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한 지 한 달이 넘어섰습니다. 마음으로는 내일이라도 원래 사고를 당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설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로 이상한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통증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교통사고를 당해 고통을 이미 경험한 지체들을 심방하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아픈 데가 돌아다닌다는 표현이었는데 그 일을 내가 경험할 줄을 정말로 몰랐습니다. 하루마다 아픈 곳이 달라지는 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한방치료를 받으면서 한의사가 지침을 준 것은 교통사고 후유증은 어혈 문제라는 처방이었습니다. 해서 침 치료는 물론이고 생전 처음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부항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부항 치료를 받아보셨나요?
개인적으로 부항 치료를 받으면서 제일 예민하게 고통스러운 점은 부항 뜸을 받기 전 통증 부위에 맞는 다발성 침 치료입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기계로 여겨지는 기구를 가지고 통증 부위에 다발적으로, 연속적으로 약 50회 정도 침을 쏘는 그 순간은 정말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순간입니다. 침으로 어혈을 빼는 작업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지만 악몽과도 같은 순간입니다. 침 치료로 인해 만신창이 된 그 부분에 부항기를 갖다가 대니 그 피부 부위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상상이 되실 겁니다. 한의사의 의견으로 치료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한방치료와 더불어 목욕 요법을 병행하라고 해서 그 몸을 이끌고 목욕탕에 들어가면 마치 조직에 몸담은 사람처럼 등 뒤에는 부항 자국으로 흥건해 있는 자태(?)를 어쩔 수 없이 만인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꼴이 됩니다. 제가 제 몸을 뒤 볼아 보더라도 별로 보기가 싫은 데 타인이야 오죽할까 생각하면 목욕도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상태를 본 한의사가 조금 장기간의 치료를 요한다는 진단까지 내려놨으니 하늘이 노란 심정이 진짜 속마음입니다.
지난 주, 치료 차 간 목욕탕에서 움츠리며 한심하게 앉아 있는데 갑자기 갈라디아서 6장에 기록된 바울의 외침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강단에서 참 많이 인용하며 교우들과 함께 나누었던 은혜로운 말씀인데 그날따라 이 말씀에 부끄러워졌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 목회적 노정을 뒤돌아보면서 단 마디로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 침투해 있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내 몸에 있는 자국은 오로지 ‘예수의 흔적’(스티그마) 뿐이라고 절규했는데 부항 자국으로 인해 움츠려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작아 보이든지 하나님께 송구스럽기 그지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훗날 하나님께 목사로서 평생을 살았던 삶을 보고할 때 나는 무슨 스티그마를 보여드릴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을 해보았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게 힘이 든 부항 치료와 그로 인하여 흉하게 보이는 부항 자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인데 없어질 것 때문에 자조 섞인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부끄러운 흔적이 되지 않을까? 의 깨달음을 통해 한 주간 예수의 흔적에 대하여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사모하는 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항 자국과 예수의 스티그마, 내가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나에게 남겨질 흔적이기에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기 위해 신앙의 옷깃을 다시 한 번 여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