수 있겠습니까?
결혼식장에서 주례를 인도할 때마다 수없이 전한 말씀이 신혼부부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까?
마태복음 6: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부분의 앞 절을 Living Bible 에서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You give God first place in your life." (너는 너의 삶의 가장 첫 자리에 하나님이 있게 하라)
불과 십 수 년 전에 목사에게 주례를 받은 신혼부부들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결혼 이후 첫 날을 예배로 섬기고 신혼여행지로 떠났습니다.
근래에 목사 가정의 아들, 딸, 장로 가정의 아들, 딸 이렇게 하나님께 예의를 지키는 자들 거의 전무합니다. 전설의 고향이야기기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예수 믿는 자라고 종교 란에 사인합니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일들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자행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고린도에 살고 있었던 많은 나약한 자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공급해 주는 음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젖줄이 고린도 교회에서 그런대로 신앙 생활한다는 자들의 이기성 때문에 짓밟혔습니다.
신앙은 직분의 색깔도 아니요, 신앙의 캐리어는 더 더욱 아니며, 계급과 서열은 더 더욱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노아처럼 말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요한복음 13:12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대단히 감동적인 메시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후 이제 다락방 강화를 통해 섬김의 도를 가르치실 때 주님도 행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벗었던 상의를 다시 갖추어 입으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 중에 업신여김을 받아야 하는 삼류 인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주님도 제자들을 존중하셔서 예의를 갖추셨습니다.
하물며 그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들이 무례한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더 이상의 적절한 정의는 없습니다.
미국 듀크 대학의 리처드 헤이스 교수가 ‘신약의 윤리적 비전’에서 이렇게 갈무리했음을 지난 주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언급했습니다.
“나 자신과 교회를 위해 대가를 적게 지불하려는 어떤 기준도 고안하지 말라”(p,707)
나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우리 모두가 함께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입니다.
신앙은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