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외부적으로 섬기는 기관이 있다. DPA(Disciple Pastoral Academy)다. 6월 말, 실시할 강의안을 준비하다가 서론에 쓴 글을 함께 나누고 싶어 공유해 본다.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교회는 중세 가톨릭과 다르지 않다. 필자는 본서를 집필하면서 사사 후기 시대 무대 주인공 삼손에 대해 계속 불온하게 비평하며 질문했다. 동시에 사사 이후 시대의 정체성도 줄곧 질문했다. 그 질문의 결과물이 본서다. 이 책을 덮으면서 필자는 후회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했기에 말이다.”(이강덕,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에필로그에서』, 동연, 2024년 7월 출간 예정) 필자의 다섯 번째 졸저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Ⅱ』 에필로그에 담은 글이다. 한국교회에 밀어닥친 비극을 단말마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피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질문하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3주 전에 섬기는 교회에 등록한 지체와 첫 인터뷰 하는데 형제가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6개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방문한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피리어드(.)는 말했지만, 퀘스천마크(?)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한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와 뜻이 맞지 않으면 뜻이 맞는 다른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질문하는 교인, 까탈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런 교인을 몰라라 하면 그 영혼은 갈 교회가 없어진다. 나 또한 질문하는 신자가 불편한 게 사실이다. 그냥 단순하게 잘 순종해 주고 따라 와 주는 순한 양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은 목사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교단은 다르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연배의 선배가 있다. 그가 3년 전에 페이스북에 올린 단문 묵상을 엮어 책을 출간했다. 그 책 안에 담겨 있는 한 문장이 나를 전율하게 했다. “길잃은 양일수록 상처는 많아서 끌지 말고 업고 와야 하는 것은”(한희철, 『하루, 한 생각』, 꽃자리, 2021, 464쪽)
질문하는 양은 상처가 많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기에 그 양을 끌지 말고 보듬어 업는 일은 힘들어도 들어주는 것이고, 질문에 답해주는 일이다. 여기서 경청하고 업어 주어야 할 위치에 있는 목회자는 곤혹스럽다. 그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완벽한 답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난 세월 목회 현장에서 부대끼며 몸부림친 결과, 필자가 이렇게 하는 것이 상처 입은 양을 업고 목양하는 한 방법이겠구나 생각한 전 단계가 있다.
치열한 독서하기로 내공을 쌓는 것이다. 그렇다. 듣는 것, 업는 것의 내공 쌓기는 책 읽기다. 생뚱맞은 궤변이라 여기지 말고 같이 성찰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