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45번째 강해) 제목: 차별과 구별 본문: 고린도전서 11:2-16 서론) 20세기 미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본인의 걸작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이렇게 갈파했던 적이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밀접한 곳에서는 사랑의 길이 정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오직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충분히 효과적이다.”(p,273) 기독교 윤리학을 전공한 자이기에 이런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혹시 비평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의 길이 정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과 그 사랑은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효과를 나타낸다는 니버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합니다. 혹자가 이런 공식은 유토피아 세계에서나 가능한 철없는 발상과도 같은 궤변이라고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니버의 말을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사랑만이 정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니버의 이 갈파가 인간 공동체에서 성취되기까지는 너무나 요원한 일이 아닐까 싶어 많이 아쉽고 또 한편으로는 절망스럽습니다. 어제 인터넷 뉴스 중에 가장 핫 하게 올라온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서울 강서구의 한 지역에 장애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하나 세우기 위해 주민 토론회를 열렸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교육용 건물 부지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 서울시 교육감은 장애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를 세우겠다는 것이고 그 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지난 총선 때 그 지역에서 당선된 모 국회의원이 그 부지에 한방병원을 세워주겠다고 공약한 사안이기 때문에 장애아동들이 공부하는 학교는 절대로 세울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시민 공청회가 열린 것입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지만 실상은 한방병원을 세우겠다는 무리들의 저의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장애 시설이 동네에 들어오면 땅값 하락이 불 보듯 뻔할 것이라는 계산 때문입니다. 이 토론회 과정에서 장애우를 둔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하는 동영상이 SNS 상에 올라왔습니다. “장애를 둔 아이들이 학교는 가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욕을 하시면 듣겠습니다. 모욕을 주셔도 저희는 괜찮습니다. 지나가다가 때리셔도 맞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학교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반대하는 자들이 쇼하지 말라고 강제하는 과정에서 난장판이 된 영상이 고스란히 인터넷에 올라온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분노하며 인터넷 상에 뜨거운 이슈가 되어 반대하는 자들에게 봇물 같은 성토가 이어졌습니다. 한 네티즌이 반대하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성토하며 댓글 단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되어도 한 참 거꾸로 되었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 무릎을 꿇고 호소하자면 땅값 올리려는 장애인 건물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어야지 왜 가슴 미어지는 장애인 부모들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사회학적 용어 중에 님비주의(NIMBY)라는 말이 있습니다. 'Not In My Backyard.’라는 문장의 첫 자를 딴 줄임 용어입니다. 번역하면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는 뜻으로 지역이기주의 현상의 일종을 빗대는 용어입니다. 전술한 기사는 그릇된 님비주의로 망가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그러진 초상입니다. 지난 주간에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고 앞으로 계속해서 갈등의 골을 남길 것이 뻔한 이 사건을 보면서 제가 제일 먼저 생각해 낸 단어는 ‘차별’ 이라는 단어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두 단어를 이분법적으로 갈라놓는 자체가 이미 차별은 시작된 것입니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가징 악성 종양과도 같은 단어인 차별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최고의 질 나쁜 행위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시민 불복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p,21) 소로우가 말한 이 문장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먼저 내세워야 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인권(의무)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차별’이라는 기막힌 범죄행위를 행하는 자들의 공통분모는 내가 너보다 훨씬 낳은 존재라는 되먹지 못한 교만성과 야만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다.” 옛 선조들이 격언처럼 나누었던 이 말은 되씹어 보더라도 너무나 기막힌 정답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차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천박한 야만성과 무례함입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라는 무거운 짐을 선택하시고 피를 흘려 돌아가신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들이 내가 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차별을 앞서 실천하는 자가 된다면 그는 세상의 차별주의자보다 가중 처벌 대상자가 되는 중 범죄자가 아니겠습니까? 군대의 계급을 이용하여 공관병을 사적으로 노예 부리듯 차별 대우를 했던 것이 충격을 던졌습니다. 문제는 그가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자라는 점입니다. 