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6일 동안 저녁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요한복음 18〜19장에 담겨 있는 주께서 감당하셔야 했던 고난의 여정을 추적하며 그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동시에 예수를 죽여야 했던 이들과 그분이 죄없이 돌아가셔야 했던 나상(裸像)들을 보며 가슴을 치고 아파했던 반대편에 있던 이들의 가슴앓이도 복기해 보았습니다. 은혜로 한 주간을 달려준 교우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젊은 날, 집회를 인도하면 불도저 같은 동력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새벽, 오전, 저녁 등 하루에 세 번씩 모이는 강행군을 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학년 4반에 들어서면서 그 옛날의 일들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집회를 인도하던 그때처럼 사역을 감당할 체력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교우들 역시 그런 집회를 가히 상상하거나 결코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목사와 교우 쌍방이 암묵적으로 모종에 뜻을 모으는 함수관계가 맞아떨어져 하루에 한 번만 모이는 사역을 동의해 주었기에 일련의 사역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시대가 그러니까’, ‘시대가 그걸 원하니까’라고 자위하지만 아쉬운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열정과 사모함이 식어졌다는 아쉬움입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또 되돌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현장에 맞는 사역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동의합니다. 많이 모이고 적게 모이고의 차원이 아니라 모일 때마다, 적게 모여도 주군이 기뻐하시는 수준 높은 사역의 질을 만들어 가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2024년, 교회 집회의 내용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거리적인 관계로 집회에 대면하여 참석할 수 없어 매우 아쉬웠지만, 매일 열린 집회를 실시간 영상으로 드리면서 적지 않은 감동과 은혜의 자리에 앉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펜데믹이 끝난 2024년에도 우리 교회에서 이런 감동의 사역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음에 너무 감사했습니다.” 고난주간 집회를 마감하면서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지체가 보내준 피드백을 받고 집회를 인도한 목사는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고난주간 집회를 통해 저녁 시간을 드리며 주님이 남겨주신 남은 고난에 동참해 준 세인 지체들에게 박수를, 실시간 영상으로 집회에 참석하며 은혜를 공유한 교우들에게, 집회 내내 인도자를 위해 중보 하며 기도해 준 지체들에게,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은 아니지만, 매 집회에 참석하며 받은 은혜에 감사를 전해 준 여타 다른 교회 교우들에게도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고난주간에 나누었던 감동의 은혜들이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 행함으로 표현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왜? 우리 교회의 실천적 행동 강령 세 번째가 크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연결하는 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