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체를 심방하면서 나희덕 시인이 읊조렸다. “오늘의 경작은 깊이 떠 놓은 한 삽의 흙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농부의 땀이 아름답다고 피상적으로 칭송하지만, 그 진가를 농사를 져 보지 않은 내가 어찌 알겠나 싶었는데 나희덕 시인의 시어 한 마디가 나를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목회가 뭐지? 교우들의 현장으로 한 길 깊이 들어서보는 거다. 신학교 교실에서는 배우지 못한 학습이다. 저들이 처해 있는 삶의 진창(泥濘) 속으로 들어가 같이 아파하고, 같이 웃고 우는 게 목회다. 아주 오래 전,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제자들을 위해 전 인생을 바친 친구가 제도적인 학교 구조 안에서 비상식적인 일들을 당하며 힘들어 했을 때 내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이 목사, 나도 교수 그만두고 목회 하고 싶다.” 이야기를 듣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기억이 있다. “친구야, 친구가 어울리는 사역의 진창은 신학교다.” 가만히 보면 삶의 현장은 말 그대로 진창(泥濘)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진창을 말하는 것이기 아니라, 치열한 현장의 묘사로서의 진창을 말하는 거다. 왜 아니 그럴까 싶다. 오늘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순교이고, 삶은 순교 현장이다. 교우들이 처해 있는 삶의 현장은 수많은 세속적 가치와 싸워야 하는 진창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진창의 현장에서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그리스도인들이다. 해서 안쓰럽다. 1년에 한 번 드리는 사업체 심방을 지난 주간과 이번 주간에 실시했고, 또 진행할 예정이다. 진창의 복판에 있는 교우들의 사업체는 이런 차원에서 조망해 볼 때 단어가 조금 과격할지는 모르겠지만 사탄의 견고한 진을 훼파해야 할 영적 교두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업체 심방에서 진행하는 담임목사의 예배 인도는 나름 비장하다. 지난 주간, 심사숙고 해서 교두보인 사업체에서 말씀을 선별해 전했고, 중보 및 강복 기도도 나름 의미의 의미를 더해 주군께 드렸다. 교우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힘들지 않도록, 돕는 자의 손길이 많도록, 선포의 내용이 열매 맺도록, 예기치 않은 좋은 상황들이 만들어지도록 간구했다. 시인의 언어를 다시 빌린다면 진창에 들어가 한 삽의 흙을 떠서 경작했다. 모름지기 종이 삽을 떠서 경작한 그 밭들에서 2024년에 삼십 배도 아니고, 육십 배도 아닌, 백 배의 열매들이 맺어지기를 기대한다. 책에서 한 컬럼니스트가 말한 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이다.” 사업체 심방을 통해 진창 안에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교우들을 어루만진 지난 주에 목사로 살아가는 영적 보람의 시간을 진하게 체휼하는 행복한 주간을 보냈다. 2024년 세인 교회 지체들의 사업체에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지속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