영적 가중 처벌대상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차별이라는 단어는 신앙인들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 악과 같은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본받을 만한 신앙의 선배라고 하는 바울이 남긴 그의 서신서에서 혹시 남녀차별을 바울이? 라고 질문해 볼 법한 의구심이 들게 하는 텍스트입니다. 해서 본문 이해는 흥미진지 합니다. 본문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내용 중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치열한 논쟁거리는 3-9절입니다.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상에 기록된 바울의 선언을 들여다보면 바울은 아주 보수적인 남성우월주의자라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의 발언들 때문입니다. 그는 주저 없이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기도를 하거나 예언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무언가를 반드시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할 것을 압박했고 더불어 머리에 무언가를 쓰지 않으려면 차라리 머리를 미는 것이 낫다고 강제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인데 비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는 여자를 깔보는 듯한 인상의 발언도 서슴없이 선포하였습니다. 이상의 발언도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말인데 결정타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이며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라는 발언은 저 같은 남성은 물론 여성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한 극언으로 들릴 정도입니다. 소위 말해 요즈음 많이 회자되는 여성 혐오주의자가 바로 바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의 발언들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더 더군다나 이 발언은 바울이 이미 말한 선언에 비해 자기모순적인 발언이고, 자가당착의 패착을 던진 발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3:27-28절을 소개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에게 편지하는 글에서 천명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해 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남자나 여자나 개의치 않고 하나라고 했던 자가 바울입니다. 하나라는 말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이렇게 말한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는 갑자기 여성 폄훼주의자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을까요? 변질된 것일까요? 이제 이렇게 바울에 대하여 매우 실망스럽게 여겨지는 본문을 해석한 학자들의 내용들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지성적, 학문적인 접근을 전제로 풀어 나아가 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교우들에게 소개할 학자의 해석은 미국 에즈베리 신학교 신약학 교수인 크렉 S, 키너 박사의 고린도전서 11:3-9절의 해석입니다. 제가 크렉 키너 박사의 변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남성우월주의적인 바울의 선언을 나름 균형 잡힌 지적 이론을 전개하며 항변한 해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9절에서 제일 논쟁거리가 되었던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기도나 예언을 하는 등의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는 머리에 무언가를 쓰라는 명령입니다. 키너 교수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 관점에서 이 바울의 말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① 주후 1세기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 중에 여성의 은둔이라는 배경을 근거했다는 해석입니다. 그 근거로 이집트의 유명한 역사 사상가인 필로의 글을 인용합니다. “여성에게 가장 좋은 것은 집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가사 일과 관련 없는 일을 피하는 것이며, 격리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크렉 S, 키너, “바울과 여성”,p,52) 이런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었던 것은 고린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지역의 여성들이 외출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또 그것이 매우 부적절한 행위로 보았기에 외부에 나가서 기도나 예언과도 같은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도록 베일을 쓰고 하라는 압박이었다는 것이 첫 번째 해석입니다. ② 고린도 지역에서 여성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창녀들과 이교의 신을 섬기는 여 사제들이 하는 행위였기에 그들과 같은 그룹으로 보이지 않도록 강제했다는 해석입니다. 여성 신학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교수는 그녀의 책에서 고린도교회의 여성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고대 이교였던 이시스 제의와 연결하여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시스를 섬기던 여 사제들은 보통 이마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모발이 흩어지게 하는 긴 머리를 가졌다는 것을 고고학적 기반을 근거로 제시하였는데 키렉 교수도 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창녀들의 머리 모양이었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창녀들 역시 머리를 풀어 헤쳐 남성들을 유혹하였는데 이런 일이 하나의 사회적인 틀이 되어버렸기에 일반 여성들은 머리를 가리는 것이 통례가 된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였기에 혹시 창녀들이 일반 여성들이 쓰는 베일(머리에 쓰는 것)을 하고 다닐 경우에 채찍을 50번 맞고 송진가루가 그녀들의 머리에 부어졌다고 보고합니다. ③ 같은 맥락에서 주후 1세기 여성들의 머리는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였기에 이것을 근원적으로 막는 행위로 바울이 본문을 기록했다는 이해입니다. 