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은 외로움과 ‘홀로움’을 구별한다. 그는 ‘홀로움’을 ‘환해진 외로움’이라고 묘사한다. 스스로 선택한 혼자 있음은 사무치는 외로움이 아니라 혼자서도 충만한 ‘홀로움’이다. ‘홀로움’은 말하자면 ‘자발적 외로움’이다. 자발적이고 철저한 자기 시간 확보가 창의성과 생산성을 담보한다.” (최재천, 『숙론』, 김영사, 2024, 75쪽) 올해 58번째로 섭렵한 도서 『숙론』를 읽다가 황동규 시인의 시어를 인용한 최재천 교수의 특별 보너스를 받았다. 공교롭게 올 초에 8번째 필독 도서로 만났던 황동규의 시집에서 만난 이 해학적 읊조림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밑줄을 그었던 기억이 있다. “목수들이 파업만 했더라도/예수를 십자가에 달지 못했을 텐데.”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문학과 지성사, 2022, 18쪽) 책과 가까이하면 같은 지성의 소리와 연대하며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덤으로 얻는다. 기실, 시대의 지성이라는 명성을 듣고 있는 최재천 교수가 2024년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 지평 안에서 사랑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적 영역에 주저함 없이 전해주고 싶은 ‘숙론(熟論)’의 당위가 궁금해 이 책을 들었다. 결과, 원래의 목적도 달성했지만 예기치 않은 부수적인 보너스까지 받게 되는 행운을 독서 과정에서 얻었다. 금요일, 설교 준비에 앞서 본서를 열독하다가 최 교수가 절절하게 역설한 ‘숙론’이라는 테제는 단지 세속적 지성의 필드에서 갖추어야 할 시급한 과제가 아니라, 도리어 내가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에도 너무 시급한 일임을 재조명할 수 있었기에 의미 있는 책 읽기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교회는 어떤 장소이어야 할까?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말이 떠오른다. “사랑하기가 머리에서 심장으로 내려오는 데 50년이 걸렸습니다.” 앎과 실행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間隙)은 이론으로 설명이 불가할 정도로 난해하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우리 세인교회의 신앙적 행동 강령 세 번째 준칙인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연결하기’는 어떤 면으로 생각하다 보면 거의 붕괴가 불가능해 보이는 거대한 바벨과도 같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가 토설하듯 남긴 여운 한마디에 희망을 걸어본다. 이청득심(以廳得心) “타인의 말을 진정성을 갖고 경청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최고의 지혜다.” (위의 책, 200쪽)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가 언제나 당리당략이나 이데올로기 주도권 잡기라는 궁색하고 치졸한 목적을 위해 논쟁으로 변질시키는 수준 이하의 정치 역학 구도가 오늘 내가 사는 이 땅이 처해 있는 참담한 현실이다. 난장이 되어 버린 이 땅을 치유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서가게 하기 위하여 교회가 앞서 숙론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보루가 되어야 한다. 교회부터 아이디어는 공격하되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 성숙한 숙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깊은 대화와 경청의 자세를 교회가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이 땅의 여타 영역들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듣자니, 최 교수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지방에 있는 모 나사렛 교회에 출석한다는 정보를 갖고 있는데 20세기 저명했던 처음에 무신론자였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교수가 후에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화(化)했던 것처럼 그가 가정의 평화가 아닌 하나님이 사랑하는 진실한 ‘크리스티아노스’로 서 주기를 화살기도 해 본다. 행복한 글 여행을 하게 해 준 최재천 교수의 귀한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우리 교우들에게도 ‘숙론’에 도전해 보라고 강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