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목요일 묵상 노트: 말씀을 믿는 체 하는 기술 성서일과 시편 82편, 시편 80:1-2, 8-19, 여호수아 7:1, 10-26, 이사야 2:5-11, 히브리서 10:26-31 꽃물 (말씀 새기기) 히브리서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마중물 (말씀 묵상) 지금 내가 섬기는 세인교회는 주일 예배 시간에 히브리서를 강해하고 있다. 피하고 또 피하고 싶었지만 벌써 근 1년이 다 되어간다. 신학교 시절, 신약학 선생님께서 신약개론을 강의하시면서 했던 말을 오롯이 기억한다. 히브리서를 가지고 섣불리 설교하지 말라. 어리고 어렸던 신학생 시절, 더불어 신학에 대해 일천했던 그 시절, 선생님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육십이 넘어 도전한 히브리서로 인해 40년 전에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의 권위가 다시 느껴진다. 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강력한 설교문을 수신자인 배교 직전의 디아스포라 유대적 크리스천들에게 남겼을까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심판, 지옥, 멸망 등등의 언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혐오스러운 발언인지를 펜데믹을 경험하고 있는 목사는 뼈저리게 느끼고 경험한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0:26-27절을 텍스트로 설교할 때, 나 또한 적지 않게 부담스러웠고 거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는 말씀처럼 느껴지는 히브리서 10:26-27, 특히 주님보다 캘빈을 더 주님처럼 모시고 있는 절대예정론자들에게는 대단히 시니컬한 비판적 대상인 히브리서 10:26-27절을 오늘 묵상에서 또 만나니 여러 생각이 스친다. 나는 언제나 긴장한다. 목사이기에 그냥 스리슬쩍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긴장하고 영의 옷깃을 여민다. 적어도 내게 히브리서 10:26-27절은 영혼의 비수다. 부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 말씀에 긴장하며 살련다. 누가 뭐라고 하든. 대제사장 가야바의 독설을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한 엔도 슈사쿠의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오금이 저렸다. 나도 공범자 같아서.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체하는 기술을 나는 알고 있다네.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성전의 모든 제사를 경건하게 거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 이것은 사회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거든. 그런 지혜를 나는 나이와 함께 배웠다네.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삶의 방식이 그대의 것보다 현명하다고 본다네. 민족이나 나라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유리하지. 인간이 남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주거지와 함께 모여 결속을 다지는 장소는 만들어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세상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라네.”(엔도 슈사쿠, “사해부근에서”, 바오로딸, 이석봉역, 2015, 172) 두레박 (질문) 목회자이기에 말씀을 유리하게 적용하는 방법은 안다. 아주 교묘하게. 그래서 날마다 부침하며 질문한다. 하나님, 이게 내 뜻입니까? 아버지의 뜻입니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주님, 말씀을 포장하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을 변질시키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을 결코 내게 유리하게 해석하지 말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나를 비롯한 교우들이 곧잘 유혹 받는 말씀 유리하게 적용하기와 오늘도 치열하게 싸워야겠다.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제천의 하늘이 뚫린 것 같습니다. 벌써 4일째입니다. 모든 이에게 파란 하늘이 보이게 하옵소서. 마음도 우울해 집니다. 주님, 파란 하늘이 감사의 조건인지에 대해 무뎠습니다. 용서하시고, 다시 아름다운 하늘을 보여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