키너 교수가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주후 1세기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여성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거의 발악하는 것으로 보고 이런 일을 행하는 여자는 결혼 계약서에 명시된 위자료도 받지 못하고 강제 이혼을 당하게 되고, 더 심하게는 간통한 여자들에게는 반드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니도록 함으로서 말 그대로 그것이 나다나엘 호돈의 주홍글씨와 같은 치욕의 상징이 되게 했다는 보고입니다. 이런 근거와 이유로 인해 바울은 어쩔 수없이 교회질서와 여성들로 인한 공동체의 와해를 방지하기 위해 본문의 룰(rule)을 정하였고 이런 룰이 남성우월적인 표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것이 키너 박사의 지론입니다. 키너 박사의 3-9절까지의 해석을 주후 1세기의 사회적, 지리적, 문화적 상황으로 접근할 때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정보와 설득력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어지는 10-16절까지의 본문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그 중에서도 10절 해석은 난제 중의 난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톰 라이트는 10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머리에 권위를 지녀야 합니다.” 왜 천사들 때문에 여자들이 머리에 무언가를 써서 권위를 지녀야 한다고 바울은 경고했을까요? 이 난해 구절의 해석은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인 김판임 교수의 해석에 제가 동의했기에 그녀의 지론을 소개합니다. 본문 10절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를 김 교수는 호색꾼 천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호색꾼 천사란 창세기 6:1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들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6:1-3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들을 해석하는 가장 전통적인 해석이 천사로의 해석입니다. 김 교수는 이 해석을 지지하면서 호색꾼으로의 천사들에게 성적인 타켓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예배 공동체에 나와 예배하는 머리를 풀어헤친 여성들이라고 본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그의 고린도주석에서 이에 걸 맞는 하나의 자료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해사본이라는 것인데 사해 사본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며 예배할 때 천사들이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 설파하고 있음을 제시한 것입니다. 김판임 교수는 이 천사들 중에 호색꾼으로서의 천사들이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여성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 고린도라는 음란의 도시에서 정욕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표적물이 될 것을 경계하고 머리에 베일을 쓰라고 권한 것입니다. 이 해석을 전제하면서 이어지는 본문 11-12절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반전입니다. 10절까지는 여성들에 대하여 경계하라는 것이 주 메시지의 내용이었습니다. 헌데 11-12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여자가 남자와 따로 있지 않음을 역설했고, 이번에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태어남을 강조함으로 여성에 대한 위대성을 부각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오락가락합니까? 김판임 교수는 우유부단한 바울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김판임, “바울과 고린도 교회”, p,183) Ⓐ 당시 사회 전반에 흐르는 가부장적인 가치관 즉 여자 위에 남자가 있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 구약성서의 창조적인 질서에 근거하여 남자를 위해 여자가 만들어졌다고 말해 보았지만 여자들이 머리에 베일을 덮는 것에 실패했다. Ⓒ 당시의 헤어스타일은 자연적인 본성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여성들이 머리를 덮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그것마저도 설득력이 없었다. 해서 바울은 16절을 씀으로 아주 어정쩡하게 본문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16절을 톰 라이트의 번역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대해 논쟁하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 (톰 라이트. “고린도전서 주석”,p,185) 왜 바울이 이 논쟁에 대하여 서둘러 마무리하려고 했을까요? 아마도 고린도교회의의 영적 정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정서 말입니까? 고린도교회의 여성 신자들이 바울의 권고에 대한 권위보다 본인들이 여성의 미를 나름 자랑하고 싶었던 세속의 가치를 포기하기를 주저했거나 아니면 거부했던 분위기가 더욱 팽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상의 본문 이해를 통해 치열했던 여성들의 예배 모습에 대한 담론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추출할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 교회 공동체에서 차별은 없어야 하지만 영적 구별함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재론하지만 바울 사도는 본문의 전반부에서 고린도교회의 여성들이 갖추어야 하는 모양새에 대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단호하게 지적하였음을 보았습니다. 세속적인 여성의 옷차림과 모양으로 예배에 나오지 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마치 고린도에 있는 창녀들처럼, 혹은 이시스 여 사제들처럼, 혹은 자신의 머릿결을 뽐냄으로 예배하는 남성들을 유혹하고 심지어는 예배를 돕는 호색적인 부정적 천사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근신하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이런 지적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유하다는 방종의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이런 기상도를 알아차린 바울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여자들을 차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최소한의 성도로서의 구별됨을 지켜야한다는 교훈으로 결론 맺고 더 이상의 논쟁을 허락하지 않은 채로 본문을 마감한 것입니다. 