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빛 바랜 논문2024-04-19 11:32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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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논문

 

서고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빛 바랜 논문을 발견했다밀양에 소재한 깡 농촌에서 단독목회를 시작한 때모교 대학원에서 남은 두 학기 코스워크를 마치고 쓴 첫 번째 석사 논문이었다교회에서 마을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가다시 읍내에서 밀양 기차역까지 시내버스로 이동하여 밀양에서 영등포까지 무려 5시간 반에 걸쳐 이동하고영등포에서 인천 본가로 전철로 이동해서 하루를 묵고 월화요일에 학교에서 수업을 듣기 위해 동암역에서 부천까지 전철로 학교까지 등교하고수업을 마친 화요일 저녁에 부천에서 영등포로 버스 타고 이동해 다시 밀양까지 6시간을 통일호에 몸을 싣고 지친 몸으로 밀양에 도착하면 섬기던 교회로 가기 위해 버스로마을 버스에 신세를 져야만 했다. 30세 젊은 나이였기에 이런 미친 짓을 했지지금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농촌현실과 농촌교회의 상관관계 연구

거창한 M.A 석사논문 제목이다당시 섬기던 농촌교회의 현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일 정도로 열악했다하지만 농촌교회의 자화상이 단지 농촌이라는 지역적 한계로 인해 막막한 것이 아니라정치적사회적구조적 패러다임 자체가 도시 집중화 정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농촌을 망가지게 하는 요소들이 즐비했는데 필요악이라고 과소평가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이런 구조적 문제를 보게 된 나는 내 딴에 논문에서 농촌 정책에 대한 구조적정치공학적 문제에 대항하여 비평적 성찰을 하는 논문을 작성했다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당시 논문 심사를 맡았던 서울신학대학교의 보수적 성향의 선생님들에게 논문이 너무 진보적이라고 혼지껌이 났던 기억이 생생하다이렇든 저렇든 그렇게 만들어진 내 석사논문은 1990년대 농촌교회 연대의 마중물로 자주 인용되는 근거 논문이 되곤해 나름의 보람이 되었다지난 주간에 서고 정리를 하다 그때 논문이 보여 꺼내 책상위에 올려 놓고 다시 한 번 복기하다보니 만감이 교차한다이제 3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누렇게 빛 바랜 논문을 살피면서 당시 논문을 쓸 때 혈기왕성했던 기억의 언저리를 더듬어 보는 추억을 가져 보았다.

그래그래도 그때는 참 순수했던 꿈이 있었다앞으로 교계를 위해 펼치게 될 내 자아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첫 번째 석사학위를 따기 위해 8-10번이나 차를 갈아타는 수고도 할 만했다미래가 있었으니까단독목회 경력이 없으면 목사 안수를 받는 자격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이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한 코스워크로 잠시만 시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역을 시작한 교회였지만막상 부임하고 나서 보니 농촌교회이기에 무력했던 일체의 부당함에 항거하고 싶었기에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겼다들녘에 있는 보리와 벼 이삭을 쳐다보면서 기타를 들고 찬양한 뒤에 그것들에게 듣든지 않든든지 설교를 했던 웃픈 추억도 있다.

벼와 보리들은 들으라외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지나가던 마을 어른들이 새로 부임한 전도사가 조금 이상하다고 고개를 흔드는 이들도 있었다하지만 당시 섬기던 교회 지체들은 이런 나를 순결하게 사랑해주었다그들에게 받은 사랑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

2024년 초에 농촌교회를 생각해 본다그 명맥이 언제까지 이어질까농촌교회에서 예배하는 예배 소리가 언제까지 들릴까도시 교회의 리더들은 알까농촌교회의 소멸은 도시 교회 소멸이 이어진다는 것을지금의 도시교회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농촌교회가 거름이 되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논문 심사일에 까칠하게 냉소적으로 야단치던 선생님의 일성이 지금도 선명하게 귓가에 맴돈다.

이 전도사의 논문에는 너무 실천신학적인 이론 분석만 보여눈물흘린 모습이 보이질 않아!”

그날에 머리를 조아리며 선생님의 야단을 혹독하게 맞았지만마음으로 양보하지 않은 게 있다나는 그때가 목회 여정 중에 농촌교회를 섬기고 있던 몇 안 되는 지체들을 품고 제일 많이 울며 목회했던 시기였다는 자존감은 머리 숙이지 않았다신학교 교수들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알 수 없는 농촌교회와 농촌교회 목회자의 치열한 애환을. 34년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소장 논문은 누렇게 그렇게 색이 바래지고 있다나의 나날들과 함께.