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금계국이 만발한 하소천(川)을 걸었다. 마침 자외선 지수도 그리 높지 않고, 이른 아침이라 공기마저 상쾌해 좋은 환경에서 고즈넉한 워킹 시간을 가졌다. 하소천(川)을 중심으로 좌우에 흐드러지게 핀 금계국은 장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볼거리를 제공했다. 요 며칠, 하나님이 주신 보너스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가을하늘을 연상할 정도로 공활(空豁)한 청명한 하늘 때문에 행복 충만이었는데, 이제는 하늘이 아닌, 땅에 핀 금계국으로 인해 더블 보너스를 받는 감사가 제게 넘쳐났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 중 하나가 꽃이 예뻐 보이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실로 꽃이 가장 예뻐 보이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꽃길을 걷는데 두루미인지 백로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하얀 새 한 마리가 능숙한 모습으로 내려앉아 내천 중심으로 흘러오는 물고기를 사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민물고기에게는 재앙이지만, 나에겐 그 모습마저도 생태계가 움직이는 경이롭고 자연스러운 광경으로 들어왔으니, 아마도 금계국의 풍경들이 나를 그런 로맨티스트로 잠시 바꾸어 준 탓이리라. 바로 이 지점에서 불편한 진실 하나를 다루어야겠다. 혹자들이 말하는 금계국의 호불호 論이다. 금계국은 우리나라 토종의 식물이 아니라, 외래종인 데다 그 번식력이 어마어마해서 한 번 토양에 자리를 잡으면 다른 토종 식물들이 전멸한다는 주장이다. 주목해야 할 내용인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서 토종 식물 보호 차원에서 외래종은 씨를 날려야 한다는 극단적 경계론에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만에 하나, 우리나라 國花인 무궁화가 외래종이기에 여타 다른 나라에서 무궁화가 필 때, 일체 무궁화를 제거해 버린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분 좋을 리 없는 것처럼, 벚꽃의 원 자생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진행형이기는 하지만, 통상적 이해대로 일본의 國花를 대한민국 땅에 심는다는 것이 가당한 일이냐는 식으로 공격하면 대화 자체가 불가하다. 철저히 개인적인 사견인 것을 전제하면서 피력하자면 금계국에 대한 논란도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6, 7월에 피었다가 지는 한시적인 꽃 금계국에 대한 의미도 이데올로기적인 잣대로 해석하려는 시도에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무뢰한이라 말할 처지가 못 되지만, 자연 생태계의 조화를 이룰 방법이 있다면 토종 식물과 외래종 식물의 상생을 도모하는 일련의 노력에 나는 지지를 표하고 동의하고 싶다. 아주 오래전, 『팔티엘의 비망록』에서 이 글을 읽었다. “나는 그들에게서(공산주의자들) 볼세비즘, 멘세비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란 세 단어를 배웠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주의(_ism)’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 그건 혼인할 준비를 하는 변덕스러운 여자 같은 거란다. 앞의 단어에 따라가는 거야” (엘리 위젤, 『팔티엘의 비망록』, 주우, 63쪽) 꽃의 아름다움이 이즘(ism)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제천에 하소 川이 있음은 축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