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목사님컬럼]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계십니까?2024-04-02 10:42
작성자 Level 10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계십니까?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80년은 정말로 살벌한 때였습니다말 한 마디를 잘못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그런 시대였으니 말입니다헌법에 분명히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며 그래서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허울이었고 이념과 사상이라는 것이 말살된 시대였기에 심지어는 노래도책도 마음대로 읽지 못하던 말 그대로 조지 오웰의 망령이 미리 성취된 철저한 통제의 시기였습니다그래도 그런 때에 틈새는 아주 허술한 곳에서 시작된다고 길거리에 내다버린 책들을 아주 헐값으로 파는 노점패들에게 눈에 띠는 책이 한 권 보여 숨죽이며 몰래 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 E H. CARR가 쓴 당시 이 책은 불온서적이었기에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없었던 것이 도리어 조금은 더 집중해서 정독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그래서 그의 가르침 중에 저의 호흡을 거칠게 해 주었던 명구들을 수두룩하게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그 중에 20대를 막 시작하는 절망의 때에 저를 용솟음치게 했던 한 구절해서 저의 공부하는 책상에 써놓았던 명언이 바로 이것입니다.

“The 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역사란 역사가와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사실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지속적인 대화이다.”

이 글을 읽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희망이 절망의 시기인 당시의 여러 상황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대화이기에 바르게 눈을 뜨고바르게 공부하고바르게 나에게 주어진 삶과 대화하자는 도전이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갔던 교통사고의 충격치료 과정에서 나타난 또 다른 장기(臟器)들의 위험 신호들로 인해 행해야만했던 조직 검사들그리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 중의 목사로서 그 동안 교우들에게 선포했던 메시지대로의 삶을 견고하게 지켜 나아가려 했던 물음과 대답 사이에서 긴장감 있게 흘렀던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끝나지 않는 대화(unending dialogue)였기에 분명 이강덕이라는 인간의 생생한 역사를 지난 주간 체휼했습니다2주차 치료 과정 중에 교우들은 담임목사를 위하여 인내하며 중보해 주고 있는 지체들 역시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오십 중반을 바라보는 막내 동생의 병실에 찾아와 얼굴을 부비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한 번 동생에게 두 번째 생명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육십을 넘어선 누이의 그 볼비빔도 저에게는 살아있다는 역사였습니다조직 검사의 결과를 차마 가까이 볼 수 없어 외래 환자석 건너편에서 손을 비비며 백지 같은 얼굴로 기도하는 아내를 슬쩍 보는데 떨고 있는 그녀에게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보며 아직도 끊나버리지 않은 나의 또 다른 사랑이라는 역사의 실타래를 눈물겹게 보았습니다.

오늘도 우리 시대에 엄습한 가장 큰 절망은 interaction(상호반응과 dialogue(대화)의 상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언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호흡을 이 땅에서 멎게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호흡이 있는 동안 두 번째로 역사의 현장 한 복판에 서게 하신 하나님께 그래서 이렇게 기도해 봅니다.

하나님당신이 말하시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겠습니다그리고 그 반응을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정직하게 소통하겠습니다두 번째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병상에 있는 사람에게 문병 차 온 후배 목사가 주고 간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컨디션을 좋을 때 들추었는데 이 글이 자꾸만 기억에 선명해지는 것은 은혜이겠지요?

그리스인에게 가장 혹독한 징벌은 자신의 에토스즉 자기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공동체로부터 절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