차별이 아닌 최소한의 구별성을 갖고 예배하라는 바울의 지침이 왠지 아파보입니다. 우리들이 섬기는 공동체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목회 세습은 결코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를 선정할 때 담임목사의 아들이 아닌 자들을 차별하는 것이 세습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목사 안수, 여성 장로 장립을 법으로 막고 있는 교단은 이미 차별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상도 교회에서 전라도 출신의 신자를 왕따시키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일어나면 그것은 심각한 차별입니다. 흑인 교회와 백인 교회를 나누어져 있는 미국교회는 이미 차별이라는 죄를 짓고 있는 교회들입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들을 나누고 있는 교회, 문 닫아야 하는 차별 만능주의의 교회입니다.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을 차별하는 교회,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차별이 어찌 이것들뿐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의 차별, 그리고 교회 밖에서 자행되는 일체의 차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우고 척결해 나아가야 하는 하나님의 정의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별은 존재해야 합니다. 예배자가 옷과 모양새를 단정히 하고 나오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입니다. 어느 교회에 이런 표어가 결렸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토요일에는 술 먹지 말자.” 술 먹음으로 방탕한 상태에서 주일을 맞이하는 것은 부끄럽다는 것을 인지하게 해주는 현대 교회의 고육지책입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자가 최소한의 영적 자기 정비를 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입니다. 설교를 듣기 위한 것과 전하기 위한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리고 다하라고 명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입니다. 구별함은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구별함은 교회공동체의 질서입니다. 작년에 엔도 슈사쿠의 전문가인 김승철 교수를 초청해서 신앙 강좌를 가졌습니다. 그 분은 감리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경력이 있지만 사직하고 일본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분입니다. 강의를 계획하는 어간, 주최 측이었던 도서출판 동연의 대표 이사 장로님과 프로그램 상의를 했습니다. 제가 계획한 큐시트를 알려드렸습니다. 1부: 예배, 2부: 강좌 순이었습니다. 예배 설교는 제가 하고 강좌는 김 교수가 하는 순서였습니다. 주최 측에서 예스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강사가 목사 안수를 받은 경력이 있는 분인데 그 분의 강좌를 설교로 대치해도 되지 않겠는가? 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예배는 예배이고 강의는 강의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설교는 목사가 하는 것이 구별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별됨은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6일의 창조사역을 가장 질서 있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의 피로 세우신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김동호 목사의 오랜 글에 기록된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 분의 신학이 저와는 많은 상이점이 있지만 그가 말한 이런 통찰에 대하여는 지지합니다. “외과수술은 외과전문의 장로가, 강단 설교는 설교 전문가인 목사가” 이것이 무너지면 병자가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병자도 사망합니다. 그래서 차별은 근절해야 하지만 구별은 교회가 사수해야 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가톨릭 수사로 뛰어난 영성을 근거로 우리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감동을 ‘칠층산’의 작가인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허용하는 한, 일체의 피조물에 대하여 초연할 필요가 있다. 곧 우리는 무턱대고 병고보다는 건강을, 빈곤보다는 부귀를, 치욕보다는 영예를, 단명보다는 장수를 원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더 효과적으로 인도하는 것만을 선택하고 원해야 한다.”(p,554) 머튼의 고백을 들으면서 어떤 감동이 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속적인 세류들이 원하는 대략적인 삶에 순응하지 않고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그것이 나름 불편하고 평상적이지 않은 길이라도 그 길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기꺼이 선택하겠다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는 구별성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이런 영적 권위가 돋보이는 구별됨을 추구하며 살기를 기대합니다. 누구나 다 가는 길과 정체성에는 구별됨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3-14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 하나님의 공의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예수 하나님의 공의 주 독생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예수 제물이 되신주 영광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예수 하나님의 사랑 주 은혜와 말씀으로 나타났네 예수 거룩한 하나님 영광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나라 영원하며 그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네 예수 하나님의 공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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